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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30화 (13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0화>

130화. 저만 믿어요

안시현과 김진모는 사적으로는 절친이지만, 배우로서 보면 라이벌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인터뷰를 통해 서로가 라이벌임을 공개적으로 수차례 밝혀왔다.

그럼에도 안시현의 팬클럽과 김진모의 팬클럽은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접점 자체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배우 팬덤끼리 굳이 충돌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안시현과 김진모가 함께 주연을 맡은『빌딩 숲』과 『편지』를 기점으로 두 팬덤 사이에 연달아 접점이 발생하게 됐다.

데뷔작인 『나는 간첩입니다』 때야 두 사람 다 신인이었지만, 『빌딩 숲』과 『편지』에서는 당당히 주연으로 캐스팅이 됐다.

두 팬덤 사이에 배우들의 라이벌 의식으로 인한 기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김진모의 팬덤인 페르소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빌딩 숲』을 촬영할 당시에 공동으로 밥차, 도시락, 커피, 간식 등을 준비해서 촬영장에 조공하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이에 안시현의 팬덤인 팔색조가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처음으로 함께 활동을 하게 됐다.

이후 『편지』에서는 아예 작정하고서 함께 조공을 하며 두 팬덤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오죽하면 일부 팬들 사이에서는 이러다가 팬클럽을 합치는 게 아니냐고 하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말이다.

두 팬덤이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건 박정상 또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공동 팬 미팅임에도 조금의 잡음도 없이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뭐…… 친해서 나쁠 건 없겠지.’

박정상은 두 팬덤의 훈훈한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팬 미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팬 미팅은, 무려 12개 순서로 꽉꽉 채워서 5시간이나 진행됐다.

공연장에는 줄곧 함성이 가득했다.

흡사 팬 미팅이 아니라 공연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퀄리티로, 안시현과 김진모가 작정하고 준비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팬 미팅이 끝난 뒤.

안시현과 김진모가 대기실에 널브러졌다.

분장을 지울 힘도, 의상을 갈아입을 힘도 없었다. 무대 위에서 모든 걸 쏟아 낸다는 각오로 팬 미팅을 진행했기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 이대로 잠들고 싶다.”

“이하 동문. 진짜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다. 마지막에 춤출 때는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더라.”

“우리 사인까지 제대로 하고 들어온 거 맞지?”

“어. 다행히 마무리는 잘한 것 같아.”

피식 웃으며 안시현이 눈을 감았다.

스마트폰이 있었으면 드러누운 채 팬클럽 카페에 접속해 후기를 감상할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을 느끼는 가운데, 박정상이 문을 열고 대기실에 들어왔다.

“선물은 연습실로 보내면 되겠지? 용달차 한 대 빌렸는데.”

“선물 때문에 용달차를 빌렸어요?”

“팬들이 준비해 온 선물로 이 대기실 꽉 채울 수 있을걸? 너무 많아서 새는 것도 포기했어.”

팬 미팅에 참여한 팬들 중 대다수가 안시현과 김진모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 왔다. 심지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한 팬들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받은 선물이 너무 많았다.

뒷정리가 한창인 무대 위에 팬들로부터 받은 선물이 한 가득 쌓여 있을 정도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일일이 들고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선물을 많이 받을 걸 일찌감치 예상하고서 미리 용달차를 불러 놓은 박정상 덕분에, 비교적 어렵지 않게 선물을 옮길 수 있게 됐다.

“연습실로 옮겨 놓고 정리하죠. 부탁 좀 할게요, 형.”

“오냐. 홍보팀이랑 같이 나눠 놓을 테니까 알아서들 챙겨 가. 필요하면 택배로 보내 줄 수도 있고.”

“전 택배요. 별장으로 보내 주세요.”

“알았다. 뒷정리 끝날 때까지 쉬고 있어.”

박정상이 나간 뒤.

안시현이 정혜영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늦은 새벽까지 연습한다고 잠을 거의 못 잤고, 거기에 사인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팬 미팅 내내 앉아 있지를 않았다 보니 피로감이 엄청났다.

그럼에도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잘 끝나서 다행이야.’

아직 팬들의 후기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안시현은 합동 팬 미팅이 성공적이라고 확신했다.

팬 미팅 내내 팬들은 안시현과 김진모에게 환호성을 보내 줬고, 두 사람은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 준비해 온 모든 걸 전력을 다해 보여 줬으니까.

그것이면 충분했다.

‘이제 좀,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어.’

2006년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 끝났다.

심지어는 광고와 화보 촬영을 포함한 외부 일정까지도 모두 마무리됐다. 2007년 상반기까지는 대한영화제에 참석하는 걸 제외하곤 스케줄을 아예 잡아 놓지 않았다.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앞으로의 배우 생활을 위해, 안시현이 본격적으로 한동안 연기와 멀어지기로 작심했다.

*   *   *

12월의 마지막 주.

안시현의 부모님이 예정대로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서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안시현의 부모님에게 집을 선물했다.

부모님이 살 집은 자신과 정혜영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위치한 신축 아파트였고, 10월부터 입주가 시작된 상태였다.

“전망 좋네. 한강이 제대로 보이는데?”

“한강이랑 가까워서 마실 나가기에도 좋을 거예요.”

“집도 넓고 위치도 딱 좋은 것 같아. 우리 아들이 제대로 골랐는데? 복실이 데리고 올라와야 하는데, 이 정도면 아무 걱정 없겠어.”

“복실이? 복실이가 누구예요?”

“최 씨네 진돗개가 나은 새끼. 몇 번 놀러 갔는데 내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해서 데려왔지. 애가 아주 애교도 많고, 말도 잘 알아들어. TV에 나오는 천재견? 뭐 그런 거 같아.”

정든 이웃과 떨어져 지내시려면 적적하실 듯하여 걱정이 많았는데, 반려견을 키운다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반려견 훈련사 한 분 소개시켜 드릴까요?”

“훈련도 받아야 하냐?”

“실내에서 키울 거면 배변 훈련이나 짖음 방지 훈련도 해야 하고,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많아요. 전에 제 팬이라고 해서 알게 된 분이 있거든요.”

“그래? 우리 아들이 추천하는데 만나 봐야지.”

안시현은 혹시 몰라서 반려견 훈련사를 소개시켜 줬고, 그 이상으로는 참견하지 않았다.

‘알아서 잘들 하시겠지.’

그로부터 일주일 후.

고향집의 판매까지 끝마친 아버지가 새하얀 진돗개 새끼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애교 넘치는 행동이 인상적인 강아지였다.

훈련사까지 소개시켜 준 뒤, 안시현은 반려견 훈련에 푹 빠진 부모님에게 인사를 건넨 뒤 서울을 떠나 다시 양평으로 향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둘이서 오붓하게 보내야지. 어제 펑펑 울어서 달래 주고 싶기도 하고.’

슬슬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한 정혜영은, 최근 들어 호르몬의 영향 때문인지 감정 기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화내다가, 울다가, 웃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정이 시시각각 변해서 안시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정혜영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감정 기복 때문에 미안해하는 정혜영을 볼 때마다, 오히려 가볍게 안아 주며 사랑한다고 말해 줬다.

‘퇴근하기 전에 음식 좀 만들어 줘야겠어. 어제 갈비찜 먹고 싶다고 했었지?’

정혜영이 임신한 이후.

안시현은 휴식기에 한식 자격증을 따놨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나도 기특했다. 임신한 아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해 주면서 엄청난 기쁨을 느꼈다.

한동안 연기를 떠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것이었다.

‘우리 복덩이 만나려면 4달 남았네.’

안시현은 하루빨리 아빠가 되는 날이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원톱을 맡은 『칠전팔기』의 700만 관객 돌파, 정혜영의 임신 등.

굵직굵직한 일들이 제법 있었던 2006년이 지나고 2007년이 찾아왔다.

안시현은 부모님을 뵈러 갈 때와 장을 보러 읍내에 나갈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별장에서 보냈다.

어떻게 하면 정혜영을 조금 더 편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정혜영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 무엇일까, 오늘은 어떤 마사지를 해 줄까 등.

점점 만삭에 가까워지는 정혜영을 케어하는 게 안시현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 과정에서 안시현은 자연스럽게 연기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됐다.

좋아하던 영화도 잘 안 보게 됐고, 임신과 육아와 관련된 서적들만을 보게 됐으니 당연했다.

안시현은 그 시간들에 만족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아내를 내조하는 일이고, 곧 세상에 나올 아이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인데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가끔 얼굴 보기 힘들다며 서운함을 토로하는 배우들의 연락이 오기도 했지만, 안시현은 당분간 보기 힘들 거라는 말로 단호하게 일축했다.

‘괜히 얼굴 보면 연기 생각나니까 안 돼.’

안시현 자신을 위해서도, 정혜영과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연기와 거리를 둬야만 했다.

그래서 가끔 별장에 놀러 오는 김진모 정도를 제외하면 얼굴을 보지 않았다. 최정수를 비롯해 친분이 두터운 배우들과도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는 게 전부일 정도로 철저하게 외부와 접촉하지 않고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월 말이 됐다.

출산 예정일을 두 달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정혜영이 육아휴직을 하게 된 날.

정일룡 회장이 별장을 찾아왔다.

“이보게, 손주사위. 문 좀 열어 주게.”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안시현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허겁지겁 현관 앞으로 튀어나왔다.

앞치마를 걸치고 식칼을 든 채로 말이다.

“연락 주셨으면 제가 직접 갔을 텐데…….”

“허허허. 괜찮네, 괜찮아. 임산부한테 좋다는 거랑 아기 옷이랑 이것저것 사 왔네. 임산부도 어느 정도는 운동을 하는 게 좋다고 하니까, 자네가 옆에서 잘 챙겨 주게.”

“가벼운 산책 정도는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자네야 뭐든지 똑 부러지게 잘하니까. 아, 그리고…… 이것도 받게.”

정일룡 회장이 안시현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에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작명소에 맡길까 하다가 내가 직접 주어 주고 싶어서 고민했는데, 순우리말도 괜찮을 거 같아서 말이야. 아, 자네랑 혜영이가 혹시 생각해 둔 이름이 있다면 벽난로에 태워 버리게. 혹시나 해서 준비한 거니까.”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놓은 이름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정일룡 회장이 심사숙고 끝에 적어 온 이름이 어감과 뜻 모두 더 마음에 들었다.

“아닙니다. 안 그래도 계속 고민하고 있던 차인데 마음에 쏙 듭니다.”

“허허허. 사실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혜영이가 내게 가장 먼저 증손주를 안겨 준다는 게 중요하지.”

“저녁 식사 함께하시겠습니까?”

“아닐세. 저녁에 선약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거 같아. 혜영이한테 안부나 전해 주게나.”

정일룡 회장이 떠나고 약 1시간 뒤, 공식적으로 육아휴직을 하고 온 정혜영이 운전기사와 함께 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타고 운전기사가 떠난 뒤, 안시현이 정혜영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서 집 주위를 산책하며 1시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전해 줬다.

“……할아버지가요?”

“네. 저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요. 게다가 말씀도 안 드렸는데 딸이라는 걸 아셨나 봐요. 옷도 딸에 어울리게 준비해 주셨어요.”

“자기가 마음에 들었다니 기대되네요. 어떤 이름인지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줘요.”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일룡 회장이 가지고 온 종이를 보여 줬다.

안시현과 달리 정혜영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자신들이 생각했던 이름과 정일룡 회장이 지어 준 이름 중에 저울질을 하다가, 별장 안으로 들어가 벽난로 앞에 서서 몸을 녹인 이후에야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이 더 좋은 거 같아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 거 같았어요.”

“이름의 뜻 그대로…… 우리 아이가 평생을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저희가 좋은 부모가 되어야겠죠?”

“같이 노력해요. 저 요즘 육아 서적 엄청 보고 동영상도 잔뜩 찾아봤어요. 이론은 마스터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저만 믿어요.”

그렇게 안시현과 정혜영의 딸 이름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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