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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21화 (12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1화>

121화. 맞출 수 있겠어요?

뚜뚝.

“큭…….”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한 달 전.

한창 연습을 하던 정승상이 인상을 쓴 채 무릎을 꿇었다. 오른쪽 어깨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생각보다 통증이 커서 자신도 모르게 반응이 나왔다.

정승상이 무릎을 꿇은 그 순간.

웅성웅성.

함께 훈련을 하던 선수들이 술렁였다.

“선배, 괜찮아요? 어깨 다친 거예요?”

“구급차 부를까요?”

“뭘 물어보고 있어? 일단 부르고 봐야지!”

선수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어깨 부상을 입은 게 분명해 보이는 정승상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정작 정승상은 부상을 입었음에도 무덤덤했다.

인상을 쓰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구급차를 부르려는 후배들을 만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아. 코치님 들어오시면 차 타고 병원 가면 돼. 괜히 구급차 불러서 시끄럽게 하지 말자.”

“하지만…….”

“나 진짜 괜찮아. 큰 부상 아니니까 걱정들 하지 말고 훈련 마저 해.”

정승상의 바람과 달리 후배들은 좀처럼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지호성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정승상의 눈치를 살폈다.

은퇴를 번복하면서까지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선배가, 고질적인 어깨 부상으로 인해 또다시 낙마하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실력으로 패배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기량이 하락해서 경쟁력을 잃었다면 정승상 스스로도 납득할 테니까.

하지만…….

또다시 부상으로 인해 도전이 좌절되는 건, 정승상도 후배들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미련 없이 모든 걸 쏟아내고서 마무리를 하기를 바랐다.

심지어 정승상은 국가대표 선발전을 한 달 앞둔 지금 이 시점에서, 남자 유도 81kg급 국가대표의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의 기량은 여전했다.

그래서 더욱 후배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거였다. 부상으로 인한 정승상의 고초가 남 일 같지가 않아, 몇몇몇 후배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당연히 훈련이 제대로 이어질 리가 없었다.

감정이 복받친 후배들과 별개로, 여전히 정승상은 감정을 파악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절정에 달한 그 순간.

“OK.”

양상효 감독이 미리 끊어 가기로 이야기가 됐던 부분에서 정확하게 OK 사인을 냈다.

“10분 후에 지호성 시점부터 이어서 가겠습니다.”

“형, 미안한데 저 물 한 병만 주세요.”

“오늘 연기 장난 아닌데?”

“좋아 보인다니 다행이네요.”

박정상으로부터 물병을 건네받으며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언제 들어도 연기가 좋다는 말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줬다.

‘원 테이크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신 69와 신 70은 끊어서 촬영하는 게 맞는 판단이야. 나랑 성웅 선배 둘이서 촬영하는 게 아니니까.’

사실 안시현이나 류성웅은 원 테이크로 촬영을 이어 나갈 자신이 있었다. 연습할 때부터 몰입이 워낙 잘됐기에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문제는 두 사람만 연기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함께 호흡을 맞춰 줄 배우들은 대부분 단역 경험만 있는 이들이다. 안시현과 류성웅이 연기를 이어 나갔을 때 보폭을 맞춰 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원 테이크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NG가 나서 번번이 몰입이 깨지느니, 안정적으로 나눠서 촬영하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물을 마시며 안시현이 숨을 돌렸다.

동시에 슬쩍 체육관 밖을 바라보았다. 류성웅이 스태프들과 동선을 체크하면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습 때처럼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신 69와 신 70은 안시현보다는 류성웅의 비중이 조금 더 큰 신이다 보니, 류성웅의 연기력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게 된다.

연습 당시.

류성웅은 작정한 듯한 좋은 연기를 꾸준히 보여 줬다. 한순간도 흔들리는 모습이 없었다.

연습 때만큼의 모습만 보여 줘도 충분히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았고, 덕분에 안시현은 마음 편하게 다음 촬영을 기다렸다.

신 69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감정을 끌어올릴 신 70의 촬영이 무척이나 기대됐다.

*   *   *

정승상이 어깨 부상을 입은 그때.

대기업의 후원과 관련하여 통화를 하고 있던 지호성은, 체육관 내부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고서 통화를 마무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알고 이만 끊겠습니다. 네. 세부 사항은 만나서 조율하는 걸로 하죠.”

통화를 끝마치자마자 지호성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왔다. 선수들의 분위기를 살피며 정승상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코치님, 승상 선배 어깨 다친 것 같아요.”

“어깨? 구급차는?”

“부르려고 했는데 승상 선배가 괜찮다고, 코치님이랑 차 타고 병원 가면 된다고 만류하셔서…….”

“그걸 말이라고 해!”

지호성이 대뜸 소리를 내질렀다.

굳은 표정으로 선수들을 훑어보고는, 정승상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서 다시 한번 소리쳤다.

“넌 이 새끼야, 부상을 입었으면 얌전하게 구급차 부르라고 하지 무슨 깡으로 만류를 해!”

“큰 부상 아닌데 언론들이 떠들면 귀찮잖아요.”

“지랄하지 자빠졌네. 큰 부상인지 아닌지는 네가 아니라 의사가 판단하는 거야. 궁상 그만 떨고 차 타.”

지호성은 선수들에게 항상 웃으면서 대한다. 화를 내고 윽박지르기보다는, 선수들이 자신의 훈련 방식을 이해하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지도한다.

그가 코치로서도 수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그런 지도 방식이 효과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화한 성격의 지호성이 유독 예민해지고 정색하는 순간이 존재한다.

바로 선수들이 부상을 입었을 때다.

그는 부상의 정도와 상관없이 예민한 모습을 보였다. 선수들의 도전이 부상으로 인해 좌절되는 걸 수차례 겪으면서 일부러 강경한 태도를 보이게 됐다.

그렇게 안 하면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자신이 먼저 감정이 복받칠 것만 같았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지호성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고서 정승상을 데리고 차로 향했다. 정승상의 부상에 자신이 먼저 무너지지 않으려 억지로 강한 척을 했다.

정작…….

정승상의 팔뚝을 잡은 손은 떨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OK.”

두 번째 OK 사인이 나왔다.

신 69는 도합 네 번에 나눠서 촬영할 예정이었다.

두 번의 OK 사인으로 절반을 해결했다. 이제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장면과 병원에 도착해 초조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지호성의 모습을 촬영하면 신 69의 촬영은 마무리된다.

OK 사인이 나자마자.

안시현과 류성웅이 시선을 교환했다. 이내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양상효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죄송한데 바로 이어 가도 될까요?”

“괜찮겠어요?”

“네. 숨 돌릴 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으음. 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운전 장면 촬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안시현과 류성웅은 곧장 촬영을 이어 나가길 바랐다.

운전 장면은 두 사람만 촬영을 하는 것이기에 굳이 휴식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운전 장면을 촬영하면서 한 번에 OK 사인을 받아 냈다.

운전을 하는 내내.

지호성은 괜찮다는 말을 읊조렸다. 정승상에게 말하는 건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강박증이라도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반복했다.

반면 정승상은 병원으로 가는 내내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하며, 심각한 분위기의 지호성과는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운전 장면까지 촬영이 끝나고.

이제 남은 건 병원에서의 촬영뿐이었다.

안시현이 카메라 감독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 69의 마지막 장면은 류성웅 혼자서 촬영하기에, 카메라 감독의 옆에서 류성웅의 연기를 감상할 요량이었다.

“액션.”

양상효 감독의 사인과 함께.

“정승상 환자분, CT 촬영하겠습니다.”

CT실의 문이 닫혔다.

CT실 옆 의자에 앉은 채 지호성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양손을 깍지 낀 채로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냥 가벼운 통증일 뿐이라고.”

최종 편집을 통해 올림픽 국가대표 자격을 내려놓아야 했던 과거의 자신과 부상으로 인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자신에게 대표 자리를 양보했던 20살의 정승상이 오버랩 되는 장면.

지호성이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깍지를 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깨를 비롯한 몸 전체도 조금씩 흔들렸고, 목소리에서는 물기가 묻어났다.

동시에 엑스트라들이 투입됐다.

병원 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초조하게 앉아 정승상의 검사 결과가 좋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호성.

‘제발 OK 사인 나와라. 제발…….’

안시현이 초조한 표정으로 양상효 감독의 분위기를 살폈다. 부디 양상효 감독이 OK 사인을 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현재 류성웅은 배역에 극한으로 몰입한 상태였다.

류성웅이라는 배우가 아닌, 지호성이라는 캐릭터만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간첩입니다』와 『빌딩 숲』을 함께하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박국영의 조언으로 고민이 사라진 지금.

류성웅의 그릇은 지호성이라는 캐릭터가 담아내기엔 너무 커진 상태였다. 흡사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라도 되는 것처럼 폭발적인 연기력을 선보였다.

주객전도로 NG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신 69와 신 70이기에 괜찮았다.

류성웅이 신 스틸러 역할을 해 줘야 할 신이다. 최소한 두 신에서만큼은 류성웅의 존재감이 안시현과 동등해도 괜찮았다.

5분.

무려 5분 동안이나 앉아서 초조하게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류성웅의 모습을 촬영한 끝에, 양상효 감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OK.”

결과는 OK였다.

양상효 감독 또한, 류성웅이 지금 보여 주고 있는 연기가 흠잡을 데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나이스!’

동시에 안시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약 엑스트라들로 인해, 혹은 외부 요인으로 NG가 났다면 진심으로 안타까웠으리라.

방금 전 류성웅이 보여 준 연기는 두 번 보여 주기 힘든 경지의 것이었으니까, 한 번에 끝낼 생각으로 작정하고 배역에 몰입한 것이었으니까.

“10분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양상효 감독이 10분의 휴식을 지시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안시현에게로 다가갔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양상효 감독이 안시현과 함께 병원 밖으로 나갔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건네고서 입을 열었다.

“오늘 류 배우님 연기가 장난이 아니에요.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소름이 돋은 거, 오늘이 처음이에요. 류 배우님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지호성이라는 캐릭터만 자꾸 생각나더라고요.”

“오늘 성웅 선배 연기력이 미치긴 했죠. 연습하면서부터 작정하고 준비하는 게 티가 났거든요.”

“맞출 수 있겠어요?”

류성웅이 좋은 연기를 보여 준 건 사실이다.

문제는 류성웅의 존재감에 안시현이 묻히면 안 된다는 거다. 동등한 것까지는 괜찮지만, 존재감이 묻히면 주객전도가 되고 마니까.

양상효 감독은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거다.

‘존재감을 뿜어낼 만한 부분이 적긴 했지. 감독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돼.’

『칠전팔기』를 촬영하면서 안시현은 항상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고 자부했다.

다만 방금 전 류성웅처럼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정승상이라는 캐릭터가 폭발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만한 장면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있다고 해 봐야 은퇴를 결심하고서 후배들을 연달아 상대할 때의 악에 받친 모습 정도였다.

그마저도 방금 전 류성웅이 보여 준 연기와 비교하면 존재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만큼 류성웅이 보여 준 연기는 엄청났다.

하지만…….

“감독님, 연기 보고 소름 돋은 게 방금 전이 처음이라고 하셨죠?”

“네. 독립 영화를 촬영하면서는 겪지 못한 일이에요.”

“축하드려요. 오늘 두 번이나 소름 돋으시겠네요.”

그렇다고 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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