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19화>
119화. 한 번 더
프랑스에 있을 당시.
류성웅은 데뷔 때부터 함께했던 매니저를 통해 여러 시나리오와 대본을 간간히 전달받았다. 그중에는 류성웅을 주연으로 쓰고 싶어 하는 작품들도 더러 존재했다.
하지만…….
류성웅이 복귀작으로 선택한 건 『칠전팔기』였다.
경험이 더 필요하다, 안시현과 한 번 더 작품을 하고 싶다, 신 스틸러 역할이 마음에 들었다 등.
여러 이유를 들었지만, 박국영의 말을 듣고 나니 모두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난 그냥 도전이 두려웠던 거였어.’
혹여나 주연 배역을 맡아서 실패할까 봐, 필모그래피를 망칠까 봐 겁이 나서 도전을 보류한 것에 불과했다는 걸 말이다.
그 어떤 작품도 흥행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거액의 제작비와 확실한 캐스팅 라인을 갖추고도 최악의 시청률로 종영한『사랑하고 싶어』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문제다.
도전하지 않으면 주연이 될 수 없다.
류성웅은 박국영의 말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야 주연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류성웅이 박국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허허허. 이제 정신 좀 드나 봐?”
“네. 바짝 들었습니다.”
“정신 못 차리면 등짝이라도 한 대 때려야 하나 싶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겠네.”
사실 박국영은 웬만하면 후배들에게 조언을 하지 않는다. 안시현처럼 정말로 마음에 들거나, 혹은 촬영장 분위기를 심각하게 흐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후배들이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스타일이다.
류성웅의 경우 두 가지 모두 해당 사항이 없었다.
다만 뭔가를 고민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고, 이대로 놔두면 연기력마저 흔들릴 거 같아서 분위기를 살피다가 달래 주려고 온 것이었다.
다행히 조언의 효과는 적절했다.
박국영과의 대화 후, 류성웅은 한참 동안 매니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어떤 이야기일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주요 신의 촬영을 몰아서 하면 류성웅이 촬영해야 할 나머지 신은 다섯 신이 전부다. 조연이고 상대적으로 출연 분량이 적은 편이기에 스케줄이 여유 있다.
스케줄이 여유 있을 때 배우가 할 게 뭐 있겠는가.
차기작을 검토해야지.
“조만간 캐스팅 소식 들리겠구만.”
박국영은 확신했다.
온갖 핑계를 대며 2년여를 허투루 보낸 류성웅이, 머지않아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말이다.
* * *
오전 7시경.
신 48의 촬영을 앞두고, 안시현이 촬영 준비로 스태프들이 분주한 분교의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앗. 오셨습니까, 배우님. 매너저님은요?”
“이따가 올 거예요. 준비를 좀 하려고 저 혼자 먼저 왔어요. 이것 좀 마시면서 하세요.”
“아이고. 뭘 이런 다 사 오셨습니까.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다들 잠깐 쉬었다 하자고!”
안시현이 카메라 감독에게 음료수가 한가득 든 봉투를 건네주고서 그네로 향했다.
그네에 앉아 차분히 대본을 검토해 나갔다.
‘신 69와 신 70의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감동을 자아내려면, 신 49의 감정 표현이 선행돼야 해. 현실적인 문제에도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못한 채, 미련을 가지고 있던 정승상이 지호성을 만나 진심을 털어놓는 걸 어느 수준으로 표현하는 게 좋을까?’
안시현이 생각하기에 『칠전팔기』의 명장면이 될 만한 최고의 신은 신 69와 신 70이다. 절제된 감정 표현이 심금을 울릴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다음은 정승상이 금메달을 목에 거는 신 115 정도다.
인상 깊은 신은 여럿 있겠지만, 세 신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약하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신 69와 신 70이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기 위해서는, 신 49에서의 감정 표현이 제대로 선행되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현실과 꿈 사이에서 정승상은 현실을 택했다. 중학교 유도부 코치로 취업하면서 선수로서의 삶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기량을 유지하면 한 번 더 올림픽에 도전해도 되지 않을까, 남는 시간에 꾸준히 훈련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어려울 길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미련을 놓는 게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호성이 정승상을 찾아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전해 보자고, 자신과 함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보자고 설득을 하는 게 신 49의 내용이다.
안시현은 현실과 꿈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정승상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수없이 고민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직 함께 촬영할 배우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어느새 다가온 류성웅이 안시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선배도 일찍 나왔잖아요.”
“전초전을 제대로 준비해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느긋하게 나오려고 했는데, 새벽에 눈이 떠져서 대본 좀 읽다가 빨리 출발했지.”
“이하동문이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지?”
“저도 새벽에 깼어요.”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안시현은 류성웅과 두어 번 대사를 맞춰 보기로 했다. 혼자 검토하는 게 아니라 연습을 통해 감정선을 점검해 보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연습을 시작하기 전.
류성웅이 슬쩍 전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 캐스팅에 응하기로 했어.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러브콜을 보내 준 작품이고, 투톱 자리야.”
안시현은 박국영으로부터 류성웅에게 해 준 조언에 대해서 미리 언질을 받았다. 때문에 류성웅의 도전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류성웅이라면 오래 걸리지 않아 도전을 할 거라고 봤으니까. 회귀 전과 성격이 많이 달라졌지만, 성공에 대한 열망을 여전할 거라고 믿었으니까.
다만 그의 예상보다 빠르게 결단을 내리긴 했다.
『칠전팔기』의 촬영이 모두 마무리되고 차기작을 검토할 줄 알았는데, 설사 박국영으로부터 조언을 듣자마자 행동에 나설 줄이야.
‘낭비한 시간들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겠지. 뭐…… 급하게 준비한다고 바로 촬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쁠 건 없을 거야.’
안시현은 류성웅의 도전을 반겼다.
내심 류성웅의 『북파』 이후 2년여의 시간 동안 성과를 내지 못한 게 안타까웠는데, 이제라도 방향성을 제대로 잡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잘 생각했어요. 전 선배가 『북파』 이후에 바로 도전할 줄 알았어요.”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라도 해 보려고.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안 늦었어요. 선배라면 분명 성과를 낼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
안시현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류성웅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류성웅이 맞는 옷을 찾는 데에 성공한 것 같았다.
* * *
신 49.
정승상이 운동장을 뛰고 있는 중학생 선수들을 바라보면서 무심하게 지시를 내렸다.
“열 바퀴 남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 점심에 삼겹살 먹으려면 밥값 해야지?”
“네, 코치님!”
정승상은 제법 괜찮은 코치였다. 그가 코치를 맡은 이후 선수들이 주요 대회에서 입상을 하며 뚜렷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으니까.
다만…….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능력 있는 코치라는 평가와, 나태하고 선수들을 방임하는 코치라는 평가가 공존했다.
실제로 정승상은 선수들이 운동장을 뛰는 동안 지시를 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둔 성과와 달리 코칭에 의욕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선수들이 운동장을 다 돌았을 즈음.
“코치는 할 만하냐?”
정승상의 두 눈이 커졌다.
자신의 옆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앉는 지호성을 보며,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몸을 뒤로 살짝 뺐다.
“잘 나가는 국가대표 코치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원정훈련 때문에 해외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귀국하자마자 바로 온 거야. 너 은퇴했다는 이야기 듣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정승상이 은퇴할 당시.
언론들은 제법 호들갑을 떨었다. 천재 유도 선수의 꿈이 부상으로 인해 좌절됐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반 년 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정승상에 대한 관심은 제법 시들시들해졌다. 언론들은 정승상이 아닌, 향후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할 만한 재능 있는 선수들을 주목하는 데에 바빴다.
그 즈음 지호성이 찾아온 것이었다.
지호성은 말을 돌려서 하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는 인사치레를 한 뒤 곧장 정승상을 찾아온 본론을 꺼냈다.
“승상아, 나랑 한 번만 더 해 보자.”
“일없습니다, 선배님.”
“너라면 4년 후에도 충분히 기량 유지할 수 있어. 신체 능력? 조금 떨어질 수는 있지. 하지만 그동안 쌓아 온 노하우와 기술이 어디 가는 게 아니잖냐.”
지호성은 어릴 때부터 정승상과 함께 운동을 해 오며 많은 걸 가르쳐 줬다. 정승상의 기본기는 지호성으로부터 배운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지호성의 제안에 정승상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관심 없습니다. 재활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요. 연금도 그럭저럭 나오니, 코치 생활 꾸준히 하면 풍족하지는 않아도 부족할 일은 없어요. 전 그거면 만족합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코치로서의 평판도 제법 괜찮은 편이고요.”
“금메달, 따고 싶지 않냐?”
“미련 없습니다.”
“……그래?”
잠시간의 침묵이 맴돌았을 때.
지호성이 대뜸 정승상에게 손을 내뻗었다. 정승상이 당황하며 몸을 뒤로 뺐지만, 지호성의 손은 당초 목적대로 그의 상의를 위로 젖히는 데에 성공했다.
선명하게 각 잡힌 빨래판 복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은퇴한 선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밸런스가 잡혀 있었다.
“이 정도로 완벽한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미련이 없다고?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이건 선수들이랑 같이 운동하다 보니까…….”
“소설 쓰고 앉아 있네. 너 나태한 코치라고 소문 다 나 있거든? 선수들 가르치고 저녁에 혼자서 운동해서 낮에 피곤해가지고 상대적으로 무기력했을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거짓말 그만하자.”
“…….”
정승상의 말문이 막혔다.
작정하고 온 듯한 지호성의 말에 반박할 만한 마땅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횡설수설하다가 또다시 거짓말이 들통 나느니, 아예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지호성은 그런 정승상의 손을 잡았다.
어느새 그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나랑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맞붙었을 때 기억 나냐?”
“제가 어떻게 그때를 잊겠어요.”
“나도 못 잊었다. 그 날 이후 단 하루도 잊어 본 적 없어. 부전승으로 국가대표에 선발됐고, 우여곡절 끝에 금메달을 땄지만…… 단 하루도 네가 신경 쓰이지 않은 적이 없다. 네 것을 훔친 것만 같아 늘 미안했다. 그래서 은퇴하자마자 코치가 되기로 결심했어. 코치로서 네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걸 도와주고 싶었거든.”
“이젠 다 끝났어요.”
“아직 안 끝났어.”
지호성이 정승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승상은 그런 지호성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제안하마. 나랑 함께 올림픽에 도전하자.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끝내고 싶어?”
“전…….”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 대답해 줘. 그리고도 네가 싫다고 하면, 나도 더 이상 미련 안 가질 테니까.”
정승상이 고개를 숙였다. 끝끝내 지호성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대답을 회피했다.
“코치님, 저희 운동장 다 돌았어요! 저희 씻고 삼겹살 먹으러 갈 준비하면 되나요?”
정승상은 선수들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정승상이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지호성처럼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였다.
은사에게 은퇴하겠다고 말한 이후.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부모님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꺼내 놓기로 결심했다.
먹먹해진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정승상이 지호성과 눈을 마주쳤다.
“선배…… 저, 한 번 더 도전하고 싶어요. 이대로 포기하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