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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24화 (124/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4화>

124화. 부담 가지지 말고

한판의 달인.

언론들이 정승상에게 붙여 준 별명이다.

부상이 없을 때의 정승상은 그 어떤 상대로도 한판승을 따내며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특히나 지호성으로부터 배운 메치기는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다.

은퇴를 결심했을 때, 후배 선수들을 여럿 상대하며 모두 메치기로 마무리할 정도로 그의 메치기는 대단하다.

오죽하면 정승상을 상대해 본 선수들이, 메치기가 들어올 걸 뻔히 알면서도 당했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정승상의 기량은 엄청나다.

괜히 그가 은퇴를 결정했을 때, 그리고 은퇴를 번복했을 때 기자들이 호들갑을 떤 게 아니다.

33살의 올림픽 금메달 도전.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기술적인 부분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신체 능력에서는 젊은 선수들에 비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기술로 육체적 능력을 극복하는 게 관건이라고 봐야 했다.

정승상처럼 미련을 내려놓지 못하고 도전을 이어 갔던 유도 선수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신체 능력 하락으로 인한 기량 저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 채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오죽하면 일부 언론에서는 정승상이 개인적인 욕심을 위해서 후배들의 앞길을 막는다고, 대승적 차원에서 양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말로 안 되는 헛소리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정승상은 쟁쟁한 후배들을 제치고 유도 남자 81kg 부문 국가대표 자격을 얻고 올림픽에 도전하게 됐으니까.

심지어 어깨 부상을 안고서 얻은 쾌거였다.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며 정승상의 어깨 부상은 악화됐다. 올림픽까지 완벽하게 회복될까 알 수 없는 상태였고, 무엇보다 훈련을 병행해야 하기에 마냥 회복에만 전념할 수도 없었다.

부상을 안고 훈련을 해야 함에도 정승상은 생각 이상으로 무덤덤했다.

“국가대표 선발전 때만큼만 회복될 수 있다면 충분해요. 진통제 맞아 가면서 이 악물고 버티면 돼요. 여기까지 온 이상 포기는 없어요.”

정승상은 훈련과 회복을 병행했다.

훈련의 경우 감각을 유지하는 정도에서 그쳤고, 컨디션을 유지하며 어깨 부상을 회복하는 데에 전념했다.

훈련량이 다소 부족해도 괜찮으니 최대한 어깨를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 덕분에 올림픽을 앞두고 어깨 상태가 많이 호전될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올림픽.

정승상은 부상 투혼을 발휘하며 결승 무대에까지 올라가는 데에 성공한다.

전매특허인 한판승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매 경기 힘든 싸움을 펼쳤지만, 최소 은메달을 확보하며 생애 첫 올림픽 금메달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다만 그럴수록 어깨는 점점 망가졌다.

통증이 심해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했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결승전에 올라온 게 신기할 정도로 몸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그럼에도 정승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의사는 결승전을 포기할 것을 권유했지만, 정승상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할 수 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어떻게 포기하겠어요? 어깨가 망가져서 평생 고생하더라도 괜찮아요. 끝까지 도전할 겁니다.”

지호성 또한 정승상과 같은 생각이었다.

중간에 포기를 했다면 모를까, 결승전까지 올라온 이상 포기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승리를 위한 전략을 짜냈다.

규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진통제를 투여해도 정승상의 통증은 심했다. 오죽하면 결승전을 앞두고 제대로 된 훈련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따라서 지호성이 택한 전략은 하나.

“네가 결승전에서 상대해야 할 선수는 상대의 운영에 발을 맞추는 스타일이야. 한판을 포기한 채 조금씩 득점을 갉아먹으며 상대를 초조하게 만들고, 빈틈을 노리는 게 장기지.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은 하나야. 장기전으로 갈 것처럼 견적을 보다가, 전력을 다해서 파고들어. 명심해. 우리에게 두 번은 없다는 걸.”

유도 81kg 부문 결승전 당일.

정승상이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가 『칠전팔기』의 후반부부터 신 114까지의 내용이다.

신 115는 정승상이 전매특허인 메치기로 한판승을 따내고, 지호성과 함께 여운을 만끽하는 내용이다.

상대 선수와 마주한 정승상의 얼굴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환호하는 관중, 사방에서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들,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상대 선수까지.

일순간.

정승상은 그 모든 게 느려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혀 온 어깨 부상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제대로 써 보자. 평생 아껴 줄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내 말 좀 들어 주라. 제발…….’

정승상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어깨가 버텨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경기에 임했다.

이내 지호성이 말한 대로 경기를 운영해 나갔다.

견제를 하며 득점 싸움으로 몰고 갈 것처럼 행동했다. 상대 선수가 자신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견제와 득점 싸움만을 목적으로 움직였다.

40초가 지났을 즈음.

정승상이 기습적으로 상대 선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자신과 지호성의 전매특허인 메치기를 사용했다.

그대로 승부가 갈렸다.

기술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들어갔다. 국가대표 선수들 간의 경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환상적인 메치기에 관중들과 해설위원들이 일제히 열광했다.

“한판의 달인이 전매특허인 메치기를 작렬했습니다! 정승상 선수가 해냈습니다! 정승상 선수! 그 자리에 엎드린 채 오열하고 있습니다!”

“아아,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살부터 줄곧 올림픽 무대에 도전했지만, 중요한 관문마다 부상으로 인해 좌절해야 했던 선수가 33세에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됩니다!”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선수입니다. 전성기가 지난 시점에서의 올림픽 도전으로 말이 말았지만, 결국 정승상 선수는 실력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심지어 결승전까지 올라오는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전매특허 기술 메치기로 한판을 따냈습니다! 이보다 더 극적일 수가 있을까요?”

승리가 확정됐음에도 정승상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몸을 숙이고 있었다.

아니, 일어날 수 없었다.

승리가 확정된 감정이 복받쳤으니까.

20살 때 겪은 첫 어깨 부상, 그 후로 중요한 고비마다 발목을 잡았던 부상들, 그로 인한 한 차례의 은퇴.

그 모든 걸 겪어 내고 마침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 지금 이 순간, 정승상은 은퇴 번복 이후 묵묵히 참아 왔던 감정을 토해 냈다

지호성이 그런 정승상에게 다가갔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눈시울이 붉어져 있던 지호성은, 메치기가 들어가는 그 순간 눈물을 쏟아 냈다.

“고생했다. 고생했어, 승상아.”

“선배…… 저 해낸 거 맞죠? 저 성공한 거죠?”

“그래, 너 해냈어.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던 금메달 목에 걸게 됐다고, 이 자식아!”

“으아아!”

정승상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간 겪었던 여러 감정들을 괴성과 함께 모두 토해 냈다. 입가에는 미소를 지은 채,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관중들은 그런 정승상에게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올림픽 금메달.

그토록 바라던 것이 마침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걸음마를 내딛을 때부터 시작했던 정승상의 유도 인생이,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됐다.

*   *   *

“OK.”

양상효 감독이 OK 사인을 냈다.

중간에 NG가 한 번 나긴 했지만, 신 115의 촬영은 매우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신 115를 끝으로 『칠전팔기』의 촬영이 모두 종료됐다.

“수고하셨습니다!”

“흐흐흐. 이제 한잔 제대로 꺾어 줘야죠?”

“감독님이 식당 예약해 놓으셨답니다! 노래방 기계도 있다니까 맘껏 먹고 마시고 놉시다!”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와 배우들이 서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몇 시간 뒤에 있을 뒤풀이를 위해 단역을 비롯한 대부분의 배우들이 모인 상황이었다.

안시현은 미리 준비해 온 선물을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건넸다. 정혜영을 통해서 구매한 명품 손목시계였다.

“와…… 이거 완전 비싼 거 아니에요?”

“부담가지지 말고 받아 줘요. 다 함께 고생해서 뭐라도 주고 싶었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손목시계로 준비했어요. 다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당연히 마음에 들죠!”

“잘 쓸게요, 시현 씨.”

“시현 씨에게 받았다고 미니홈피에 자랑해도 돼요?”

“물론이죠. 같이 사진이라도 찍을까요?”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선수을 나눠 주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 안시현은 박정상과 차로 향했다. 회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요량이었다.

안시현이 좌석에 몸을 파묻었다.

“수고했다, 시현아.”

“형도 고생 많으셨어요. 형 덕분에 촬영을 순조롭게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에이. 내가 뭘 했다고. 고생은 네가 했지.”

“아니에요. 제 까다로운 스타일 맞춰 주고 일정 소화하느라 형이 고생했죠. 거기에 진모 스케줄까지 신경 쓰고, 내부 업무도 봐야 했잖아요.”

안시현이 『칠전팔기』의 촬영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건 박정상 덕분이 컸다. 그가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스케줄 관리를 해 줬으니까.

원래는 최봉팔과 나눠서 스케줄을 소화했지만, 『칠전팔기』는 박정상 혼자서 안시현의 스케줄을 케어했다.

첫 원톱 작품이니만큼 안시현의 관리에 만전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김진석 대표의 판단으로 인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적절했다.

안시현은 박정상이 유능한 매니저임을 다시 한번 체감하며 편하게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선물 사는 김에 형 것도 하나 준비했어요.”

안시현이 박정상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동시에 박정상의 두 눈이 커졌다. 당연히 스태프와 배우들과 비슷한 가격대의 손목시계일 거라 예상했건만, 말도 안 되게 비싼 손목시계였다.

“와. 이거 롤렉스 아냐?”

“형 이거 가지고 싶다 했잖아요. 부담 가지지 말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라 생각하고 받아 줘요.”

“……고맙다, 잘 쓰마.”

박정상이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가격과 별개로 자신이 가지고 싶어 했던 걸 기억하고 사준 안시현의 마음이 고마웠다.

동시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얼마 전.

박정상은 김진석 대표로부터 여름 이후 실장으로 승진될 것이라 언질을 받았다.

안시현과 김진모 외에도 임시로 맡는 배우들마다 모두 혁혁한 성과를 냈고, 내부적으로 맡은 업무들 또한 깔끔하게 처리하며 평가가 좋았다.

게다가 그가 선택해서 자체 제작이 결정된 드라마가 최고 시청률 35.5%를 기록하며 대박이 났기에 승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실장 진급과 관련하여 박정상은 김진석 대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시현이와 진모의 스케줄 관리는 계속 제가 관리하고 싶습니다. 지금처럼은 아니겠지만, 최봉팔 팀장이 관리하고 제가 큰 틀을 조율하고 싶습니다.”

“첫 담당 배우들이라서 정이 많이 가나 보네?”

“그런 것도 있고…… 개인적인 욕심이기도 합니다. 시현이랑 진모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제가 직접 관리하며 옆에서 지켜보고 싶거든요.”

“업무에 지장가지 않는 선에서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리고 원하는 차 한 대 골라서 말해 줘. 자네가 선택한 드라마가 최고 시청률 35%를 기록했으니, 그에 따른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실장 직함 달려면 그에 어울리는 차가 필요하기도 하고.”

“조만간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장 업무를 소화하면서 안시현과 김진모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 체력적인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박정상은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확신했다. 앞으로도 그 판단이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믿었다.

매사에 열정적이고 배우로서 꾸준히 성장하며, 주위 사람들을 끔찍이도 챙기는 불알친구 녀석들과 어떻게 떨어질 수 있겠는가.

‘이대로 승진하면 결국 그 끝은 사장이겠지? 그때가 되면 내가 직접 스케줄을 관리할 수 없겠지만, 그 전까지라도 최대한 오래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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