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18화 (11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8화>

118화. 없으면 어때

8명의 선수를 제압한 뒤, 정승상이 쓰러졌다.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운 채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옆으로 다가왔다.

정승상이 상대했던 선수들의 코치이자, 과거 정승상을 가르쳤던 인연이 있는 은사였다.

대련 내내 개입하지 않던 은사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정승상의 이질적인 모습에 표정이 굳었다.

“너 왜 그러냐? 올림픽 끝나고 부상 다 나았다고 시위하는 건 아닐 테고, 후배들한테 기량 차이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닐 거 아냐.”

“억울해서 한번 해 봤어요. 기량은 멀쩡한데 부상 때문에 올림픽 출전이 무산되니까, 억울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부상도 실력이야, 이 자식아.”

“선생님은 늘 그렇게 말씀하셨죠. 예전에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정승상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은사는 불안해졌다. 지금껏 본 적 없던 정승상의 이질적인 모습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동의해요. 제가 계속 부상을 입은 건, 제 실력이 부족해서인 거겠죠. 선생님, 혹시 남는 코치 자리 좀 소개시켜 주실 수 있습니까?”

“너 설마…….”

“네. 저 때려치우려고요.”

은사의 불길한 예감은 맞았다.

정승상은 은퇴를 결심하고서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다시 한번 올림픽에 도전하는 건 불가능하다 판단한 것이었다.

“미련은 없고?”

“있죠. 있는데…….”

정승상이 눈을 감았다.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은사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똑바로 응시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으니까.

애써 멀쩡한 척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33세에 올림픽에 출전한다고 좋은 결과를 바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깔끔하게 내려놓고 후배들 앞길 터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털썩.

정승상의 은사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을 감고 있는 정승상의 왼손을 꽉 움켜쥔 채,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가 어렵사리 답을 했다.

“……자리 하나 소개시켜 주마.”

“감사합니다.”

“고생 많았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정승상이 현실을 택했다.

*   *   *

신 41은 다섯 번이나 촬영을 해야 했다.

안시현과 정승상의 은사 역인 박국영의 연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정승상이 후배 선수들과 대련을 하는 부분을 조금 더 맛깔나게 살리기 위해서 재촬영을 택한 것이었다.

정작 신 41의 핵심인 정승상과 은사의 대화 장면은 한 번에 촬영이 마무리됐다.

‘깔끔하네. 확실히 중견 배우 분들이 워낙 잘 받쳐 주니까 촬영이 순조로워.’

신 41의 촬영을 비교적 깔끔하게 마무리한 뒤, 한동안 양상효 감독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는 『칠전팔기』가 크랭크인이 되고 나서부터 독립영화와 대중영화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에서 메가폰을 잡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투자를 한 JM액터스와 혜인원에서 제작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으며, 스태프 구성과 캐스팅을 비롯한 촬영 전반에 많은 도움을 줬으며, 무엇보다 JM액터스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연기력이 탄탄한 중견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하지 못했을 거다.

중견 배우들은 이미 수차례 검증된 이들이고, 기대만큼의 연기력은 반드시 보여 주기에 작품이 확 무너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이 좋지 않아 촬영장 분위기를 흐리는 경우도 있지만…….

『칠전팔기』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박국영을 필두로 다들 성격이 좋은 편이었다. 분위기를 흐리기는커녕 후배 배우들에게 적극적으로 조언을 하며 촬영장 분위기를 살려 줬다.

‘곽 고문님이 이런 분위기까지 감안해서 캐스팅 제안을 하신 거겠지? 역시……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

중견 배우들이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 주며 상대적으로 안시현의 부담감 또한 줄어드는 모양새였다.

실제로 첫 촬영 때와 달리 안시현의 표정에서는 어느 정도 여유가 느껴졌다.

박국영은 공백기를 이유로 양상효 감독이 캐스팅을 꺼려 했던 카드였지만, 곽상필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인해 정승상의 은사 역에 캐스팅되게 됐다.

인연이 깊은 박국영와 함께 촬영해서일까?

신 41에서 안시현의 감정 표현이 기가 막혔다.

실제 스승과 제자 관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은퇴를 결심하고 은사 앞에서 애써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첫 촬영에 대한 언론들의 호평, 좋은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촬영, 뭐 하나 흠잡을 구석이 안 보이는 배우들의 물오른 연기력까지.

양상효 감독이 눈높이를 높이기로 결심했다.

‘스포츠 영화 사상 최다 관객을 노린다.’

*   *   *

“후우…….”

신 41의 촬영을 끝낸 뒤.

차로 돌아온 안시현이 좌석에 몸을 파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박정상은 그런 안시현에게 물병을 건네주며 슬쩍 분위기를 살폈다.

“눈 좀 붙일래?”

“저 오늘은 촬영 없죠?”

“어. 오늘은 없고, 내일 오전에 신 48 촬영 예정이야. 피곤하면 집에 들어가서 좀 쉬어.”

“아니에요. 대본 검토도 해야 하니까 좀 더 있다 갈게요. 피곤하니까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점심 먹을 즈음에 저 좀 깨워 줄래요?”

“쉬고 있어. 난 성웅 씨 촬영하는 것 좀 보고 올게.”

박정상이 문을 닫고 나간 뒤.

안시현은 대본으로 얼굴을 덮었다. 좌석을 뒤로 젖히고 드러누운 채 생각에 잠겼다.

‘주요 신을 연속으로 촬영하니까 피곤하네.’

신 9와 신 41.

슬픔이라는 키워드는 같지만,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전혀 다른 감정들이다. 안시현은 그것을 양상효 감독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연달아 짙은 감정들을 토해 내서일까?

안시현이 피로감을 느꼈다. 이대로 몇 분만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러는 편이 나아. 주요 신을 몰아서 촬영하는 게 맞는 판단이라고.’

피곤한 것과 별개로 안시현은 주요 신을 연달아 촬영하자고 제안한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지 않았다.

배우는 연기로 말하는 직업이다.

자신의 피로감과는 별개로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그것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거라고 봐야 했다.

문제는 양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해야 하는 주요 신을 앞으로 몇 개나 더 촬영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감정적으로 너무 몰아붙여서 역효과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건만, 안시현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랑 성웅 선배랑 함께할 테니까 괜찮아.’

앞으로 촬영할 주요 신 모두, 신 9와 신 41처럼 류성웅과 박국영이 함께할 테니까.

호흡을 맞춰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안시현은 두 사람과 함께 연기하면서 유독 몰입이 잘되는 걸 느꼈다. 감정 표현을 하는 데에 있어 그리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었다.

혼자 연습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배우와 호흡을 맞췄으면 안시현 또한 정석적인 스케줄로 촬영을 하길 바랐겠지만, 류성웅과 박국영이기에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왕 몰입이 잘 되는 거, 난이도가 있는 신들을 초반에 몰아서 싹 다 처리하는 게 나을 거라고 봤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보름만 고생하자. 그 안에 주요 신을 다 촬영할 수 있기를 바라자고.’

*   *   *

『칠전팔기』 크랭크인으로부터 열흘째.

류성웅은 촬영을 하며 제법 많은 감탄을 했다. 그리고 감탄의 대상은 모두 동일했다.

안시현.

『나는 간첩입니다』를 통해 인연이 시작됐고, 어느새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까지 올라선 후배의 연기에 감명을 받았다.

안시현은 연기를 하면서 한순간도 캐릭터가 흔들리지 않았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안시현이 아닌 정승상이 되었다.

다소 약하다고 평가받던 감정 표현마저도 이제는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올림픽 도전이 좌절되면서 느꼈을 후회와 절망들을, 재활이라는 지독한 고통을 이겨내며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선수의 의지가 확실하게 느껴졌다.

한때.

류성웅은 안시현을 시기했었다.

자신보다 늦게 데뷔했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뺏어 가는 후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지 더 좋은 필모그래피를 쌓기 위해서 노력해 봤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한 『사랑하고 싶어』가 제대로 망한 뒤, 류성웅은 『너와 나의 시간』을 통해서 스타덤에 오른 안시현을 수없이 욕하며 술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백날 노력해도 황새가 될 수 없다는 걸.

그 뒤로 류성웅의 연기 인생이 달라졌다.

『빌딩 숲』을 통해 다시 연기력과 스타성을 어느 정도 인정받았고, 대한민국 최초의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인『북파』를 통해서 대한영화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지게 됐다.

그 즈음.

류성웅은 자신의 연기 인생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나는 황새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끝끝내 뱁새에 만족해야 하는 걸까?’

배우로서 더욱 성공하고 싶었다. 조연을 넘어 주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싶었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걸까?

고민을 하던 류성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황새가 될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그 방법이 연기와 프랑스 유학이었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서 자신의 연기관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연기관이 재정립 됐을 즈음.

류성웅은 『칠전팔기』의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안시현이 원톱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배역의 비중과 관계없이 대번에 캐스팅을 수락했다.

‘시현이와 함께하면, 배우로서 나아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다시 한번 안시현과 연기를 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촬영이 시작되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류성웅은 자신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꼈다.

류성웅의 연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지호성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양상효 감독으로부터 단 한 번도 디렉팅을 듣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안시현의 연기가 범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발전해 있다는 것이었다.

류성웅이 배우로서 성장하는 동안.

안시현 또한 성장했다. 좁혀졌을 줄 알았던 격차는 여전했고, 캐릭터 구축을 비롯한 몇몇 부분에서는 오히려 더 벌어지기까지 했다.

‘역시 난 뱁새밖에 안 되는 걸까?’

류성웅의 자존감이 한풀 꺾인 그때.

박국영이 슬쩍 류성웅의 옆에서 다가와 앉았다. 자신이 다가온지도 모르고 생각에 잠겨 있는 류성웅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허허허.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아?”

“아…… 아닙니다, 선배님. 그냥 제 연기 때문에 이것저것 잡생각이 많아져서요.”

“주연 배우가 되고 싶지? 시현이처럼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스타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거지?”

“……티 나던가요?”

“두 작품을 같이 한 사이인데 모를 수가 있나. 조연에 만족할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거야 뻔히 보이지.”

류성웅이 쓴웃음을 흘렸다.

박국영이 말한 대로 그는 스타가 되고 싶었다.

다만 안시현과의 격차를 실감하며 자신감이 사라졌다. 자신이 스타가 될 그릇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박국영의 말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일 정도로 자존감까지 떨어져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박국영이 쓴웃음을 흘렸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류성웅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한때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아니, 류성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배우들이 한 번쯤은 하는 고민이기도 했다.

“고민하지 말고 도전해 봐.”

“제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없으면 어때.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면 되는 거지. 흥행작으로 필모그래피를 가득 채운 배우가 몇이나 되겠어? 실패하면서 배우고 그러는 거지.”

그 순간.

류성웅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박국영의 말을 듣고서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게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