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1화>
131화. 줄 거 있으니까
5월 말.
김진모가 간만에 대학로를 방문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안주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요? 아, 얼마 전에 머리 식히러 경주 놀러 간 김에 경주교동법주 몇 병 사 왔으니까 나눠 마셔요.”
“크으. 역시 우리 생각하는 건 진모밖에 없다니까. 자자, 이럴 게 아니라 판 한번 제대로 벌려 봅시다!”
양손 무겁게 극단 광대들을 방문한 그는 단원들에게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한가득 선물한 뒤, 밖으로 나와 최정수와 대화를 나눴다.
김진모는 최정수에게 초대장을 건넸다.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의 시사회 초대장이었다.
최정수가 습관적으로 담배를 입에 물며 물었다.
“6월 중순이라고?”
“네. 대한영화제 끝나고 바로 다음 주예요.”
“스케줄 붙어 있어서 좋네. 네가 부르는데 당연히 가야지. 5.18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차용한 영화라 기대되기도 하고.”
“흐흐. 실망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영혼을 바친 제 연기,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제 짬 좀 찼다고 자신감 넘치는 거 봐라.”
“선배님, 전 데뷔 전에도 자신감 빼면 시체였는데요.”
“에잉, 싸가지 없는 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사회 초대장을 손에 쥔 최정수의 입에서는 좀처럼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안시현이나 김진모나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갓 데뷔한 신인 티가 났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정신을 차려 보니 20대에 이룰 수 있는 건 거의 다 이뤘다.
특히나 『편지』를 기점으로 두 사람은 자신의 영역을 어느 정도 구축하는 데에 성공했다.
어떤 배역이든 시나리오대로 완벽하게 구축해서 연기하는 안시현, 어떤 배역이든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김진모.
서로 상반되는 스타일의 두 배우를 지켜보는 건 최정수에게 즐거움을 줬다.
“드라마 7월부터 방영한다고 했던가?”
“네. 7월 말부터요. 한창 촬영 중이라 정신이 없네요.”
“세 작품 연속으로 영화 하더니 갑자기 웬 드라마? 연기대상 한번 받고 싶어서?”
“연기대상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차기작 검토하는데 썩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가 없어요. 그 와중에 신인 작가분이 직접 대본 들고 찾아오셨는데 마음을 뺏겨 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덜컥 출연 계약서 써 버렸죠.”
“작년 하반기에 검토했던 시나리오들이 좀 별로긴 했지. 아마 올해 개봉하는 영화들은 작년에 비해 좋은 성적을 기록하긴 힘들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두밀령』, 『편지』, 그리고 곧 개봉할 영화까지 세 작품 연속으로 영화를 선택했던 김진모의 차기작은 STS에서 방영 예정인 24부작 드라마가 됐다.
맘에 드는 시나리오가 마땅치 않았고, 그 와중에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낸 신인 작가의 대본이 마음을 사로잡은 게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최정수는 김진모의 선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설사 예상 외로 시청률 부진을 겪더라도 괜찮다고 봤다. 이미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구축한 배우이니만큼 한 번 미끄러졌다고 해서 무너지진 않을 테니까.
따라서 김진모는 걱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굳이 걱정거리를 찾자면 안시현 쪽에 있었다.
“그나저나, 시현이 이놈은 도대체 뭘 하면서 지내는 거야? 유모차 사 줄 때 말고는 얼굴 구경도 못 했다. 넌 얼굴 좀 보고 사냐?”
“지난주에 잠깐 봤어요. 부모님이 라온이 봐준다고 할 때 불러내서 밥 한 끼 먹였죠. 아이 보느라 정신없어 보이더라고요.”
지난 4월.
정혜영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은 딸을 출산한 뒤, 안시현은 본격적으로 두문불출하며 육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언론사들이 안시현과 인터뷰를 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고, 그 대신 JM액터스의 공식 보도 자료만 받아야 했다.
JM액터스는 안시현이 당분간 육아에 전념할 계획이며, 차기작은 꼼꼼히 검토하여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최정수는 적어도 2007년 한 해 동안 안시현이 복귀할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자사자로부터 직접 들은 정보였다.
최정수가 걱정하는 부분은, 안시현의 휴식기가 길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연기에 대한 열정마저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단기간에 정점을 찍은 톱스타들의 경우, 결혼을 기점으로 연예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혹여나 안시현이 그런 케이스가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는 게 사실이었지만…….
김진모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한창 정신없을 때지. 그래도 그때가 나은 거야. 말문 트이고 걸음마 배우고 나면 그때부터 지옥문이 열리거든. 더 무서운 건 뭔지 알아?”
“뭔데요?”
“지옥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천국이었다는 걸 몇 년 후에 알게 된다는 거지. 아이는 걸음마 떼기 전이 제일 천사 같아. 우리 딸내미는 사춘기 왔는데 마누라랑 내가 눈치 보고 산다니까.”
“어휴. 듣기만 해도 결혼하기 무섭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결혼식 올리기 전에 혼인 신고부터 하겠다던 놈이 무슨.”
아쉬움을 토로하기보단 가을에 결혼하기로 결정을 내린, 자신에게 주례를 맡아 달라고 부탁한 김진모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데에 집중했다.
‘내가 아는 시현이라면, 은퇴한 것처럼 쉬다가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면 바로 복귀하려고 할 거야. 내 눈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야지. 뭐…… 근황이야 대한영화제 때 확인할 수 있겠지.’
* * *
6월 초.
제29회 대한영화제 시상식이 열렸다.
『칠전팔기』의 경우 올해의 영화상과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부문에서 각각 후보를 배출했다.
사실상 안시현의 연기력에 엄청나게 의존한 영화이니만큼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한 상황에서 안시현의 남우주연상 후보 등극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의외인 건 작중 비중이 그리 많지 않은 류성웅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거다. 그만큼 지호성 연기의 임팩트는 강렬했다.
대한영화제 시상식 당일.
언론들은 치열할 접전이 예상되는 남우주연상 부문과 관련해서 다수의 기사를 쏟아 냈다.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2년 연속 안시현 차지?]
[역대 대한영화제 2년 연속 수상 전례는?]
[안시현 대 송강식, 절친한 선후배의 자존심 싸움]
[비중과 흥행의 싸움, 투표인단의 선택은?]
지난해.
제28회 남우주연상 후보는 도합 다섯 명이었지만, 업계는 사실상 송강식과 안시현의 2파전으로 내다 봤고 실제 득표율 또한 그러했다.
이번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2년 연속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낸 송강식과 스포츠 영화 사상 최다 관객 기록을 갱신하며 원톱으로서도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입증해 보인 안시현.
후보는 도합 다섯 명이지만, 두 사람의 2파전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들과 언론의 시선이었다.
상황은 송강식 쪽이 조금 더 유리해 보였다.
지난해, 유일하게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한강』의 주연 배우로서 열연을 펼쳤다.
다만 남우주연상을 확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대한영화제 투표인단은 흥행뿐만 아니라 배우의 연기와 작품 내에서의 비중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칠전팔기』는 1000만 관객을 돌파하지 못했지만 700만 관객을 넘어서며 흥행에 성공했고, 안시현은 원톱으로서 정승상이라는 사람의 일대기를 다양한 감정으로 잘 표현해 냈다.
송강식과 안시현.
어느 쪽이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구경하는 맛이 있겠어.’
『편지』 이후로 극단 운영에 집중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는 최정수는, 절친한 두 배우 중 누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할지 내심 궁금했다.
간만에 안시현을 만나는 것도 기대됐고 말이다.
시상식 30분 전.
“아직 다들 안 왔나 보네요. 간만에 뵙습니다, 선배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안시현이 김진모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간만의 외부 일정으로 인해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안시현이 김진모와 최정수와 함께 시상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시현은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휴식기 때 육아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최정수의 눈에는 안시현의 변화가 대번에 파악이 됐다.
“육아가 힘들기는 한가 보네. 다크서클 심하다, 야.”
“메이크업으로 가렸는데 티 나요?”
“티 나지. 나도 그랬으니까.”
“선배는 3살 될 때까지 육아를 전담하셨다고 했죠?”
“응. 그다음에는 마누라가 일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바통 터치를 했지.”
“존경해요, 선배. 어떻게 그게 가능했어요?”
안시현은 존경심이 한껏 담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최정수를 바라보았다.
안라온.
정혜영의 어릴 적을 꼭 빼닮은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문제는 안시현이 육아를 전담하고 있단 거였다.
정혜영의 경우 일룡백화점 대표 이사로 복귀하기 위해 몸 상태를 회복하는 데에 전념하는 중이기에, 초보 아빠인 안시현의 고생은 이루 말할 데가 없었다.
그나마 정혜영이 어느 정도 육아 분담을 해 주고, 부모님의 도움 또한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힘든 건 변하지 않았다.
“악마가 따로 없지?”
“네. 등에 나사에서 만든 센서라도 달려 있나 봐요. 침대에 등만 댔다 하면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라니까요.”
“크흐흐. 그래도 한 번씩 웃어 주면 천사가 따로 없잖냐.”
“그 맛에 버티고 있어요.”
“응. 내가 그렇게 딸내미 3살 될 때까지 버텼어.”
육아는 힘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안시현은 회귀 후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너무 힘들고 때로는 라온이가 밉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해맑게 웃는 걸 보고 있자면 하루 종일 쌓인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 같았으니까.
다른 배우들이 올 때까지, 최정수는 안시현과 한참 동안이나 육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시상식 10분 전.
“아따~ 우리 시현이 참말로 오랜만이구만~ 보내 준 꼬까옷은 잘 받았냐?”
“육아하느라 피골이 상접해졌네. 이따가 몸보신 좀 해야겠다.”
황영민과 송강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에게 근황을 물으려던 찰나, 최정수가 안시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따가 선물 줄 거 있으니까 받아 가.”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이 선물이라니 뭘까 싶었지만, 이내 어렵지 않게 결론을 냈다.
‘뭐, 육아용품 좀 주시려는 거겠지.’
지극히 합당한 결론이었다.
작정하고 2007년에는 쉬겠다고 말한 자신에게 작품과 관련된 선물을 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 *
결과적으로 『칠전팔기』는 올해의 작품상과 남우조연상에서 수상의 영광을 안지 못했다.
송강식이 주연을 맡은 1000만 관객 돌파 영화 『한강』이 신인상, 감독상, 올해의 작품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까지 도합 5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으니까.
그럼에도 양상효 감독과 『칠전팔기』의 주요 배우들은 비교적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2006년 유일하게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한강』의 선전은 어느 정도 예견된 바였다.
게다가 『칠전팔기』는 안시현에게 엄청나게 의존했다는 구조적 문제를 지니고 있다. 류성웅이 남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게 신기할 정도였다.
따라서 올해의 작품상과 남주조연상에서의 수상 실패를 어느 누구도 낙담하지 않았다.
그 대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다 필요 없고 남우주연상만 받자, 우리 작품의 주연 배우에게 상 하나만 안겨 주자.
특히나 양상효 감독은 시상식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빌었다.
『칠전팔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해 준, 사장될 뻔했던 위기에서 구해 주고 성공적인 대중영화 입봉을 도와준 안시현이 폭발적인 연기력을 인정받기를 말이다.
마침내 여우주연상 수상까지 마무리가 됐다.
그 직후.
“마지막으로 남우주연상 시상이 진행되겠습니다.”
MC의 멘트와 동시에 안시현이 스태프로부터 봉투 하나 건네받고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전년도 남우주연상 수상자이자, 금년도 남우주연상 후보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