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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29화 (12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29화>

129화. 뭔데 이렇게

개봉 첫날.

『칠전팔기』는 도합 35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당히 예매율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개봉 둘째 날 아침.

개봉 첫날에 무대 인사를 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늦잠을 자고 일어났던 안시현은, 박정상으로부터 관객 수를 전해 듣고서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했다.

김진석 대표는 그런 안시현의 어깨를 몇 차례 가볍게 툭툭 두들겼다.

“고생했다. 이번 작품도 잘될 것 같은데?”

“주말에 개봉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35만이면 기대 이상의 오프닝 스코어죠?”

“기대 이상이고말고. 오프닝 스코어만 보면 1000만 관객 돌파도 가능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야.”

“1000만은 기대도 안 하고, 이 분위기면 손익 분기점은 확실히 넘을 것 같아서 만족하려고요.”

분위기만 보면 1000만 관객 돌파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안시현은 1000만 관객이 어려울 거라고 사실상 확신하고 있었다.

『칠전팔기』가 곽상필과 최창국의 도움 아래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정승상이라는 캐릭터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스토리 구성을 지니고 있다.

조연 배우들이 연기를 못한 건 아니지만, 지호성 정도를 제외하면 정승상을 빛나게 해 주는 역할이지 스스로 빛이 나지는 못했다.

애초에 구조적 결함을 지닌 영화인 것이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중에 대놓고 구조적 결함이 드러나는 영화나, 원톱 배우에게 많은 걸 의존하는 영화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칠전팔기』가 흥행을 하지 못할 영화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흥행하지 못할 영화라면 개봉 첫날부터 35만 관객을 불러모으지도 못했을 거다.

1000만 관객이라는 고지를 넘기에 다소 아쉬움이 남을 뿐이지, 충분히 잘 만든 영화다.

‘시작이 너무 좋아. 500만 정도는 거뜬하게 넘지 않으려나? 합동 팬 미팅 준비해야겠네.’

오프닝 스코어를 듣자마자 안시현은 직감했다.

자신이 약속했던 공약을 이행하게 될 것임을 말이다.

*   *   *

2006년은 흥행작이 많은 해였다.

당장 『칠전팔기』와 박스오피스 1위 싸움을 하고 있는 영화만 하더라도 1000만 관객을 돌파할 거고, 『칠전팔기』보다 약 보름 전에 개봉한 영화의 경우 도박을 소재로 했고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음에도 700만 관객을 돌파할 예정이다.

거기에 『칠전팔기』가 가세하게 된 것이다.

크게 흥행하는 두 영화와 상영 시기가 겹치자 아무래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칠전팔기』는 순항했다.

개봉 열흘째.

2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안시현과 양상효 감독, 그리고 몇몇 배우들의 목표였던 1000만 관객 돌파가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 줬다.

‘장르가 다르니 관객을 뺏길 우려는 없다고 봐야 해.’

『칠전팔기』와 경쟁하고 있는 두 영화는 각각 재난에 맞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 스릴러, 도박이라는 소재 하나에 얽히고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맛깔 나는 연기력으로 풀어 나가는 영화다.

한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보여 주는 『칠전팔기』와는 장르 자체가 다르다.

따라서 두 영화에 관객을 뺏길 우려는 없었다.

오히려 두 영화보다 늦게 개봉했기에, 해당 영화를 이미 본 관객들을 역으로 흡수하는 것 또한 가능했다.

흘러가는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때, 500만 관객은 사실상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개봉 21일 차.

400만 관객을 돌파하자마자 안시현은 차기작 촬영을 끝마친 김진모와 JM액터스 연습실에서 만났다.

“짜식. 축하한다. 『칠전팔기』 곧 500만 넘겠던데?”

“개봉 한 달 전부로는 넘지 않을까 싶네. 최종 스코어는 700만 전후로 예상되는 중이고.”

“나도 그렇게만 나왔으면 좋겠다. 우린 소재가 소재라서 흥행 쪽으로는 좀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후회는 없다. 시나리오는 보자마자 이 작품은 무조건 하고 싶다는 느낌이 확 들었거든.”

“그럼 됐네. 후회 안 하면 되는 거지.”

“흐흐흐. 맞아. 그런 거지.”

근황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뒤,  안시현과 김진모는 합동 팬 미팅에서 무엇을 할지를 놓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30분을 넘게 이야기를 했음에도 좀처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없는 사람 둘이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있으니 답이 나올 리가 있나.”

“그러게. 우리 둘만으로는 안 되겠다.”

두 사람 다 연기밖에 모르고 산다. 특히나 김진모 같은 경우는 대부분의 일을 연기와 관련되어 생각할 정도로 연기에 미쳐 사는 스타일이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합동 팬 미팅에서 할 만한 일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평범한 팬 미팅이라면 정석적으로 진행했을 거다.

하지만 이건 『칠전팔기』의 500만 관객 돌파 공약으로 내세운 팬 미팅이고, 심지어 무려 5천 명의 팬을 초청할 예정이기까지 하다.

최대한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해서 팬들과 만나고 싶은데, 아이디어가 영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했다.

결국…….

“정상 형 부를까?”

“그게 좋을 거 같아.”

두 사람은 박정상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때마침 외부 미팅을 나갔다가 돌아온 박정상은, 연습실에서 울상이 되어 있는 두 톱배우의 모습을 보고서 피식 웃었다.

“톱배우 둘이 팬 미팅에 무슨 이벤트를 할까 못 정해서 나를 불러?”

“저흰 아이디어가 너무 없어요. 재미없게 사는 사람들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형이 좀 도와줘요. 저희 정말 팬 미팅 각 잡고 제대로 해 보고 싶거든요.”

“오냐. 10분 후에 회의실로 와.”

10분 후.

회의실을 문을 열자마자, 안시현과 김진모의 눈에는 스크린에 띄워진 프리젠테이션 자료가 보였다.

그랬다.

박정상은 안시현과 김진모가 팬 미팅에서 할 이벤트를 결정하지 못할 걸 알고서, 미리 자료를 준비해 온 것이었다.

“와…… 이걸 프리젠테이션 자료까지 준비해 왔어요? 저희가 이벤트를 못 정할 걸 알고?”

“내가 너희를 몇 년 봤는데 그거 하나 모르겠냐.”

“형, 오늘따라 겁나 멋있어요.”

“실장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 이후로는 속전속결이었다.

박정상은 참으로 다양한 이벤트 아이디어를 짜 왔고, 안시현과 김진모는 그중 자신들이 할 수 있을 만한 걸 몇 가지 추렸다.

일부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괜찮았다.

무려 5천 명의 팬과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안시현과 김진모가 팬 미팅 준비에 들어갔다.

*   *   *

한편.

안시현과 김진모의 팬들은 매일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칠전팔기』의 관객 수를 체크했다.

21일 차에 400만 관객을 돌파했으니, 급격한 하락세를 겪는 게 아니라면 500만 관객 돌파는 기정사실로 보였지만…….

500만 관객 돌파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게 사실이었다.

안시현과 김진모는 팬 미팅을 자주 하는 편에 속하지만, 이번에는 무려 두 사람이 함께하는 합동 팬 미팅에 규모도 5000명이나 된다.

두 배우 팬들로서는 제발 500만 관객을 돌파하여 이번 합동 팬 미팅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에 팬들은 500만 관객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수를 강구했다.

사비를 털어 『칠전팔기』를 광고하고, 미니홈피나 블로그 등을 통해서 긍정적인 리뷰를 남길 뿐만 아니라 영화를 두 번 이상씩도 관람했다.

개봉 33일 차.

마침내 『칠전팔기』가 공식적으로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목표를 달성했다.

다음 날.

JM액터스 홈페이지의 메인이 안시현과 김진모의 팬 미팅과 관련된 정보로 가득 찼다.

이왕 5천 명을 부르는 거, 김진석 대표는 아예 작정하고 판을 벌이는 게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 팍팍 지원해 줄 테니까.”

덕분에 공지사항에는 팬 미팅에 참여하는 팬들을 위해 준비될 온갖 선물 리스트가 잔뜩 적혀 있었고, 일부 팬들은 이게 팬 미팅인지 경품 추첨인지 알 수 없다며 혼란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리고 안시현은 팬 카페에 올라오는 글들을 모니터링하며 팬들의 반응을 즐겼다.

‘혜자 팬 미팅의 끝판왕을 보여 주지.’

안시현은 평소 팬들이 자신을 얼마나 응원해 주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팬 미팅은 무료로 진행해 왔다. 그 나름대로 팬들에게 사랑을 보답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이번 팬 미팅의 경우 JM액터스에서 상당 부분 지원을 해 주기로 했지만, 규모가 너무 크다 보니 사비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그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고, 오히려 팬 미팅 준비 과정을 즐겼다.

『칠전팔기』는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스포츠 영화 사상 최다 관객 기록을 실시간으로 갱신하고 있으며, 그 덕에 팬들과 만나는 뜻깊은 자리를 가지게 됐다.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우리 이따가 쇼핑하러 갈래요?”

“그래요. 배 나올 거 대비해서 옷도 새로 사야 할 거 같고, 먹고 싶은 것도 있고요.”

“흐음. 아직 티는 전혀 안 나는데요? 임산부인 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아직은 펑퍼짐한 옷이면 가려질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하기도 해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임산부인 걸 모르니까요.”

“그래서 경호원 뽑았잖아요.”

옆에는 임신을 한 정혜영까지 있다.

정혜영은 당초 임신을 한 이후 한동안 전문 CEO에게 백화점 운영을 맡기고 보고를 받으며 주요 사안만을 결정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임신을 하고 조금 쉬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미치겠다나 뭐라나.

결국 그녀는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 걸로 태교를 대신하게 됐지만, 안시현은 그런 정혜영의 선택을 존중했다.

억지로 하는 태교보다는 산모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출산까지는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다.

안시현은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웠다.

정혜영이 먹고 싶다고 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와 함께 산부인과를 가고, 초음파 사진을 아예 벽에 걸어 놓고서 보는 게 하루의 낙이 되어 버렸다.

오죽하면 이러다가 한동안 연기를 놓아 버릴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합동 팬 미팅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어쩌면 오랜 휴식기를 가지기 전 팬들과 가지는 마지막 자리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보여 주자고. 오랜 공백기에도 팬들에게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야.’

10월 29일.

『칠전팔기』는 71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스포츠 영화 사상 최다 관객 동원이라는 유의미한 기록을 남기고서 상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5천 명을 수용 가능한 공연장을 빌려 안시현과 김진모의 합동 팬 미팅이 진행됐다.

팬 미팅 몇 시간 전.

박정상과 최봉팔은 미리 공연장을 방문하며 팬 미팅에 차질이 없는지를 점검했다.

이후 최봉팔을 대기실로 향했고, 박정상은 안전요원들과 함께 팬들을 하나둘씩 입장시키기 시작했다.

‘별 소란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박정상은 혹여나 팬 미팅 중에 소란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안시현과 김진모의 단독 팬 미팅이 아닌, 두 팬덤을 동시에 포용해야 하는 합동 팬 미팅이다. 잘못하면 팬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실제로 몇몇 가수들의 경우 합동 팬 미팅을 했다가 팬덤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며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야기하기도 했다.

배우와 가수는 입장이 다르기는 하지만, 소란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

이에 박정상은 예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팬들의 입장을 도왔다. 여차하면 안전요원들을 통해 소란을 진화할 준비를 하고서 말이다.

5천 명의 관객이 입장한 뒤.

박정상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니…… 뭔데 이렇게 사이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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