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2화>
132화. 최대한 빨리요
무대에 위에 오른 안시현이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채 고개를 숙였다.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대한영화제 덕분에 모처럼 외출을 하게 된 라온이 아빠 안시현입니다.”
“안시현 배우님, 팬분들이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차기작 소식은 언제쯤 들려주실 건가요?”
“좋은 인연이 닿는다면 팬 여러분께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죄송하게도 당분간은 전업 주부로서의 삶을 이어 갈 것 같습니다.”
안시현은 차기작과 관련된 MC의 질문에 전형적인 대답으로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쓸데없이 여지를 남겨 추측성 기사가 나오게 하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맺고 끊는 게 낫다고 봤다.
짧은 잡담 이후.
“제29회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를 호명하기에 앞서, 먼저 후보부터 만나 보겠습니다.”
안시현이 자신과 송강식을 비롯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을 차례대로 소개했다.
이후 스태프로부터 건네받은 봉투를 개봉했다.
동시에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먼저 남우주연상 수상자의 이름을 확인했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제29회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축하합니다, 『칠전팔기』의 안시현!”
결과적으로 투표인단은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일조한 송강식이 아닌, 원톱으로서 시종일관 인상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700만 관객이라는 호성적을 견인한 안시현의 손을 들어 줬다.
그렇게 안시현은 2년 연속으로 대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짝짝짝!
수많은 배우들의 박수 속, 유력한 수상 후보였던 송강식이 가장 먼저 무대 위에 올라와 꽃다발을 건넸다.
그는 안시현과 가볍게 포옹하고서 귓속말을 나누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축하한다. 3년 연속 노려 보는 건 어때?”
“아하하.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은데, 지금 당장 준비한다고 해도 빠듯할 거 같아서 포기할래요. 기회가 되면 3회 수상을 노려 봐야죠.”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송강식 이후에도 수많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 축하 메시지를 건넸다. 안시현은 벅차오르는 뿌듯함을 느끼며 준비해 온 수상 소감을 읊조렸다.
“이 길을 걸으며, 은퇴 후 제가 어떤 배우로 인식되면 좋을까 고민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제 결론은 항상 같았습니다. 연기를 통해 관객 분들이 희로애락을 느끼게 만드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남궁수민과 정승상을 통해, 그 목표가 한 발자국이라고 더 다가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합니다. 목표를 이룰 때까지 항상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배우 안시현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안시현, 2년 연속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2년 연속 수상은 역대 두 번째.]
[20대에 두 번 정상에 오른 안시현, 역다 최다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정조준하나?]
[대한영화제와 관련된 각종 재밌는 기록들.]
[김진석 JM액터스 대표의 아성을 뛰어 넘을 배우는?]
[김진모, 당분간 영화에 집중할 걸로 알려져. 두 번째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노린다.]
안시현의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은 수많은 연예부 기자들의 좋은 기사거리가 되어 주었다.
지금껏 2년 연속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는 안시현을 제외하면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김진석 대표였다.
안시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수상 이력을 자랑하는 배우인 김진석 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뜻깊은 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물론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최다 수상 신기록을 세우려면 앞으로 무려 세 번이나 더 남우주연상을 받아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이기에, 2년 연속 수상만으로도 의미가 큰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일까?
수상을 하자마자 집에 들어갈 것 같았던 안시현은, 예상과 달리 친분이 두터운 배우들과 흔쾌히 뒤풀이 자리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자자, 잔들 드세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
“야. 상은 시현이가 받았는데 어째 네가 더 신나 있어? 누가 보면 네가 남우주연상 받은 줄 알겠다.”
“시현이의 기쁨이 곧 제 기쁨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 자식이 먼저 앞서나가야 제가 따라잡으려고 동기 부여가 되거든요. 쫓아가는 맛이 있더라고요.”
뒤풀이 자리에서 가장 들뜬 건 김진모였다.
김진모는 안시현의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2회 연속 수상이, 마치 자신이 이뤄낸 업적인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를 해 줬다.
덕분에 평소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거하게 마셔서 인사불성이 된 건 보너스였다.
“진모는 내가 책임질 테니, 시현이 너는 뒤풀이 계속 즐겨. 널 위한 자리잖아.”
“고마워요, 형.”
“고마울 것도 참 많다. 아. 그리고 수상 축하한다. 너랑 진모가 내 담당 배우라는 게 항상 자랑스러워.”
결국 김진모는 뒤풀이가 시작되고 세 시간 만에 최정수와 안시현의 손에 이끌려 식당 밖으로 나왔고, 최봉팔이 집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뒤풀이를 마무리해야 했다.
김진모를 떠나보낸 직후.
최정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진탕 술을 퍼마시다가 이내 인사불성이 된 김진모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짜식, 어지간히 기분 좋았나 보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진탕 마셔 댈 정도면 말이야.”
“진모가 수상을 했더라면 저도 비슷한 반응이었을 거예요. 아, 물론 저는 술은 안 마셨을 테지만요.”
“독한 놈. 신입생 때만 하더라도 술, 담배 꽤나 즐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 순간 그걸 딱 끊어 버리고 연기에만 올인을 해 버리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라왔잖습니까.”
“그럼 이제 슬슬 내려놓고 막 살 때도 되지 않았냐?”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죠.”
최정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안시현이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2회 연속 수상 정도로 만족할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편지』를 촬영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만족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안시현이 더 큰 목표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 안시현에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담배를 끈 최정수가 안시현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 따라와. 선물 줄게.”
“선물을 차에 놔뒀어요?”
“그럼 시상식장에 들고 들어가겠냐? 난 기자들한테 사진 많이 찍히고 그런 거 싫다.”
최정수가 안시현을 자신의 차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조수석으로 손을 뻗어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동시에 안시현의 표정이 굳었다.
“선배님, 이건…….”
“표정이 왜 그래? 시나리오 처음 봐?”
최정수가 건넨 것은 바로 시나리오였으니까.
순간 안시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타이틀조차 적혀 있지 않은 시나리오를 자신에게 건네는 최정수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최정수는 그런 안시현의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딱.
손가락을 튕겨 안시현의 이마를 가볍게 때리고는, 재차 담배를 꺼내 입에 들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괜찮은 시나리오가 들어왔고, 네가 이걸 봤으면 싶어서 들고 온 거니까.”
“선배님이 항상 저랑 진모를 많이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전 당분간 복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 타이틀 없는 거랑 두께 보고 짐작하겠지만, 아직 집필 중인 시나리오야. 부담 가지지 말고 한번 읽어 봐.”
안시현이 최정수가 건네는 시나리오에 부담감을 느낀 건, 최소한 2007년 내로는 차기작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필 중인 시나리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제작 단계까지 가려면 한참 시간이 남았다. 아무리 빨라야 2008년 하반기, 평균적으로는 그 이후에야 제작이 가능할 거다.
따라서 시나리오를 검토하면서 곧장 차기작에 들어간다는 부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고민 끝에 안시현이 시나리오를 챙겼다.
“……일단 읽어 보겠습니다.”
“보고 마음에 들면 언제라도 좋으니까 나한테 연락해. 감독이랑 미팅 자리 주선해 줄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안시현은 아직 타이틀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름조차 모르는 감독의 집필 중인 시나리오를 최정수로부터 건네받게 됐다.
* * *
안시현이 최정수로부터 건네받은 시나리오를 읽어 보게 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라온이가 잠이 든 사이, 거실에서 조심스럽게 시나리오를 손에 잡은 것이다.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집필의 진행 정도였다.
‘이제 딱 절반 정도 했군.’
시나리오는 절반 정도 집필된 상태였다.
어째서 절반가량이나 집필할 동안 타이틀을 정하지 않았는지 의아했지만, 안시현은 이내 그와 관련된 호기심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타이틀이나 감독의 경력, 이름 같은 건 안시현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시나리오의 내용과 완성도였다. 어떤 작품이기에 최정수가 자신에게 선물이라고 표현한 건지가 궁금했다.
안시현은 차분하게 시나리오를 검토해 나갔다.
그리고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시나리오를 모두 읽은 뒤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정수 선배는 내 성향을 너무 잘 알아.’
최정수의 예상이 맞았다. 안시현은 최정수가 건넨 시나리오에 마음을 제대로 뺏겨 버렸다.
『칠전팔기』와 마찬가지로 원톱이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축이 용이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상상을 하며 몸이 달아올랐다.
심지어 아직 시나리오가 집필 중이니 딱 좋았다. 최소한 라온이가 걸음마를 뗄 때까지는 육아에 전념하다가 복귀할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끌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섣불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야.’
그럼에도 안시현은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이 시간은 단순한 휴식기가 아니다. 미래에 안시현이라는 배우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 고민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안시현은 성급한 복귀를 하고 싶지 않았다.
‘20대에 이룰 수 있는 건 다 이뤘다. 이제는 30대, 나아가서는 그 이후를 생각하면서 나아가야 할 때야.’
연기대상 한 번,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두 번.
배우로서 20대에 이룰 수 있는 건 모두 이뤘다.
매 작품마다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잡았고, 주연 배우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았다.
20대 배우 중 안시현보다 출연료와 광고 단가가 높은 배우가 없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입지가 얼마나 탄탄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다시 회귀한다 해도 이보다 더 완벽한 필모그래피를 쌓을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국민배우는 사실 기준이 매우 모호하다.
다만 이대로만 배우 생활을 이어 가며 30대 중후반이 된다면, 회귀 전 김진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토록 원하는 국민배우의 타이틀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회귀 당시의 목표는 사실상 목전에 둔 상황.
안시현은 휴식기를 가지기 시작할 즈음부터 새로운 목표에 대해 고민했고, 제29회 대한영화제 시상식을 기점으로 마침내 목표를 정했다.
‘은퇴를 하고도 오랜 시간에 기억에 남는 명배우가 되고 싶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아쉽게 놓쳤던 황금영화제, 혹은 다른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는 걸로 대한민국 배우의 연기가 세계에서도 통한다는 걸 몸소 증명해 보이고 싶어.’
이에 안시현은 자신의 목표와 최정수가 준 시나리오를 두고 저울질을 했다. 목표에 부합할 수 없다면 단호하게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선배님, 저예요.”
-시나리오 다 봤냐? 시간상 몇 번은 봤겠는데?
“두 번 봤어요. 다름이 아니라…….”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감독님과 미팅 잡아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흐흐흐. 마음에 들었나 보네? 내 그럴 줄 알았다. 오냐. 미팅 잡고 바로 연락 주마.
안시현은 최정수가 자신에게 선물이라며 준 시나리오에 완전히 홀딱 반한 상태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