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7화>
117화. 다음
OK 사인이 나자마자.
“수고했어요, 선배.”
안시현이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묻은 액체들을 닦아 내며 류성웅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에 류성웅은 혀를 내둘렀다.
부상이 있다는 걸 암시하는 듯한 완벽하지 않은 메치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조금씩 굳어 가는 표정, 주심의 이야기를 듣고 기권을 결정한 뒤의 오열까지.
안시현의 연기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원 테이크가 바로 그 증거였다.
“어휴. 첫 신부터 너무 살벌한 거 아냐? 그렇게 몰입해 놓고 바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도 그렇고, 못 보는 사이 더 무지막지해졌네.”
“그러는 선배도 호흡 잘 맞춰 줬잖아요. 러닝메이트 덕분에 원 테이크 한 거지, 저 혼자 잘해서 한 건 아니잖아요.”
“프랑스에서 놀고먹은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신 9는 『칠전팔기』의 스토리 라인을 관통한다.
정승상의 목표가 올림픽 금메달임을 드러내며, 영화 내내 정승상을 따라다닐 부상 악령이 일찌감치 시작됐음을 알려 주면서, 훗날 정승상의 코치가 될 지호성과의 인연을 보여 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첫 촬영할 신으로 신 9가 선정된 것이었다.
의미가 있는 신으로 촬영을 시작해서 기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기 위한 전략이었고…….
‘다행이야. 기자분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부정적인 기사가 나올 가능성은 적겠어.’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원 테이크는 안시현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자신과 류성웅의 연기만큼이나 조연과 엑스트라들의 연기 또한 중요한 신이다. 신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호흡이 어긋날 경우 몇 번이라도 다시 촬영하기로 이야기를 한 채 촬영이 시작됐다.
스케줄이 촉박해 어느 정도 현실적인 합의가 필요한 드라마와 달리, 몇 번이건 다시 촬영하며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영화의 장점 아니겠는가.
신9의 촬영은 장점을 살릴 필요가 없었다.
감독, 스태프, 배우들까지, 모두가 만족하는 최고의 결과물이 한 번에 나왔으니까.
“류 배우, 간만의 복귀인데도 장난 아닌데?”
“프랑스에서 단역으로 활동했다고 했을 때는 큰 기대를 안 했는데, 그사이 연기가 더 좋아진 것 같아. 약점을 보완한 느낌이지?”
“계속해서 지켜봐야겠지만…… 방금 전 촬영만 보면 공백기를 가진 이유를 알 것 같네.”
“들린다, 들려. 몸값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
기자들은 안시현보다는 류성웅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양상효 감독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칠전팔기』의 원톱이 안시현인 이상 그를 중심으로 기사가 작성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안시현은 원톱이라는 입장에 걸맞은 연기를 보여 주며 원 테이크에 기여했다.
다만 안시현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건 양상효 감독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이미 대중들은 안시현의 폭발적인 연기력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안시현의 연기력을 극찬하는 내용만으로 기사가 구성된다면,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 대중들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행히 류성웅이 안시현과 환상의 호흡을 보여 준 덕분에 제법 괜찮은 화젯거리가 생겼다.
『칠전팔기』의 첫 촬영은 스태프와 배우, 기자를 모두 만족시키며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 * *
첫 촬영 후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시현은 첫 촬영에서 자신과 류성웅의 연기를 복기하며 생각에 잠겼다.
‘성웅 선배가 잘해 준 덕분에 내 오열 연기가 제대로 살아났어. 다른 선배님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엑스트라들의 반응도 최고였어. 브로맨스를 보여 줄 만한 최고의 판이 깔렸어.’
안시현은 정승상과 지호성의 브로맨스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흥행 여부가 갈릴 거라고 봤다.
브로맨스를 제대로 표현하면 두 사람의 캐릭터성이 시너지를 발휘할 테고, 어정쩡하게 표현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거다.
그래서 JM액터스에 먼저 손을 내밀기 전까지 줄곧 퇴짜를 맞았던 것이다.
제안을 받은 소속사와 제작사들은, 최선이 아닌 최악을 가정하고서 검토를 했으니까.
‘성웅 선배가 캐스팅돼서 정말 다행이야. 덕분에 마음 편히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겠어.’
이제 겨우 한 신을 함께 촬영했을 뿐이지만…….
안시현은 지호성 배역을 맡았던 배우의 하차 뒤 류성웅이 캐스팅된 게 신의 한 수라고 생각했다.
『나는 간첩입니다』와 『빌딩 숲』을 함께 촬영해 본 경험 덕분에 서로의 성향에 대해서 잘 알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류성웅은 후보군에 올라 있던 배우들 중 캐릭터 구축을 가장 잘하는 배우다.
류성웅이 구축한 지호성 캐릭터는 정승상 캐릭터의 뒤를 받쳐 주면서도, 배역의 비중에 비해서 존재감을 확실히 뿜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는 곧 안시현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안시현이 회귀 후 연기했던 모든 배역을 통틀어, 정승상은 가장 복잡한 캐릭터성을 지닌 배역이다.
영화의 초반, 중반, 중후반, 그리고 후반부에서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의 특징이 죄다 다르다.
평면적인 캐릭터보단 입체적인 캐릭터가 대중들을 만족시키기 좋은 게 사실이지만, 정승상 캐릭터의 경우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입체적인 게 사실이다.
연기하기에 수월하지 않은 배역이다.
그래서 지호성 역을 맡은 류성웅의 역할이 중요하다.
극 중후반부 이후 정승상과 지호성의 케미가 제대로 살아난다면 안시현의 부담이 한결 줄어들게 될 테니까.
첫 호흡을 맞춰 본 뒤.
안시현은 류성웅을 믿고서 부담감을 내려놓고 연기해도 된다는 확신을 품게 됐다.
지호성이 해 줘야 할 역할은 많지 않았다.
그저 신 9에서 보여 줬던 것처럼, 시종일관 정승상을 걱정하고 챙기는 포지션을 지켜 주기만 하면 된다.
류성웅은 그것을 너무 잘 살려 줬다.
* * *
『칠전팔기』의 초반부는 정승상의 첫 올림픽 도전이 좌절되기까지를 그린다.
운동선수인 부모님의 재능의 한 몸에 물려받은 정승상은 어릴 때부터 유도 천재로 불렸고, 국내에서는 라이벌을 찾아보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청소년기까지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그런 정승상에게 올림픽 출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불의의 어깨 부상으로 인해 낙마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행히 어깨 부상은 생각보다 빨리 회복됐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두 번째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당당히 국가대표 자격을 따냈지만, 부상으로 인해 동메달에 그치면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세 번째 기회는 정승상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와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선발전까지는 통과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올림픽을 한 달 앞두고 훈련 중에 찾아온 뜻밖의 부상, 그로 인해 후배에게 올림픽 출전 자격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부상 악령.
정승상은 세계 선수권 대회를 비롯한 각종 주요 대회에서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 주다가도, 올림픽을 앞두고서 항상 부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세 번째 도전이 좌절된 이후.
정승상은 모든 걸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그런 정승상이 마음을 다잡고 운동에 전념하게 만들어 주는 게 바로 지호성이다.
영화의 중반부는 첫 올림픽 도전이 좌절된 이후, 세 번째 도전이 좌절되고 코치가 된 지호성을 만나 의기투합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리고 양상효 감독은, 중반부의 대미를 장식할 신 41을 비롯한 영화의 주요 신들을 촬영 초반부에 모조리 촬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는 안시현의 요청 때문이었다.
첫 촬영 다음 날.
안시현은 양상효 감독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감독님, 가능하다면 주요 신을 먼저 촬영하고 갔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으음. 따로 이유가 있을까요?”
“제 지금 집중력이 얼마나 갈지 저도 몰라서요. 컨디션이 좋을 때 중요한 신들을 미리 촬영해 놓아야 안심이 될 것 같아요.”
양상효 감독이 생각에 잠겼다.
정해준 촬영 스케줄을 바꾸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주연 배우가 주요 신을 먼저 싹 다 촬영하자고 요구하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어제 보여 준 안 배우님의 집중력이 남다르기는 했어. 정해진 스케줄대로 촬영하기보다는, 컨디션이 좋을 때 주요 신을 몰아서 촬영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고민 끝에 양상효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케줄 변화로 인한 불편함보다, 주요 신을 몰아서 촬영할 때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신 41의 촬영 30분 전.
정광홍 부대표가 안시현의 컨디션을 체크하며 유도 선수 역할을 맡게 될 액션 배우들과 미리 합을 맞출 수 있도록 조율했다.
“첫째도 부상 조심, 둘째도 부상 조심, 셋째도 부상 조심하세요. 다쳐서 촬영 스케줄 전체에 지장 가면 안 되니까 무리하지 마요. 기술을 제대로 소화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연출로 커버할 테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요.”
“저보다 부대표님이 더 긴장한 것 같은데요?”
“마음 같아서는 대역을 해 주고 싶을 정도예요.”
“걱정하지 말고 저 한번 믿어 봐요. 원 테이크는 자신 없지만, 최소한 기술 쓰다가 부상을 입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동안 노력했잖아요.”
안시현은 영화에서 정승상이 사용해야 할 유도 기술들을 대역 없이 직접 구사하기 위해서 정광홍 부대표와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그중.
가장 많이 연습한 기술이 바로 메치기다.
영화에서 지겹도록 나올 기술이기도 하지만, 신41를 위해 연습한 것이기도 했다.
신 41에서 정승상은 다수의 유도 선수들을 상대로 대련을 하게 되는데, 모든 선수들을 메치기로 제압하면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인다.
세 번째 올림픽 출전 기회를 부상으로 인해 무산된 걸, 선수들과의 대련으로 화풀이하는 것이다.
동선을 체크하고, 합을 맞추고, 마지막으로 대본을 한번 살펴보았다. 준비가 끝났다는 확신이 들자 안시현이 양상효 감독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로부터 3분 뒤.
“액션.”
신 41의 촬영이 시작됐다.
쿵!
신 41은 정승상이 대련에서 후배 선수를 메치기로 제압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다음.”
대련이 끝났음에도 정승상은 다음 대련 상대를 찾았다. 다들 눈치를 살피며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아예 정승상이 지목을 해 버렸다.
지목받은 후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승상을 마주보게 됐다. 부상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배를 상대로 대련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그 또한 국내 랭킹 4위를 기록할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다. 아무리 선후배 관계라지만 일방적으로 대련 상대로 지목된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심으로 해도 됩니까?”
“나불거리지 말고 실력으로 증명해.”
“선배라고 봐 드리지 않을 겁니다.”
“아따, 그 새끼 혓바닥 한번 참 길다. 들어와.”
쿵!
정승상은 두 번째 선수마저도 제압했다.
팽팽한 접전이었지만 승기를 내주지는 않았다. 승부수는 첫 번째 대련과 마찬가지로 메치기였다.
“후우…….”
정승상의 얼굴이 땀범벅이 됐다. 연속으로 두 선수와 대련을 했으니 힘들 법도 했지만…….
“다음.”
정승상은 멈추지 않았다. 다음 대련 선수를 지목하고서 세 번째 대련을 연달아 시작됐다.
“다음.”
“다음.”
“다음.”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을 때까지 정승상은 대련을 해 나갔다. 그리고 모든 선수들을 메치기로 제압하면서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보여 줬다.
대련을 통해 말하고 싶었다.
기량이 녹슬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날 이길 선수가 없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올림픽에서 잘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다음 올림픽에 도전할 때는 33세가 된다. 육체가 전성기를 한참 지난 시점이라고 봐야 한다.
심지어 오랜 선수 생활로 잔부상들도 잔뜩 달고 있는 상황, 그때까지 지금의 기량을 유지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정승상이라고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대련을 신청했다. 마음속에 남아 있는 눈곱만큼의 미련마저도 대련을 통해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그래야 후련하게 은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허억…… 허억…… 다음!”
정승상의 한 맺힌 절규가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