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5화>
115화. 충분합니다
안시현과 류성웅은 감정 표현을 과하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절제를 한 편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때론 참는 게 슬프게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올림픽 출전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선수와 코치의 모습은 처절하고, 서러웠고, 흡사 절망마저도 느껴졌다.
당초 양상효 감독은 정승상과 지호성 코치가 오열을 하는 걸 생각하고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하지만…….
안시현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절제를 통한 제한된 감정 표현이 오히려 감동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어느새.
연기를 지켜보던 양상효 감독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동시에 슬쩍 곽상필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애써 무덤덤한 척을 하려 노력했지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도리는 없어 보였다.
‘…….’
양상효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연기가 모두 끝난 뒤, 양상효 감독이 안시현과 류성웅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곽 고문님과 같은 명감독이 되는 게 제 목표인데…… 한참 더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 배우님의 해석을 통해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 말씀은…….”
“네. 요청 받아들이겠습니다. 더불어 몇몇 신 또한 수정을 할 생각입니다. 큰 변화는 아닐 테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릴까요?”
“첫 대본 리딩 때까지는 수정된 대본을 전달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양상효 감독이 안시현의 수정 제안을 받아들였다.
새 대본 지급은 첫 대본 리딩 때가 될 예정. 안시현은 하루빨리 그날이 오기를 바랐다.
* * *
『칠전팔기』
대본 리딩 당일.
안시현은 박정상과 함께 1시간이나 일찍 JM액터스 사옥으로 향했다. 대본 리딩 장소 먼저 도착해서 검토를 하는 건, 회귀 전부터 줄곧 이어 오고 있는 안시현의 루틴 중 하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중력이 살아나질 않았다.
무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했음에도, 안시현과 박정상보다 먼저 도착한 배우가 존재했다.
바로 류성웅이었다.
그는 매니저도 없이, 살짝 붉어진 눈으로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안시현과 박정상을 맞이했다.
류성웅의 상태를 보자마자 안시현은 직감했다.
“선배, 혹시 연습실에서 밤샜어요?”
“아…… 그렇게 됐어. 간만의 복귀라서 그런지 긴장돼서 잠을 잘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그냥 작정하고 연습해 버렸지 뭐야.”
“쪽잠이라도 자고 오는 게 어때요?”
“괜찮아. 대본 리딩 마무리하고 푹 자면 돼. 아 참. 음료수랑 주전부리 좀 사다 놨는데 줄까?”
“좋죠. 잘 먹을게요.”
건네받은 음료수를 마시며 안시현이 슬쩍 류성웅의 분위기를 살펴보았다.
충혈된 눈과 피곤해 보이는 기색 정도를 제외하면 컨디션 자체는 크게 나쁜 것 같지 않았다
‘간만의 복귀이니 긴장될 법도 하지.’
안시현의 류성웅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프랑스에서 꾸준히 연기를 했다지만 한국에서의 복귀는 간만이다. 주연은 아니지만, 작품의 흥행을 좌우할 만한 신 스틸러 역할을 맡게 됐다.
『칠전팔기』를 통해 프랑스에서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하고, 연기력을 확실히 인정받아 주연 배우로서 발돋움하는 것.
그것이 바로 류성웅의 목표이리라.
안시현만큼이나 류성웅에게도 『칠전팔기』는 중요한 작품이었다.
대본 리딩을 앞두고 잠이 오지 않을 법도 했다. 실제로 안시현 또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서재에서 대본을 검토하고 있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연습실에서 같이 연습할걸.’
짧은 아쉬움 이후 안시현이 대본에 몰두했다.
회의실의 문이 열릴 때마다 시선을 돌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류성웅처럼 『칠전팔기』를 통해 간만에 복귀하게 될 또 다른 배우를 기다렸다.
대본 리딩 30분 전.
박국영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동시에 안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무표정으로 대본을 검토하던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아버지!”
“허허허. 녀석. 누가 보면 엄청 오랫동안 못 본 사이인 줄 알겠어.”
“11월 이후로 쭉 못 봤잖아요.”
“통화는 자주 했잖니. 설에도 전화해 놓고 말이야. 아참. 전복 잘 받았다, 시현아. 아들 내외가 아주 좋아하더구나. 나도 맛있게 잘 먹었고.”
“나중에 또 보내 드릴게요. 작은아버지가 완도에서 전복 양식을 하시거든요.”
“어휴.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네가 보내 준 전복 덕분에 몸에 좀 힘이 나는 것 같더구나.”
“그럼 왕창 보내 드려야겠네요.”
2003년 여름.
안시현이 군대에 있을 당시, 박국영은 위암 판정을 받고서 건강 악화로 인해 잠정 은퇴를 선언했었다.
당시 안시현은 소식을 듣자마자 다음에 휴가를 나와 박국영의 병문안을 갔었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고, 이후 관리를 잘한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건강을 회복하며『칠전팔기』를 복귀작으로 결정하게 됐다.
원래는 좀 더 쉬다가 복귀할 생각이었지만…….
안시현이 원톱이라는 말에 박국영은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서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시현의 첫 원톱 작품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거니와, 양상효 감독이 컨디션에 맞춰 스케줄을 조정해 주겠다고 배려해 주기까지 했다.
거절을 할 이유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안시현은 11월 이후 몇 달 만에 만난 박국영이 반가워 미소를 지었지만…….
‘그때보다 더 마르셨네. 전복 좀 더 보내 드려야겠어.’
눈에 띄게 마른 박국영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속으로는 탄식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조금 더 말라 보이는 모습이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병원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고, 회귀 전에도 암으로 인해 별세한 게 아니기에 그나마 안심은 됐지만…….
‘몸에 좋은 건 최대한 챙겨 드려야지.’
회귀 이후 줄곧 자신을 챙겨 주며 친아들처럼 대해 준 박국영이 건강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안시현은 다시 대본 검토에 집중했다.
박국영의 건강을 걱정하는 건 첫 대본 리딩 이후로 미뤄 두고, 지금은 대본 리딩에서 최선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할 때였다.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원톱이다.
비중이 높아진 만큼 좋은 연기를 보여 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 또한 커졌다. 모든 신, 대사 하나하나와 사소한 움직임마저도 소홀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긴 휴식기 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
『칠전팔기』에 임하는 안시현의 마음가짐이었다.
대본 리딩이 에정된 오전 11시 정각.
“늦어서 죄송합니다.”
양상효 감독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는 회의실을 꽉 채운 배우들을 바라보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독립 영화를 통해 메가폰을 네 번 잡았던 양상효 감독입니다. 좋은 기회가 닿아 좋은 배우분들과 좋은 환경에서 메가폰을 잡게 됐습니다. 부담은 되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워낙 연기력이 출중하시니 저야 잘 거들기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양상효 감독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서는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달리 긴장한 기색도 크게 없었고, 말조차 더듬지 않고 깔끔하게 자기소개를 끝마쳤다.
‘역시 실전에 들어가면 달라지신다니까.’
회귀 전의 양상효는 평소의 모습과 감독으로서의 모습이 180도 다른 걸로 유명했다.
정확히는 대본 리딩부터 마지막 신을 촬영할 때까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특유의 소심한 성격과 멀 더듬는 버릇이 완전히 사라지고, 살짝 낮아진 톤으로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했다.
간만에 양상효 감독의 진면목을 본 안시현은 감회가 새로웠다. 양상효 감독과 새벽까지 배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양상효 감독 다음은 안시현의 차례였다.
“정승상 역을 맡은 안시현입니다. 주연 경험은 몇 번 있지만 원톱은 처음이라 긴장되는 게 사실입니다. 부족한 부분을 호되게 지적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허허허. 연기대상 받은 배우에게 연기로 지적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 그러면 기자들한테 욕먹어.”
“옳소. 형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제 밥그릇 알아서 챙기는 놈한테 잔소리해서 뭐하게? 됐고, 촬영장에서 술, 담배 주의합시다. 전 그거 말고는 바라는 거 없습니다. 분위기 흐리면 저랑 한판 제대로 할 각오하면 됩니다. 이상.”
자기소개의 분위기는 대체로 좋았고, 그 분위기는 대본 리딩 내내 이어졌다.
안시현이 내심 우려하고 있던 양상효 감독에 대한 무시나 배우들의 도 넘은 언행은 없었다. 오히려 중견 배우들과 류성웅 정도를 제외한 배우들은 양상효 감독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바빴다.
초보 감독이라고 무시하는 기색은 전무했다.
무시는커녕 어떻게든지 마음에 들기 위해서 대본 리딩 내내 안달이 나 있는 게 보일 정도였다.
‘역시 지난번에 한번 제대로 엎은 게 도움이 됐어.’
결과적으로 지호성 배역을 맡았던 배우를 단호하게 하차시키고 류성웅을 캐스팅한 건 양상효 감독에게 신의 한 수가 됐다.
당시의 사건은 『칠전팔기』의 출연을 결정한 다른 배우들에게 완벽한 반면교사가 됐다.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 선을 넘는 배우는 그 누가 됐건 용서하지 않는다.
합리적인 피드백을 통해서라면 대사를 늘리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안시현의 눈으로 볼 때, 양상효 감독의 눈치를 보는 배우들 중에는 그 정도의 역량을 지닌 이는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뭐, 배우야 자기 밥값만 잘하면 되는 거지. 분위기 안 흐리고 1인분만 해 줘도 충분해.’
안시현은 생각보다 괜찮은 분위기에 만족했다.
배우들이 양상효 감독의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신인 감독이라고 무시하는 것보다야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애초에 배우가 눈치를 본다고 해서 작품의 퀄리티에 문제가 생긴다면, 철면으로 불렸던 곽상필의 작품은 모두 실패했어야 하는 게 맞다.
감독마다 성향이 다른 건 당연하다.
그 성향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연기를 마음껏 뽐내는 것, 그게 바로 배우가 해야 할 역할이었다.
‘나도 슬슬 시동을 걸어볼까?’
대본 리딩 1시간이 지났을 때.
마침내 안시현이 시동을 걸었다. 부지런히 준비해 온 정승상 캐릭터를 선보일 때가 다가왔다.
“코치님, 저…….”
안시현과 류성웅이 호흡을 맞췄다. 서로 최선을 다해서 연기하며 한 신의 대사를 주고받았다.
연기가 모두 끝났음에도 감탄이나 박수는 없었다.
양상효 감독과 박국영과 류성웅이 미소를 지었고, 몇몇 중견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였다.
‘리액션이 없을 만도 하지. 지금껏 보여 준 게 있는데.’
안시현은 대본 리딩 과정에서 배우와 스태프들의 감탄을 자아냈던 건, 그의 연기 경력에 비해서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이제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입대 전까지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쌓았고, 제대 후 보여준 첫 작품이 무려 황금영화제 그랑프리상을 수상하고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편지』다.
심지어 그가 보여 준 남궁수민 연기는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완벽하게 분석해서 표현했다는 극찬을 받으며, 5월에 있을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의 유력한 후보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
그런 안시현이 백날 대본 리딩에 좋은 모습을 보여 줬다고 감탄이 나올 리가 있겠는가. 기대치가 워낙 높다 보니 리액션이 상대적으로 박한 게 당연했다.
물론 그중 몇 명의 배우는 안시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배울 점을 찾고 있었지만 말이다.
첫 번째 대본 리딩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대본 리딩이 끝난 뒤.
“크랭크인은 3월 26일입니다. 조율할 부분이 조금 남아서 시간이 일주일 미뤄지게 됐습니다. 그 전까지 대본 리딩 스케줄은 매니저 분들을 통해 전달드릴 테니, 되도록 많은 배우 분들이 참여해 주길 바라겠습니다.”
크랭크인 날짜가 예고됐다.
동시에 안시현은 자시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크랭크인 이야기를 듣자마자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 빨리 크랭크인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