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6화>
116화. 기대하지 않는다면
대본 리딩을 하고 나니 안시현은 몸이 근질거렸다. 한시라도 빨리 크랭크인을 해서 완성된 정승상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크랭크인까지 남은 한 달여.
대본 리딩을 하고 캐릭터를 점검하기만 해도 삽시간에 지나갈 시간이지만, 안시현은 그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크랭크인에 목이 말라 있었다.
이는 『편지』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남궁수민이 가장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캐릭터라면, 정승상은 가장 집중해서 준비한 캐릭터다. 하루빨리 선보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아, 그리고 새 대본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수정된 신은 첫 페이지에 표시해 뒀으니, 배역별로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크게 수정한 부분은 없으니 캐릭터에 변화를 주지 않아도 될 겁니다.”
대본 리딩이 끝난 직후, 배우들은 양상효 감독으로부터 예정대로 새 대본을 지급받았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첫 대본 리딩이 마무리됐다.
“수고하셨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회식 장소 빌려 놨으니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메뉴는 한정식입니다.”
배우와 스태프들 중 상당수가 미리 예약해 놓은 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주문은 필요하지 않았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한정식 풀코스가 밑반찬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테이블 위에 세팅되기 시작했으니까.
식사가 모두 준비되는 동안 안시현은 대본을 집어 들었다. 어떤 부분들이 수정되었을까 궁금해서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안시현뿐만이 아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대부분의 배우들이 대본을 확인했다.
‘큰 변화는 없고…… 감정 표현 위주로 수정이 됐네. 신 69와 신 70의 연기를 걸 보고, 적절하게 밸런스를 잡은 듯한 느낌이 들어.’
양상효 감독이 독립 영화에서 잔뼈가 굵은 건 사실이지만, 대중 영화로는 『칠전팔기』가 입봉작이다. 회귀 전 안시현과 작품을 함께했던 그때처럼 완벽함을 바라는 건 무리다.
『칠전팔기』는 좋은 작품이다.
다만 『편지』처럼 완벽한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대다수의 작품이 그러하듯 아쉬운 부분 또한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감정 표현이었다.
새 대본은 감정 표현들로 인해 아쉬웠던 부분들이 일부 수정되어 있었다.
신 69와 신 70에서 절제된 감정이 효과적이라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양상효 감독이 절제한 부분과 폭발시켜야 할 부분을 정확하게 구분 지은 것이다.
안시현은 새로운 대본이 마음에 들었다.
감정 표현들을 일부 수정한 게, 생각 이상으로 『칠전팔기』의 완성도를 높여 줄 거라고 봤다.
‘당장 첫 촬영으로 예정된 신만 하더라도 감정 표현이 살짝 수정된 것만으로도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으니까 말이야.’
* * *
새로운 대본과 함께 대본 리딩을 하며 배우들이 크랭크인을 준비해 나갔다.
양상효 감독은 캐릭터 해석과 관련하여 이견이 있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며, 배우들의 대본 리딩에 관여하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원톱인 안시현의 비중이 막대하고 다수의 중견 배우들이 포진된 작품이니만큼, 양상효 감독이 디렉팅을 할 만한 기회가 많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촬영 전반을 놓고 보면 긍정적인 신호였다.
대본 리딩 때부터 감독이 디렉팅을 남발한다는 건, 그만큼 배우들의 캐릭터 해석이 잘못되어 작품의 완성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니까.
2006년 3월 26일.
예정대로 『칠전팔기』가 크랭크인을 했다.
그 시작은 고사였다.
다수의 언론들이 취재를 온 가운데, 양상효 감독이 돼지머리의 콧구멍에 지폐를 말아 넣었다.
“저희 영화 아무 사고 없이 촬영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양상효 감독은 영화의 흥행이 아닌 무사고와 관련된 소원을 빌었다. 유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도전기를 다룬 영화이니만큼, 촬영 과정에서 배우들이 다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양상효 감독을 시작으로 배우와 스태프들이 차례차례 소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촬영이 끝나는 순간, 모두가 부둥켜안고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허허허. 간만에 하는 연기이니만큼 민폐만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연기를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겁니다.”
보통 고사를 지내면서 소원을 빌면 손익 분기점, 혹은 예상 스코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특이하게도 『칠전팔기』의 배우와 스태프 중 그 누구도 흥행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들 개인적인 목표나 촬영장 분위기, 무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였다.
스포츠 영화는 손익 분기점을 넘기는 게 어렵다.
이전까지 손익 분기점을 넘은 영화들을 보면, 다른 요소들을 적절히 섞은 덕분에 손익 분기점을 넘은 것이라 순수한 스포츠 영화라고 보기 어려운 작품이 많다.
반면 『칠전팔기』는 잘못하면 다큐멘터리 느낌이 날 수도 있는, 노장 유도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도전기라는 정석적인 스토리를 차용했다.
원톱으로 안시현을 캐스팅했음에도 흥행에 대한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안시현에게 호의적이었던 몇몇 언론마저도, 안시현이 앞으로의 연기를 위해 시험적인 선택을 했다며 흥행을 낙관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흥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손익 분기점 돌파나 눈높이를 높인 스코어를 이야기했다가는 비웃음만 살 게 뻔하다. 그래서 다들 의도적으로 흥행에 관련된 이야기는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다.
흥행에 대한 이야기는 개봉 후 성적을 보고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다고 봤다.
고사가 끝난 뒤.
기자들과 짧게 인터뷰를 끝마친 안시현이, 간단하게 허기만 달랜 뒤 곧장 대본을 집어 들었다.
양치를 하고, 동선을 체크하고, 양상효 감독과 첫 촬영 신과 관련하여 의견을 교환하면서도 안시현은 손에서 대본을 놓지 않았다.
‘흥행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면, 기대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줘야지.’
『칠전팔기』의 흥행은 원톱인 안시현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그는 흥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각오를 다졌다.
당초 양상효 감독은 언론에게 첫 촬영을 공개하지 않고 싶어 했지만, 안시현과 곽상필의 거듭된 설득으로 인해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언론과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수록 촬영 과정을 맛보기로 공개하면서 기대감을 증폭시키는 게 흥행에 유리하다는 데에 공감한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안시현이 존재했다.
데뷔 후 단 한 번도 흥행에 실패하지 않은 흥행보증수표, 연기력과 스타성을 모두 겸비한 배우를 놔두고 홍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첫날에 촬영한 신은 도합 두 개.
갓 성인이 된 정승상이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부상으로 인해 고배를 마시는 신 9, 어린 시절 정승상이 유도에 미치게 된 계기를 보여 주는 신 4다.
안시현과 류성웅은 포문을 여는 역할을 맡게 됐다.
고사 겸 점심 식사로부터 1시간 뒤.
“5분 뒤, 신 9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최종 동선 체크해 주세요.”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리고 있는 체육관.
81kg급의 출전 자격을 놓고서 갓 20살이 된 세계 랭킹 1위의 정승상과 올림픽에 두 번이나 출전했고 금메달을 목에 건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자 세계 랭킹 2위인 지호성이 맞대결을 하게 됐다.
승부는 팽팽했다.
서로 절반을 한 번씩 획득하는 데에서 그쳤고, 연장전을 통해서 승패를 판가름하게 됐다.
연장전이 시작하기 전.
이온음료를 입에 머금으며 갈증을 달랜 지호성이 코치에게만 들리도록 조용히 속삭였다.
“승상이 쟤, 상태가 이상해요.”
“이상하다고? 어디가? 오늘 컨디션 완전 좋아 보이던데, 승부도 박빙이었고. 으음. 평소보다 땀을 조금 많이 흘리는 느낌이긴 하다만.”
“메치기를 당할 때, 한 판을 따낼 수 있었는데 절반에서 그쳤어요. 연습 때라면 절대 나오지 않을 실수였어요.”
“……국가대표 결정전이라서 긴장한 건 아니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기술을 정확히 구사했던 녀석이에요. 긴장했을 리가 없어요. 부상을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요.”
“부상이라고?”
“확실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녀석과 최근에 가장 많이 대련한 제 감각을 속일 순 없어요. 저 녀석 지금, 어깨가 안 좋은데 참고 있는 거예요.”
순간 지호성의 코치가 정색했다.
정승상은 이제 갓 20살이 된 선수다.
세계선수권대회를 비롯한 각종 대회에서 금메달을 싹쓸이하며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있기도 하다.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무리하다가 치명적인 어깨 부상을 당하게 된다면?
대한민국 유도계의 큰 손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올림픽 출전이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선수의 건강이 우선이다.
“……잠깐 기다려 봐.”
지호성의 코치가 주심에게 다가가 지호성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 줬다. 이에 주심 또한 굳은 표정으로 정승상과 그의 코치에게 다가갔다.
연장전이 진행돼야 할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경기가 진행되지 않았다. 주심과 정승상, 그리고 그의 코치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지연됐다.
이에 관객들이 술렁였다.
“뭐야, 연장전 왜 안 해?”
“무슨 일 있나?”
“혹시 반칙패 같은 거 아냐? 아니면 저렇게 심각할 리가 없잖아.”
“에이. 그럴 거면 연장전 판정도 안 났겠지.”
“그렇겠지? 그럼 뭔데 저러는 걸까.”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경기나 시작했으면 좋겠다. 누가 이길지 궁금해 미치겠단 말이야.”
관객들이 바람과 달리…….
연장전은 치러지지 않았다.
주심은 연장전을 진행시키는 대신 부심들과 대화를 나눈 뒤,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유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보러 와 주신 관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깨 부상으로 인해 정승상 선수가 기권함에 따라, 자동으로 지호성 선수가 81kg급 국가대표 자격을 획득하게 됐습니다.”
지호성의 예상이 맞았다.
정승상의 어깨는 정상이 아니었다. 한판을 따낼 수 있었던 완벽하게 구사된 메치기가 절반에 그쳤던 건, 어깨가 아팠기 때문이다.
무리를 해서라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이기고 올림픽 출전 기회를 잡고 싶었다.
모든 선수들에게 있어 꿈의 무대인 올림픽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고, 어째서 자신이 어린 나이에 세계 랭킹 1위에 오르게 됐는지를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깨는 부상이 심해지면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부위야. 욕심 부리지 말고 내려놓자. 승상이 넌 아직 어려. 재활 잘하고 신체 나이가 전성기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번 도전하면 돼. 뭐가 옳은 판단인지 잘 생각해 봐.”
“주심이 아닌 선배로서 말하자면…… 미래를 생각해. 한 번의 욕심으로 많은 걸 잃지 마.”
“……포기하겠습니다.”
정승상의 바람은 다음으로 미뤄지게 됐다.
지호성에게 메치기를 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왼어깨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며 한판을 따낼 수 있었던 기회가 절반에 그치고 말았다.
동시에 확신했다.
아…….
올림픽은 물 건너갔구나. 나의 첫 올림픽은 출전이 아니라 재활을 하며 구경하는 걸로 끝나겠구나.
정승상이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실력이 아닌 부상으로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다는 게, 꿈에 그리던 올림픽 무대를 밟을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퍼서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정승상에게 지호성이 다가왔다.
“어깨 괜찮아? 일단 병원부터 가자.”
정승상이 얼굴을 손에서 땠다.
얼굴은 이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울음소리를 내지 않을 뿐,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이 정승상의 울컥한 감정을 대변해 줬다.
“선배, 제 대신 금메달 목에 꼭 걸어 줘요. 부탁해요.”
지호성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정승상의 손을 잡고서,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마. 금메달 그러니까 적당히 울어, 인마. 꼬맹이가 무슨 세상 다 산 것처럼 울고 자빠졌어.”
신 9의 마지막 대사가 마무리된 직후.
“OK. 수고하셨습니다.”
양상효 감독이 OK 사인을 냈다.
첫 촬영부터 원 테이크.
최고의 결과물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