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3화>
123화. 준비됐습니다
류성웅의 오열 연기는 인상 깊었다. 표정과 몸짓에서 인물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해 냈다.
하지만…….
무덤덤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은 안시현의 연기가 양상효 감독을 더욱 감동시켰다.
‘미팅을 요청했을 때도 느꼈지만, 안 배우님은 절제된 감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을 제대로 알고 있어.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데 말이야.’
양상효 감독은 독립영화 몇 작품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다양한 배우들을 만나 왔다. 그중에는 조연으로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와 스타덤에 오른 배우들도 몇몇 존재했다.
그들 대부분은 감정 표현에서 강점을 보여 줬다. 애초에 감정 표현에서 낙제점을 받은 배우가 연기력을 인정받고 스타덤에 오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안시현 또한 수준급 감정 표현을 할 줄 안다.
다만, 방금 전 보여 준 절제된 감정 표현은 지금껏 보여 준 연기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것이었다.
양상효 감독이 신 69와 신 70에서 정승상이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도록 집필했던 건, 그게 더 효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에 안시현은 직접 미팅을 요청하고서 정승상을 캐릭터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과하지 않으면서도 정승상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도록 절제된 감정 표현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직접 연기를 통해서 자신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이후 양상효 감독은 안시현의 바람대로 정승상의 캐릭터성을 부각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를 소폭 수정했다.
‘안 배우의 연기 덕분에 류 배우의 연기가 살아났어. 절제된 감정 표현이 이토록 심금을 울릴 줄이야……. 그때 보여 준 연기는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건가?’
류성웅의 감정 표현은 수준급 연기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것이 스태프들의 눈시울을 붉힐 수 있었던 건,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자신의 심경을 묵묵히 표현해 낸 안시현의 연기 덕분이었다고 봐야 한다.
방금 전.
신 70을 촬영하면서 양상효 감독은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안시현이라는 배우의 그릇이 크다는 걸, 정승상 역에 안시현을 캐스팅한 게 신의 한 수가 될 거라는 걸 말이다.
“덕분에 한 수 제대로 배웠습니다.”
* * *
신 70을 끝마친 뒤.
류성웅은 나흘 동안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앞으로 다섯 신의 촬영이 남아 있지만, 스케줄이 몰려 있지 않기에 촬영 기간 동안 틈틈이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며칠 후.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류성웅은 싱긋 웃으며 안시현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다.
“내 차기작, 9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것 같아.”
“생각보다 빠르네요? 축하드려요. 드디어 주연 배우로서 발돋움하겠네요.”
“축하는 무슨. 막상 이래 놓고 촬영 들어가면 연기력이 무너질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지레 겁먹고 도망가지는 않으려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
“선배라면 분명 잘할 거예요.”
안시현이 류성웅을 격려했다.
신 69와 신 70에서 류성웅이 보여 준 폭발적인 연기력을 감안한다면, 설사 주연으로서 배역의 비중이 늘어난다고 한들 연기력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영화의 흥행이야 장담할 수 없지만…….
최악의 스코어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면, 류성웅의 필모그래피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지는 않으리라.
“나는 나대로 잘할 테니까, 너도 잘해 봐. 『칠전팔기』의 대박은 좀 더 나중의 일이고…… 일단 6월에 기대해 봐도 되겠지?”
안시현은 류성웅이 무엇을 말하는지 대번에 깨달았다.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이번 대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유력 수상자로 손꼽히는 후보는 도합 네 명이다.
『편지』에서 각각 형사 이정우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남궁수민 역을 맡아 열연한 최정수와 안시현, 『왕의 사람』에서 각각 연산군과 환관 장신 역을 맡아 열연한 송강식과 안광석.
『편지』와 『왕의 사람』은 두 작품 다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즉,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의 주연 배우들이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두고 격돌하는 거다.
『편지』의 또 다른 주연인 김진모의 경우, 배역상 주연이지만 극중에서 보여 준 존재감이나 역할로 봤을 때 조연에 가까웠다는 게 중론이다.
따라서 김진모는 남우주연상이 아닌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를 가능성이 높았다.
두 천만 관객 돌파 영화에서 네 배우가 모두 열연을 보여 줬기에, 어떤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무게추는 안시현과 송강식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있는 게 현실이다.
한쪽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다른 한쪽은 광기 어린 폭군을 완벽하게 연기해 내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으니까.
수상을 낙관할 수는 없지만…….
“선배의 바람대로 되면 좋겠네요.”
안시현은 내심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자고로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하는 법이니까.
* * *
안시현이 바란 대로 『칠전팔기』는 신 69와 신 70를 마지막으로 초반에 주요 신을 모조리 촬영해 버렸다.
남은 주요 신이라고 해 봐야, 마지막 날 촬영이 예정된 신 115 정도가 전부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의미 부여를 위해 마지막 날로 촬영이 미뤄졌고, 그 외에 주요 신의 촬영은 사실상 없는 상태였다.
그 덕분일까?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게 촬영이 진행됐다.
당초 6월 중순에야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됐던 촬영이 5월 말에는 마무리될 듯했다.
보통 영화의 경우 드라마와 달리 필요하다면 계속해서 촬영을 반복하며 신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는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경우 스케줄에 제한이 있기에 한 신에 마냥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지만, 영화의 경우는 필요하다면 며칠을 투자할 것도 각오하고 비교적 넉넉하게 촬영 일정을 잡는 편이니까.
『칠전팔기』의 경우 주요 신을 생각보다 NG가 거의 없이 초반에 몰아서 촬영해 놨기에, 이후 촬영이 상대적으로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후 촬영도 NG가 눈에 띄게 적었다.
오죽하면 최연장자인 박국영은 이게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알 수 없다며 헛웃음을 지을 정도였다.
그 중심에는 단연 안시현이 존재했다.
원톱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일까?
안시현은 시종일관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연기력을 보여 줬다. 저러다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방전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지만…….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른 5월 말까지도 안시현의 연기력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박국영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허허. 우리 막내가 못 보는 사이에 많이 늘었어.”
그는 안시현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꼈다.
『너와 나의 시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안시현의 연기는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 당시에도 연기력은 뛰어났지만,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에 대해서 해결법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후유증이 심한 스타일이 아니라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촬영 중에 몇 번이고 문제가 생겼으리라.
그랬던 안시현이 『빌딩 숲』과 2년간의 군 복무,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전혀 달라졌다.
이제는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을 고민할 필요조차 없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매 순간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일 만큼 발전했다.
게다가 필요하면 신 69와 신 70처럼 다시 메소드를 꺼내 들 수도 있고 말이다.
박국영은 후배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상 깊었던 후배들을 칭찬하며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을 수 있게 도와주곤 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안시현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많이 칭찬했고, 막내아들 취급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배우가 못 본 사이 눈에 띄게 성장했으니 어찌 뿌듯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작 안시현은 박국영의 칭찬에 민망함을 느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걸요.”
겸손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안시현은 아직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 『칠전팔기』 이후 한동안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이대로 연기 생활을 계속하더라도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큰 어려움을 없을 거다.
동년배 중에 안시현과 비슷한 필모그래피를 쌓은 건 김진모 정도다. 그마저도 안시현과 비교하면 살짝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이대로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간다면 국민 배우의 반열에 오르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싶어.’
안시현은 국민 배우에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막 회귀했을 당시라면 모를까, 스스로의 성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지금은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더더욱 노력하고 발전해서 그보다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싶었다.
박국영은 안시현의 그런 마음을 대번에 꿰뚫어 봤다.
“욕심이 있는 건 좋은 거야.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슬럼프가 찾아오면 약도 없는 거 알지?”
“네. 무리하지는 않을게요. 그리고……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집중하려고요.”
무리하게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천천히, 한 단계씩 눈앞에 있는 문제들부터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목표에 다다를 거라 믿었다.
지금의 목표는 『칠전팔기』의 깔끔한 마무리였다.
어느새 마지막 촬영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까.
* * *
5월 27일.
안시현이 박정상으로부터 초대장을 건네받았다.
대한영화제 초대장이었다.
“와. 벌써 일주일밖에 안 남았네요.”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는데 기분이 어때?”
“경쟁이 너무 심해서 별 감흥 없는데요? 아, 아침에 와이프가 물 떠 놓고 빌더라고요.”
“제수 씨 미신 같은 거 안 믿지 않아?”
“이럴 때 기댈 게 미신 말고 뭐가 있겠어요.”
“하긴. 나도 아침에 빌었다. 봉팔이랑 대표님도 빌었다던데? 흐흐흐. 대한영화제 당일까지 여럿이서 다 함께 빌 테니까 제발 효과 좀 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최고죠.”
예상대로 안시현과 최정수는 남우주연상 후보에, 김진모는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거기에 곽상필은 감독상 후보에, 『편지』는 올해의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
최대 4관왕까지 노릴 수 있는 상황.
대한영화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안시현의 반응은 비교적 무덤덤했다.
무덤덤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7일은 대한영화제 초대장을 받은 날이자, 『칠전팔기』의 마지막 촬영이 예정된 날이니까.
오전 8시.
안시현이 일찌감치 촬영이 예정된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신의 촬영을 위해 섭외된 외국인 선수와 미리 와서 몸을 풀고 있는 게 보였다.
“오! 시현!”
“일찍 나왔네요?”
“긴장돼서 일찍 나왔어요. 시현은요?”
“하하하. 저도요.”
외국인 선수는 안시현에게 반갑게 다가왔다.
『편지』를 보고 안시현의 연기에 반하여 『칠전팔기』에 출연을 결심했기에, 촬영 내내 안시현에게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먼저 다가오곤 했다.
물론 촬영 때는 올림픽 금메달을 걸고 맞붙어야 하는 관계이기에, 최선을 다해서 대결하는 것처럼 연기해 줘야 하지만 말이다.
배우가 아닌 선수이기에 난이도 높은 연기가 요구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포커스는 안시현에게 맞춰질 예정이기에 실전에 임한다는 느낌으로 연기해 달라고 거듭 요청한 상태다.
몸을 푼 안시현이 외국인 선수에게 물었다.
“가볍게 합 한 번 맞춰 볼까요?”
“좋아요!”
안시현과 외국인 선수가 몇 차례 합을 맞춰 보았다. 혹여나 촬영 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부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꼼꼼하게 체크를 했다.
이후 안시현이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대본을 집어 들었다. 박정상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안시현의 옆을 지켜 주었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하나둘씩 체육관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누구도 안시현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주연 배우를 방해할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없었다.
오전 10시.
안시현이 벤치에서 일어나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준비됐습니다, 감독님.”
신 115.
안시현은 『칠전팔기』의 대미를 장식할 신의 촬영을 위한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