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7화>
127화. 제가, 내년에
결혼 전.
안시현은 정혜영과 2세 계획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결론이 나왔다.
정혜영이 2세를 원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피임을 하자, 그리고 정혜영이 원할 때 2세 계획을 세워 보자.
『칠전팔기』의 촬영에 들어가기 전.
정혜영은 안시현에게 슬쩍 속마음을 내비쳤다.
“자기, 이번 작품 끝나고 나면 아이 가지는 게 어때요? 저도 그때쯤이면 대표 이사 자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거고, 임신과 육아로 업무에 지장 가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이에 안시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2세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정혜영의 뜻을 따르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먹었기에 고민할 여지는 없었다.
‘더 이상 쇼윈도 부부라는 헛소리는 안 들리겠지.’
안시현과 정혜영의 결혼 후, 상당수의 톱스타들이 그러하듯 온갖 루머가 뒤따랐다.
그중 하나가 바로 쇼윈도 부부라는 거였다.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결혼한 거고, 외적으로 보여 주는 것과 달리 실제 부부 관계는 남남만도 못하다나 뭐라나.
물론 요즘은 거의 들리지 않는 헛소리다.
안시현이 루머에 대해 선처와 합의 없는 강력 대응을 시사했고, 실제로 몇몇 이들이 법적 처벌을 받게 되자 루머가 쏙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실 안시현은 자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심각한 명예훼손만 아니라면 대부분 웃어넘겼다.
하지만 가족을 건드는 건 참지 못했다.
자신이 아닌 가족에게 화살을 돌리는 건, 그 어떤 변명을 대더라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물론 법적 대응을 하더라도 루머가 완전히 뿌리 뽑힐 수는 없었지만…….
아이를 가지게 되면 조금이라도 더 루머가 가라앉지 않을까 싶었다.
“2세라…… 좋지. 그럼 내년에는 아빠 되는 건가?”
“내년일지 아닐지는 해 봐야 아는 거죠.”
“짜식. 그래서 아예 차기작 검토할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던 거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긴 한데…… 이유 중 하나죠. 일단 올해는 정말 작품 생각하지 않고 푹 쉬려고요.”
“그래. 쉴 때 확실하게 쉬고, 작품 들어가면 최선을 다해 연기해. 아무도 너한테 다작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니까 마음 편하게 먹고.”
“네. 그러려고요.”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김진석 대표에게 말한 것과 달리, 휴식기가 생각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첨언하지는 않았다.
‘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언제 백수였냐는 듯 복귀하고 싶어서 안달나지 않겠어?’
* * *
『칠전팔기』의 최종 편집본은 안시현을 비롯한 출연 배우들을 만족시켰다.
‘완벽한데?’
최종 편집본은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나 안시현은 『칠전팔기』가 완벽하게 완성된 걸 보고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
제작되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작품이 완성됐다. 그것도 자신이 원톱을 맡아서 완벽하게 정승상을 일대를 연기로서 표현해 냈다.
감동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칠전팔기』가 완성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건, 곽상필과 최창국 덕분이었다.
촬영이 마무리 된 직후.
양상효 감독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자신의 역량으로는 『칠전팔기』를 완벽하게 편집할 수 없다고, 곽상필과 최창국의 도움을 받아야 배우들의 연기를 120% 살릴 수 있다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양상효 감독의 판단이 『칠전팔기』를 살렸다.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수려한 연출력으로 작품의 완성도가 한층 상승했으니까.
최종본을 감상한 직후.
안시현이 솟구쳐 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대표님, 『칠전팔기』 손익 분기점 얼마예요?”
“홍보비 포함 250만. 어때, 넘을 거 같아?”
“감히 추측하자면…… 무조건 넘을 것 같아요.”
『칠전팔기』는 안시현에게 있어 하나의 도전이었다.
따라서 흥행 여부는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출연을 결정했다.
자신이 정승상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기만 한다면 손익 분기점은 넘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하지만 최종본을 확인하자 그 생각이 달라졌다.
손익 분기점은 무조건 넘는다, 나아가서 대한민국 스포츠 영화 사상 최다 관객까지 노려 볼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한계는 있을 거다.
스포츠 영화라는 장르의 특성상, 기본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고 기존에 나왔던 스포츠 영화들과 궤를 같이하냐고 묻는다면, 애매하단 말이지.’
그럼에도 안시현은 흥행 여부를 긍정적으로 내다봤다.
흠잡을 데가 없는 최종 편집본을 보면, 관객들이 『칠전팔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 * *
10월 초.
『칠전팔기』의 언론 시사회가 잡혔다.
양평과 서울을 오가며 휴식기를 만끽하고 있던 안시현은, 정혜영이 골라 준 정장을 입은 채 시사회에 참여하기 전 미용실에 들렀다.
시사회에 초청된 김진모는, 안시현과 함께 나란히 앉아 메이크업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시현이 평소와 달리 너무 들떠 있었으니까.
“무슨 좋은 일 있냐? 왜 이렇게 들떴어?”
“좋은 일? 있지.”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런 게 있어. 아직은 비밀이야.”
전날.
생에 가장 기쁜 소식을 들은 안시현은, 부모님과 정일룡 회장에게만 슬쩍 그 소식을 공유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정혜영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왕 알려질 거면 기자 간담회 때 말해요. 기분 좋은 티 팍팍 내서 질문 유도하는 것도 잊지 말고요.”
안시현은 정혜영이 조언한 대로 기자 간담회에서 좋은 소식을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억지로 질문을 유도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기분 좋은 척을 하려고 할 필요조차 없이, 자신도 모르게 계속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기분이 좋아서 감정을 컨트롤하기 힘들었으니까.
김진모는 안시현의 좋은 소식에 대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그러려니 했다.
‘보나마나 그거겠지 뭐. 짜식, 살아 있네.’
웬만큼 좋은 일에도 씨익 한 번 웃고 마는 안시현이, 절제가 안 될 정도로 웃을 만한 일은 아무리 생각하도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칠전팔기』의 기자 간담회.
“안시현 배우님께 묻겠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데, 첫 원톱 작품이라서 그런 건가요?”
기분이 좋은 게 티가 나다 보니, 결국 한 기자가 안시현에게 대놓고 기분이 좋은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에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칠전팔기』의 흥행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제가 웃고 있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 있어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다 보니 그렇습니다.”
“좋은 일이요?”
“네.”
안시현의 입꼬리가 다시 한번 올라갔다.
미소를 지은 채 기자들을 둘러보며 잠시 뜸을 들인 뒤, 자신과 정혜영에게 생긴 좋은 소식을 이야기했다.
“제가, 내년에 아빠가 됩니다.”
* * *
언론 시사회 하루 전날.
정혜영을 위해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서 일룡백화점 본사를 방문했던 안시현은, 정혜영이 부재 중이자 대표 이사실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약 30분 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즈음에 돌아온 정혜영을 본 안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 상태였으니까.
“무슨 일 있었어요? 눈이 왜 그래요?”
“……두 줄이에요.”
“두 줄? 두 줄이요? 설마…….”
“테스트기요.”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동시에 그의 눈시울 또한 정혜영과 마찬가지로 붉어졌다.
그토록 바라던 소중한 생명이 생각보다 빨리 두 사람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안시현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이미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정혜영을 가볍게 안으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우리,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요?”
“노력해야죠. 좋은 배우와 좋은 대표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만큼,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어요?”
“맞아요. 노력해야죠. 아버님과 어머님께 연락드려야겠죠?”
“네. 그리고 회장님께도요. 부모님께는 전화 드리고, 회장님은 저녁에 뵙고 말씀드리죠.”
“그렇게 해요.”
안시현의 부모님과 정일룡 회장은 정혜영의 임신 소식을 듣고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심지어 안시현의 어머니는 벌써부터 출산 이후의 일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애 낳으면 어떻게 키울 거냐?
“제가 쉴 때는 제가, 제가 안 쉴 때는 와이프가 보게 될 거 같아요.”
-둘이서 감당 가능하겠어? 둘 다 바쁘잖아.
“그래서 좀 고민이긴 한데…… 일단 제가 내년에도 쉴 거라서 괜찮을 거 같아요. 그 이후가 문제이긴 한데, 지금 당장은 고민 안 하려고요.
-너희만 불편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올라가서 봐줄 수도 있다만…….
순간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어머니가 직접 올라와서 아이를 봐준다는 건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던 선택지였으니까.
“저희 때문에 무리하지 마요, 엄마.”
-무리는 무슨. 배우가 연기 안 하고, 백화점 대표가 업무 안 보는 게 무리하는 거지. 안 그래도 네 아빠가 슬슬 목장 정리하자고 난리인데, 이참에 정리하고 서울이나 올라가지 뭐.
안시현의 어머니는 화끈하게 결단을 내렸다. 너무 화끈해서 대화를 나누는 안시현이 당황할 정도였다.
“어, 엄마. 너무 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천천히…….”
-여보! 박 씨네 사촌이 목장 인수하고 싶다고 전에 이야기했다고 했지?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해!
-목장 정리하자고? 진짜로?
-혜영이 임신했는데 당연히 정리해야지!
-임신? 그럼 정리하고 서울 올라가야지! 애들 육아 때문에 일 못 하면 안 되잖아!
그럼에도 어머니의 결정에는 막힘이 없었다.
아예 아버지에게까지 이야기해서 목장을 언제 어떻게 팔 것인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애초에 나이가 들면서 목장 일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기도 했거니와, 안시현이 꾸준히 서울로 올라오라고 권유했기에 고민하던 차였다.
때마침 정혜영의 임신 소식이 들려오니 고민의 여지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안시현과 정혜영은 육아와 관련해서 부모님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기로 결론을 내렸다.
‘살 집 구해 드려야겠네.’
이후 안시현의 입꼬리는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귀에 걸려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전에 산부인과에 데려다준 정혜영과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
하필이면 언론 시사회가 다음 날이라는 게 잠시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막상 기자들의 앞에 서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당당하게 새 생명이 태어나게 될 것임을 알리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싶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임신 소식에 놀라워하긴 했고, 안시현과 친분이 있는 일부 기자들은 직접적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아마 반 정도는 정혜영의 임신과 연관이 될 테지만…….
‘잘된 일이지. 덕분에 기사 수가 늘어날 테니까.’
덕분에 『칠전팔기』의 기사 수가 대폭 많아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제로 김진석 대표와 양상효 감독은, 언론 시사회 직전에 안시현에게서 정혜영의 임신 소식을 듣고서 기자 회견 때 말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덕분에 기사 많이 나고 좋겠네요.”
영화의 흥행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기사의 수가 늘어나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다소 어수선하긴 했지만, 다행히 기자 간담회는 큰 무리 없이 순조롭게 끝이 났다.
기자 간담회가 종료된 직후.
“아빠 되는 거 축하한다.”
“신혼 더 즐기다 가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가졌네. 내년에는 지옥문이 열릴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후…… 기어 다닐 때가 행복하다고 생각해라.”
“육아하다가 이해 안 되는 거 있으면 말해. 와이프 출산하고 세 달 만에 작품 들어가고, 내가 집에서 1년 동안 애 봐서 육아는 마스터했다 이거야.”
안시현은 『칠전팔기』에 함께 출연한 배우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동안이나 축하를 받았다.
그로부터 30분 뒤.
『칠전팔기』의 언론 시사회가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