<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3화>
113화. 그럼 그럴까
홍영준.
첫 번째 올림픽에서는 동메달, 두 번째 올림픽에서는 부상으로 인한 수상 실패, 세 번째 올림픽에서야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건 레슬링 선수.
안시현은 『칠전팔기』의 정승상 캐릭터의 모티프가 된 바로 그 홍영준 선수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정혜영 때처럼 자신이 연기할 배역의 모티프와 직접 마주한다면 캐릭터의 구축의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김진모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김진모는 홍영준과 함께 예능에 출연했을 때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안시현의 부탁에 김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려 봐. 지금 바로 연락해 볼게.”
김진모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1분 남짓 통화를 한 뒤, 김진모가 안시현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조건이 있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상관없어.”
“별건 아니고, 형수님이 네 팬이라서 사인 좀 해 달라고 부탁하셨단다. 네 작품 DVD랑 포스터, 네가 광고한 제품들 싹 다 소장하고 계시대. 아, 팬미팅도 한 번 가셨다네.”
“그래? 100장도 해 줄 수 있다고 전해 드려. 같이 오시면 더 좋고.”
“들었죠, 형? 형수님이랑 같이 냉큼 오십쇼.”
통화를 끝마친 김진모가 미소를 지었다.
“지금 바로 오신다네.”
“땡큐.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겠다.”
“우리 사이에 별말을 다 한다. 너라면 내가 캐릭터 구축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안 도와줬겠냐?”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이라도 데리고 들어왔겠지.”
“응. 지금 내가 딱 그 심정이야.”
회귀 후 벌써 7년 차를 맞이하게 됐다.
그사이.
안시현과 김진모의 입지는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두 사람 모두 거액의 제작비가 투자된 작품에서 주연을 맡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연예계에서도 유명한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지만, 대중들에게는 평범한 친구보다는 선의의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실제로 간혹 인터넷에서는 안시현과 김진모를 비교하는 글이나 기사가 더러 보이기도 했다.
물론 세간의 시선과 달리, 안시현과 김진모가 경쟁을 의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만약 김진모가 지금의 자신처럼 캐릭터 구축에 어려움을 겪으며 도움을 청했다면?
안시현은 설사 작품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도와줄 생각이었다. 김진모가 선뜻 도움을 준 것처럼 말이다.
“영준 형 바로 출발한다고 했으니까, 이제 마음 편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돼.”
* * *
안시현이 지금까지 구축해 놓은 정승상 캐릭터의 완성도가 떨어지냐고 묻는다면, 연습을 지켜본 모두는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다만 이전에 안시현이 연기했던 캐릭터들과 비교하면 어떻냐는 질문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리수철, 정영빈, 남궁수민 등.
지금껏 보여 줬던 캐릭터들과 비교하면 심리 묘사에서 깊이가 약간 떨어진다는 게 공통된 견해였다.
훌륭하게 캐릭터를 구축한 게 사실이지만…….
안시현은 그 약간의 아쉬움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이대로 크랭크인에 들어간다면 촬영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후에도 줄곧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여러 작품의 캐스팅을 거절하고 『칠전팔기』의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인 건, 배우로서의 미래에 대한 고민의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해답을 찾는 건 요원해진다.
『나와 나의 시간』의 정영빈 캐릭터를 구축할 때 정혜영을 옆에서 열흘 동안 지켜보았던 게 큰 도움이 됐던 것처럼, 이번에는 홍영준을 만나서 정승상 캐릭터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다.
그 과정을 통해 군 입대 전후로 줄곧 해 왔던 고민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김진모가 통화하고부터 30여 분 뒤.
두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방 안으로 30대 초반의 부부가 들어왔다. 곧장 오겠다고 한 홍영준 부부였다.
홍영준의 아내는 사인을 받을 물건들을 품에 안은 채 어쩔 줄을 몰라 했고, 홍영준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여 줬던 쾌활한 성격 그대로 기분 좋게 웃으며 안시현에게 다가와 먼저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안시현 배우님. 이야. 실제로 보니까 분위기가 장난 아닌데요? 아내가 데뷔 때부터 팬이었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에 응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아내에게 단독 팬미팅을 시켜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죠. 게다가 저 개인적으로 안시현 배우님을 꼭 보고 싶었고요. 진모한테 이야기를 엄청 많이 들었거든요.”
다행히 홍영준은 안시현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최근 홍영준과 김진모는 서로를 자신의 집에 초대할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다.
그리고 김진모는 홍영준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그의 아내가 좋아하는 안시현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해 줬다.
덕분에 홍영준은 안시현과 첫 만남임에도 몇 번은 만났던 사람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음 작품에서 연기해야 할 캐릭터가 홍영준 코치님을 모티프로 만들어졌습니다. 대체적으로 문제가 없었는데…… 딱 한 가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요.”
“어떤 부분일지 궁금하네요.”
“홍영준 선수가 세 차례에 걸쳐 올림픽에 도전하면서 느끼셨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네요.”
안시현은 회귀 전 오랜 무명 생활을 끝에 결국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었다.
거듭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여 목표를 성취했던 그 삶은, 홍영준의 인생사와 흡사한 부분이 꽤나 많았다.
그 경험에 빗대어 홍영준이 느꼈을 감정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짐작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정승상 캐릭터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벽히 캐릭터의 구축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시현의 속내를 들은 홍영준이 생각에 잠겼다.
몇 분 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일 시간 되세요?”
“아직 백수라 홍영준 코치님이 편하신 시간에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 자세한 건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로 하죠. 저도 좀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내일 오후 2시에 액션 스쿨에서 볼까요?”
“네. 그렇게 하시죠.”
“약속은 잡혔고…… 오늘은 와이프의 팬심을 충족시켜 줘도 될까요? 아, 참고로 와이프가 팬클럽 카페 뉴스 게시판지기에요. 안시현 배우님과 관련된 기사는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싹싹 긁어모으더라고요. 심지어는 외신 기사까지도 번역해서 올릴 정도니 말 다했죠.”
“그러고 보니 낯이 익네요. 두 번째 팬 미팅이랑 봉사 활동 때 오시지 않으셨어요? 『편지』 촬영할 때 회장님이랑 같이 밥차 가지고 오셨잖아요.”
안시현의 말을 들은 홍영준의 아내가 함박미소를 지은 채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맞, 맞아요! 기억해 주시는 거예요?”
“당연히 기억하죠. 몇 번 뵌 분들은 잊을 수가 없더라고요. 와, 그때 사인 엄청 받아 갔는데, 아직도 사인을 받을 게 남아 있어요?”
“관련 상품 나올 때마다 죄다 사다 보니…….”
“식사 끝나고 바로 사인해 드릴게요.”
그날 저녁.
안시현의 팬클럽 카페에는 황홀한 단독 팬미팅을 한 홍영준의 아내가 올린 장문의 후기가 올라와 팬들로부터 엄청난 추천을 받았다.
* * *
다음 날 오후.
액션 스쿨의 부대표 정광홍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차에서 내리는 홍영준을 보고서 90도로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갖췄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랜만이다, 광홍아. 요새 TV에 자주 나오더라? 이야. 건물 으리으리한 거 보소. 성공했네.”
“아하하. 와이프랑 같이 빚으로 올린 겁니다.”
“안 배우님은?”
“옷 갈아입고 몸 풀고 있습니다. 같이 운동하자고 하셨다면서요?”
“응. 이왕 도와주는 거 제대로 도와줘야지.”
안시현과 홍영준은 액션 스쿨 뒤편에 있는 운동장을 죽어라 뛰면서 구슬땀을 흘렸다.
문제는 운동의 난이도였다.
홍영준은 안시현이 지쳐서 더 이상 뛰지 못할 때까지 계속해서 뜀박질을 시켰다. 정광홍 부대표와의 훈련으로 체력이 부쩍 좋아진 안시현이지만, 계속해서 뜀박질을 하면 버텨 낼 재간이 없었다.
“허억…… 허억…….”
결국 안시현이 운동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옆으로 다가온 홍영준이 물병을 건네고서는 손을 내밀어 안시현을 일으켜 세웠다.
“힘들죠?”
“체력 훈련 할 때 이후로, 간만에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을 정도로 움직인 거 같아요.”
“전 그보다 더 심한 난이도의 훈련을 재활할 때 매일같이 했어요. 2002년 월드컵 때는…… 전 대한민국 4강에 갔다는 걸 9월에서야 알았어요. 의식주 해결하는 걸 제외하면 재활에만 신경이 쏠려 있었거든요.”
“어떤 심정이었을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땐 재활 말고는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왔어요. 2004년에 마지막으로 올림픽에 도전해 보고 모든 걸 멋있게 은퇴하고 싶었거든요. 다행히 2003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수상하고 자신감이 붙었죠. 근데…… 세계선수권 대회가 끝나고 다음 달에 또다시 부상을 입고 말았어요.”
“아…….”
안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 세계선수권 금메달, 올림픽 금메달 등 주요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과 2개의 은메달과 2개의 동메달을 획득한 홍영준의 커리어는 엄청나다.
문제는 그가 현역 시절 내내 부상과 죽어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는 거다.
“그게 일곱 번째 부상이었어요. 그때,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가는 내내 펑펑 울었어요. 선수 생활을 그만둘지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했죠.”
“일곱 번…… 저라면 과연 버틸 수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단 한 번만으로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요.”
홍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던, 세상 모든 걸 잃은 것만 같은 그 시간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네. 저도 그래서 포기하려고 했어요.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가 해 줬던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그만뒀을 거예요.”
“아내분께서 뭐라고 말씀하셨길래요?”
“나중에 술 먹고 지지리 궁상떨지 않을 자신 있냐고 하더라고요. 조금이라도 미련이 있다면, 찌꺼기마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불태우라나 뭐라나. 하하하. 그 말 듣고 다시 재활을 결심했죠.”
안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홍영준이 한 말은,『칠전팔기』의 시나리오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대사가 존재한다.
다만 시나리오만 보면서 감정 이입을 할 때와, 당사자인 홍영준으로부터 사연을 듣고 나서 대사를 떠올리며 느끼는 감정은 전혀 달랐다.
홍영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정승상이 위기의 순간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가 조금씩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쉬웠던 무엇인가가 조금씩 채워져나갔다.
“그 일이 있고 다시 재활에 매진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에 출전하셨잖아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몇 번 말했지만, 사실 그때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어요. 발목 상태가 영 별로였거든요. 진통제를 맞아 가면서 경기를 하는데…….”
안시현과 홍영준의 대화는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계속됐다.
안시현은 기록하거나 녹음하지는 않았다.
홍영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그것을 정승상 캐릭터에 어떻게 대입할지만을 고민해 나갔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뒤.
안시현이 홍영준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신 덕분에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에이. 그냥 추억 팔이 한 번 한 건데 도움이 됐다니까 다행이네요. 시사회에 꼭 초대해 줘요. 아,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앞으로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말도 편하게 놔 주세요.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
“그럼 그럴까?”
그로부터 며칠 뒤.
안시현이 JM액터스를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