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2화>
122화. 세상에
『너와 나의 시간』 이후.
안시현은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것보다는 메소드와 적절하게 거리를 두며 꾸준히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빌딩 숲』과 『편지』를 연기하며 마침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더 이상 메소드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연기 스타일을 지니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안시현의 변화는 두 작품의 흥행을 통해 옳은 판단임이 증명했다.
특히나 『편지』를 통해 보여 준 남궁수민 캐릭터는 메소드가 아님에도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완벽하게 표현했다며 극찬을 받았다.
그렇다고 메소드 연기 자체를 아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메소드 연기는 필요한 순간에 완벽하게 꺼내 들 수 있는 비장의 무기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연기 스타일이 메소드 연기와 방향성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메소드와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굳이 메소드가 아니더라도 연기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존재했다.
다만…….
이번만큼은 메소드의 필요성을 느꼈다.
신 69를 촬영하며 류성웅은 인생 연기를 보여 줬다. 『편지』를 통해 한층 성숙해진 안시현의 연기력에 어깨를 견줄 정도였다.
중요한 건 안시현은 주연이고, 류성웅은 조연이라는 거다. 조연이 주연과 동등한 연기력을 보여 주는 건 결코 반가운 현상이 아니다.
잘못하면 주객전도가 될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안시현은 자신이 류성웅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를 위해 과감히 한동안 봉인해 놨던 메소드를 꺼내 들기로 결심했다.
‘원래는 신 115에서만 한 번 쓰려고 했었지만…… 한 번 더 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신 70.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안시현은 정승상 캐릭터에 몰입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대부분은 안시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촬영을 준비해 나갔다.
물론 변화를 눈치챈 사람들도 존재했다.
안시현과 몇 차례 함께 촬영을 한 경험이 있는 박국영, 그리고 양상효 감독이었다.
정작 류성웅은 안시현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 부분부터 감정을 끌어 올려서…….’
정확히는 안시현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OK 사인이 나온 이후, 구석에 앉아 대본을 검토하면서 몰입을 이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양상효 감독은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는 류성웅과,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변한 안시현을 바라보며 기대감을 드높였다.
‘어쩌면, 정말로 하루에 두 번 소름이 돋을지도 모르겠는데?’
안시현과 음료수를 마시며 나눴던 이야기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
양상효 감독은 스태프들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기존에 이야기했던 끊어 가는 타이밍은 머릿속에서 지워 주세요. 제가 별도로 사인을 내지 않는다면 원 테이크로 갑니다.”
『칠전팔기』 최고의 명장면이 될지도 모르는 신을 원 테이크로 촬영하길 바라며 말이다.
* * *
“정승상 환자 들어오세요.”
무덤덤한 표정의 정승상이 문을 열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지호성은, 대답을 잘못하면 멱살이라도 잡을 것 같은 기세로 의사에게 물었다.
“우리 승상이 괜찮은 거죠? 큰 부상 아니죠?”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닙니다. 근육이 살짝 찢어지긴 했는데 정도가 심하지 않아요. 수술을 고려할 수준은 아니니 재활로 해결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우.”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서 지호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쌓였던 긴장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네요. 국가대표 선발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아, 큰 부상은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재활하면서 준비하면 되겠네요.”
“국가대표 선발전요?”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큰 부상이 아니다, 정도가 심하지 않다 등 긍정적인 단어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뜻이 지호성에게 잘못 전달됐음을 깨달았다.
“애석하지만 국가대표 선발전은 무리입니다. 한 달 사이에 유도가 가능할 만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근육이 완전히 붙지 않은 상태로 무리하다가 더 찢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수술을 고려해야 하고요.”
지호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긍정적인 생각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국가대표 선발전이 무리일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서 슬쩍 정승상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정승상의 표정 변화는 없었다.
지호성은 그 표정이 더욱 불안하게 느껴졌다. 혹여나 이대로 도전을 포기하는 건 아닐까,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의욕이 꺾이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그런 지호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승상은 침착하게 의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재발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절반은 넘습니다.”
“100%는 아니라는 거네요?”
“100%는 아니지만, 완벽하게 근육이 붙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하면 근육이 더 찢어질 확률이…….”
“괜찮아요.”
정상승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체육관에서부터 줄곧 굳어 있던 표정이 처음으로 펴졌다.
불안에 떨고 있는 지호성과 시선을 마주한 뒤, 이내 의사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뜻을 전했다.
“선생님, 제 나이가 내년에 서른셋이에요.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에요. 미약한 어깨 부상으로 도전을 포기한다면, 아마 전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 거예요.”
“으음…….”
“설사 근육이 완전 찢어지게 되더라도, 그래서 오른쪽 어깨를 못 쓰게 되더라도 괜찮아요.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보고 싶어요.”
30대 초반.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다. 부상으로 인해 중도 포기를 한다면 평생 동안 미련으로 남을 게 뻔하다.
정승상을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은퇴를 번복한 건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
경미한 부상은 그의 열망을 막을 수 없었다. 어깨 부상이 심각해질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여할 것임을 시사했다.
* * *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부상을 대하는 정승상의 결연한 마음가짐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카메라 감독이 슬쩍 양상효 감독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대로라면 끊어가야 할 타이밍이지만…….
양상효 감독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안시현과 류성웅, 의사 역을 맡은 단역 배우는 여전히 연기에 몰두하고 있는 상태였다.
기존에 끊어가기로 이야기 한 것과 달리, 배우들의 연기가 좋으니 원 테이크에 도전하겠다는 뜻이었다.
‘원 테이크라…… 되면 좋은 거지.’
신 70은 신 69에 비해 대사가 많지 않다.
다만 감정 표현이 절정에 다다른 신이다 보니 나눠서 촬영하려고 한 것이다.
배우들의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끊어 가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오히려 괜히 배우들의 연기를 망치는 선택일 될 수도 있다.
카메라 감독은 연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예능 쪽에서 일하다가 JM액터스에 입사한 뒤로 영화와 드라마를 맡게 됐기에, 그저 지시대로 촬영을 하는 게 사실상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지금 안시현과 류성웅의 연기는 이제까지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대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엄청난 연기를 보여 주고 있다는 걸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 테이크를 방해하고 촬영을 끊어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를 쥔 양손에 힘을 꽉 줬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편집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찍어주고 말겠어.’
그렇게 촬영은 계속 진행됐다.
정승상의 진심어린 고백에 의사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의사로서는 권유하고 싶지 않은 선택입니다만, 이해는 합니다. 선수들은 때론 부상이 악화될 걸 알면서도 도전을 하더군요. 꿈을 위해서라면 몸이 망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꿈에 눈이 멀면 무슨 짓이든 못하겠어요?”
의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미한 부상이지만, 무리하면 악화될 가능성이 꽤나 높다. 그럼에도 말릴 수 없는 건, 당사자가 선수 생명을 걸고서 도전 의사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선수 생명을 걸었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응원은 못 하겠지만, 다시 병원에 올 때는 목에 금메달 걸고 오세요. 아. 그리고 진통제 처방해 드릴게요.”
의사가 처방전을 쓰는 사이.
지호성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정승상을 바라보았다.
“……정말 도전할 거야?”
“선배. 저 정말 간절해요. 이 정도 부상으로 포기할 생각 없어요. 정말로 어깨를 못 쓰게 되도 좋으니까, 할 수 있는 건 모두 해 보고 싶어요. 그래야지 속이 후련할 것 같아요.”
“그러다 다치면 네 선수 인생은 끝이야.”
“선발전을 포기해도 끝나요. 탈락해도 끝나고요. 어차피 이판사판이에요. 그리고…… 선배라면, 제가 어깨가 아파도 선발전을 통과할 수 있도록 잘 도와줄 거잖아요. 전 선배 믿어요.”
지호성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껏 맡았던 그 어떤 제자보다도 더 아픈 손가락인 정승상의 도전이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정승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흔히들 부상 투혼이라고 표현하지만, 결국에는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갉아먹는 행위다. 몸이 망가진다는 건 선수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다.
그걸 알면서도 정승상은 국가대표 선발전에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설사 치명적인 비상을 입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지호성을 믿는다고 말했다.
애초에 지호성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다시 도전할 각오를 굳히지 못했을 터,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한 마지막 순간까지 지호성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국…….
“……멍청한 놈.”
부상이 악화될 게 뻔하다. 의사가 돌려 말하긴 했지만, 한 달 사이에 나을 부상이 아니라면 국가대표 선발전을 온전한 기량으로 치를 수 없을 거다.
설사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더라도 문제다.
올림픽 전까지 어깨가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부정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지호성이 할 수 없는 건 많지 않았다.
정승상의 컨디션 관리에 최선을 다하며, 어깨 부상이 악화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부상 투혼을 결심한 정승상의 뜻이 보답을 받기를 바라는 게 전부였다.
지호성이 참아 왔던 눈물을 쏟아 냈다.
정승상은 그런 지호성의 손을 잡아 줬다.
3년 전.
자신을 찾아왔던 지호성이 손을 잡아 주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선배, 전 아직 멈추지 않았어요. 제 입으로 끝이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선배도 멈추지 말아 줘요.”
“……미련한 놈.”
“코치 하고 있는 놈 찾아와서 금메달 주면서 은퇴를 번복하라고 한 선배만 하겠습니까.”
정승상이 농담을 던져 봤지만…….
지호성의 눈물은 한동안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호성은 한참 동안이나 서럽게 울면서 정승상에게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류성웅의 오열 연기가 이어지기를 몇 분.
“OK.”
몇몇 스태프들의 눈시울이 붉어진 가운데 양상효 감독이 OK 사인을 냈다.
“이대로 가겠습니다. 정리하고 다시 촬영장으로 복귀하도록 하죠.”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고했다는 말도 없었고, 박수를 친 것도 아니고, 기가 막힌 연기에 코멘트를 남긴 것도 아니었다.
무덤덤한 말을 남긴 양상효 감독이 자리를 떴다. 급히 병원을 빠져 나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우…….”
담배를 피며 심호흡을 했다.
양상효 감독이 자리를 비운 이유는 단 하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벅차오른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른 뒤.
양상효 감독이 실소를 흘렸다. 신 70의 촬영 장면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촬영을 하다가 하루에 두 번, 그것도 서로 다른 배우 때문에 소름이 돋는 날이 올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