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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14화 (114/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4화>

114화. 준비됐으면

홍영준과의 만남 이후.

안시현은 아침 운동을 제외하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외부와의 연락도 최소화한 채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아쉬웠던 1%.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 정승상이 겪었을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른 저녁.

퇴근한 정혜영은 출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책상에 앉아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안시현을 등 뒤에서 껴안으며 근심을 담아 속삭였다.

“아직도 시나리오 보고 있어요?”

“으음. 벌써 퇴근했어요?”

“벌써는 무슨, 8시가 다 돼 가거든요? 솔직히 말해 봐요. 오늘 의자에서 몇 번이나 일어났어요?”

정혜영의 질문에 안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정혜영이 출근한 이후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갈 때 정도를 제외하면 시나리오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결혼한 이후.

안시현은 시나리오나 대본 검토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는 법이 없었다.

캐릭터 구축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편지』를 준비할 때만 하더라도,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며 정혜영의 내조에도 충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신의 연기 인생에 대해 해답을 찾기 위해서 출연을 결정한 작품인 데다, 홍영준 덕분에 아쉬웠던 부분까지 완벽하게 채울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시나리오를 읽으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세 번?”

“식사도 안 했죠?”

“당신이랑 아침 먹고 나서는 물만 마신 것 같아요.”

“그럼 일어나서 스트레칭이나 좀 하고 있어요. 나가서 요깃거리라도 사올 테니까.”

“그러지 마요. 제가 저녁 식사 준비하는 동안 씻고 나와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됐네요.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정신 좀 차리고 있어요.”

정혜영이 혀를 삐쭉 내민 뒤 몸을 돌려서 집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안시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을 배려해 주는 정혜영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모처럼 시나리오에만 정신 팔린 모습을 보여 준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분식으로 가볍게 저녁 식사를 한 뒤.

허브티를 마시며 정혜영이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간만에 시나리오에 정신 팔린 모습을 보니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네요.”

“당신이랑 열흘 동안 붙어 있었을 때요?”

“네. 제가 말 걸 때까지 시나리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던 거 알고 있어요? 직원들이 수없이 돌아다니는데도 집중하는 걸 보면서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다니까요.”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는데…… 캐릭터 완성이 눈앞에 다가오니까 저도 모르게 조급해졌던 거 같아요. 저녁 식사 못 차려 줘서 미안해요.”

“가끔은 별식도 먹고 그러는 거죠. 그리고 전 오히려 좋았어요. 자기가 집중하는 모습도, 여전하다는 걸 확인한 것도 말이에요.”

정혜영이 안시현의 양손을 꼭 움켜쥐었다. 안시현과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칠전팔기』의 시나리오를 받고 저에게 했던 말, 아직도 유효한 거예요?”

『칠전팔기』의 출연을 확정 지은 뒤.

안시현은 정혜영에게, 촬영을 마무리하는 대로 최소 2년여의 휴식기를 가질 거라고 말했다.

외부 스케줄은 적절하게 소화할 테지만, 배우로서의 활동은 2년 이상 푹 쉬면서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정혜영은 그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냐고 묻는 거였다.

안시현이 뜸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유효해요.”

“그럼 제 눈치 보지 말고, 마지막 OK 사인 날 때까지는 작품에만 집중해요. 식사 차려 주는 것도, 집안일도 내팽개치라고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2년 동안 쉬겠다고 결정했으면, 눈곱만큼의 미련도 남기지 말아야죠. 전력투구해요.”

결혼 후.

그는 남편으로서의 안시현과 배우로서의 안시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왔다.

정혜영은 그 균형이 깨지기를 바라고 있다.

하루 종일 시나리오에만 몰두했던 것처럼, 안시현이 『칠전팔기』에 모든 걸 쏟아 내기를 원했다. 정승상 캐릭터의 구축에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대번에 파악하고서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고마워요.”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정혜영을 끌어안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느끼는 것임에도 안시현은 다시 한번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녀와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말이다.

정혜영의 배려 덕분에 안시현은 눈치를 보지 않고 정승상 캐릭터의 완성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다 됐다.”

안시현이 조율을 끝마쳤다.

*   *   *

안시현, 양상효 감독, 곽상필, 그리고 류성웅까지.

안시현의 요청에 의해서 네 사람이 JM액터스 사옥 회의실에 모였다. 정승상 캐릭터를 완성했고, 제안할 게 있다며 미팅을 바라 왔기 때문이다.

침묵이 멤도는 가운데.

눈치를 살피며 양상효 감독이 포문을 열었다.

“캐, 캐릭터 완성하신 거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홍영준 코치님 덕분에 아쉬웠던 부분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홍 코치님…… 정말 대단한 분이시죠.”

“동의합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말 대단하시더라고요.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영준 코치라면 저도 사석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회의실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홍영준과 관련된 이야기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될 즈음.

안시현이 정승상 캐릭터를 완성하면서 심사숙고하며 내린 결론을 속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오늘 제가 미팅을 요청한 건, 정승상과 지호성의 캐릭터성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 어떨까 싶어서입니다.”

그 순간.

미팅에 참여한 이들의 표정이 제각각 달라졌다.

폭탄을 던진 안시현은 무덤덤했고, 양상효 감독은 배우가 캐릭터성 수정을 요청하자 적잖게 당황한 눈치였고, 류성웅은 안시현으로부터 사전에 언질을 받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데에서 그쳤다.

그리고 곽상필은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안 배우야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스타일이지만, 양 감독이 어떻게 받아들이지가 문제군. 지난번처럼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드러내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나?’

대부분의 감독들은 배우들이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이는 곽상필이나 양상효 감독도 마찬가지다.

곽상필은 메가폰을 잡으면서 단 한 번도 대사를 늘려달라는 배우의 요청을 받아들인 적이 없고, 양상효 감독은 요청한 배우의 하차로 자신의 소신을 드러냈다.

하지만 합리적인 피드백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배우의 요청이 개인적인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닌, 작품의 퀄리티 향상을 위해서라면 감독의 입장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아직 대본 리딩조차 하지 않은 시기다.

큰 틀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일부만 수정하는 거라면, 일정이 타이트하기는 해도 대본 리딩 전에 수정 사항을 반영하는 게 가능하다.

“으, 으음…… 일단 어떤 식으로 캐릭터성을 수정하고 싶은 건지 들어 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네. 제가 수정을 원하는 건, 신 69와 신 70입니다.”

신 69와 신 70.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뒤 정승상이 불의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6개월 재활 판정을 받으며 지호성 코치와 대성통곡을 하는 신이다.

안시현이 수정을 원하는 건 그 두 신이 전부였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관객들의 감동을 자아내기 좋은 신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명장면이 될 수 있느냐고 물으면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뭔가가 조금 아쉽다고 느꼈고, 덩달아 캐릭터 구성 또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홍영준 코치님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비로서 그 아쉬움이 뭔지 깨달았습니다.”

“아, 아쉬움의 정체가 뭐였나요?”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겁니다.”

신 69와 신 70.

정승상과 지호성 코치가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여야 할 시기에 좌절하는 신이고, 영화 후반부 정승상의 금메달 도전기가 감동으로 다가오도록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맛을 살려야만 하는 신이다.

기존의 시나리오 또한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전 신 69와 신 70에서 정승상과 지호성이 밑바닥을 드러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지만, 5살 때부터 유도만을 해 온 정승상의 마지막 목표가 좌절되는 순간이라고 보면 조금 아쉬운 거 같습니다. 연습을 해 보아도 조금은 맛이 부족하더라고요.”

“신 69과 신 70이라…….”

양상효 감독이 생각이 잠겼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신 69와 신 70은 『칠전팔기』의 많은 신들 중 몇 안 되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양상효 감독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홍영준의 사연을 시나리오로 각색해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자신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완성된 시나리오는 양상효 감독의 마음에 쏙 들었다. 굳이 퇴고를 거칠 필요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결과물이 나왔다.

신 69와 신 70을 제외하면 말이다.

평생 유도만 해 왔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세 번째 올림픽 도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선수와 그런 선수를 어릴 때부터 가르쳐 온 코치.

두 사람이 느꼈을 감정이 100% 공감되지 않았다.

녹음해 온 홍영준의 사연을 몇 번을 들어도, 그때의 심정을 시나리오에 완벽히 녹여 내는 게 어려웠다.

안시현은 지금 그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만약 안시현의 판단이 옳다면, 영화 후반부의 처절한 도전기의 맛이 확 살아날 가능성이 높다.

고민 끝에 양상효 감독은…….

“두 분의 연기를 직접 보고 결정했으면 하는데요. 미팅, 다음에 다시 잡을까요?”

“아뇨.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1, 1시간이요?”

“네. 작정하고 준비해서 왔거든요.”

1시간 뒤.

안시현과 류성웅이 신 69와 신 70을 직접 연기하는 걸 본 뒤에 피드백을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걸로 잠정 결론이 났다.

미팅이 마무리 된 후.

안시현과 함께 연습실로 온 류성웅이 미소를 지은 채 혀를 내둘렀다.

“이 작전이 진짜로 통할 줄이야.”

“통할 줄 알고 동의한 거 아니었어요?”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지. 주연 배우를 하차시키지는 않을 거고, 무엇보다 합리적인 의견 제시이니까 얼굴 붉힐 일도 없을 거라고 봤을 뿐이야. 양상효 감독님이 받아들일지와는 별개의 문제였지. 물론 아쉬움을 느낀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신 69와 신 70에 대한 아쉬움을 느낀 건 안시현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두 신을 연기해야 할 류성웅 또한 같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오늘의 미팅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두 사람은 신 69와 신 70의 방향성을 살짝 수정하는 것이 영화 전체의 완성도를 높여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양상효 감독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을 위한 선택이 아닌 영화의 퀄리티 향상을 위한 피드백이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내다봤다.

그렇게 결정된 미팅은 절반의 성과를 낳았다.

여지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양상효 감독을 납득시키는 거야, 지금부터 연기를 통해 자신들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간만에 호흡 맞추겠네.”

“준비됐어?”

“저야 완벽하죠. 선배는요?”

“아직 부족하지만, 민폐 끼치지 않을 정도는 돼. 혹시 모르니까 서로 가볍게 잽 좀 날려 볼까?”

“좋죠. 스트레이트랑 훅은 1시간 뒤에.”

안시현과 류성웅이 1시간의 준비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시간 뒤.

양상효 감독과 곽상필이 연습실을 찾았다.

‘어떤 연기를 보여 주려나?’

캐스팅 이후, 양상효 감독은 안시현과 류성웅의 연기를 두 눈으로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의 연기력을 믿었기에 대본 리딩 전까지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신의 수정을 요청한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안시현과 류성웅이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연기력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시나리오를 통해 표현한 것보다 더 처절하고 애절한 감정 연기를 통해서 아쉬웠던 부분을 채워 주기를 원했다.

“준비됐으면, 시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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