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3화>
133화. 못 하겠다
시나리오를 두 번 검토하는 과정에서 안시현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최정수에게 연락하기 전, 결론을 내렸다.
‘이 시나리오, 회귀 전에 본 적 없어.’
지금껏 안시현은 회귀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선택해 왔다. 설사 제작 단계까지 가지 않았던 작품일지라도, 회귀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성공에 대한 확신을 품은 채 접근을 했다.
하지만 이번 작품만큼은 다르다.
아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작품이었다.
비슷한 콘셉트의 작품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구체적인 설정까지 파고들면 본 적 없는 작품이 맞았다.
안시현은 회귀 전에 온갖 영화를 보았다.
국내외 가리지 않았고, 흥행 여부 또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영화가 좋아서 온갖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보며 즐거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작품이라는 건 둘 중 하나라고 봐야 했다.
독립영화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제작 단계에 돌입한 적이 없거나.
전자든 후자든 이번만큼은 회귀 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선택을 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정보를 선점하고 있다는 메리트가 필요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대본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 작품이라면 흥행 여부를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며 혼신의 힘을 다해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캐릭터 구축만 제대로 하면, 모든 걸 내던져 연기할 수 있다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노려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자신의 목표에도 근접할 캐릭터였다.
도전이라고 생각했던 『칠전팔기』보다도 더 어려운 난이도의, 주연 배우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이도 저도 안 되는 영화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이 시나리오가 탐이 났다.
1000만 관객 돌파 같은 어마어마한 흥행은 아닐지라도 손익 분기점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았고, 순수하게 연기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 만한 난이도의 캐릭터.
배우로서 가슴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정수에게 연락을 한 다음 날.
안시현은 대학로로 향해 극단 광대들 근처에 있는 한 카파에서 최정수를 만났다.
“감독님은요?”
“곧 올 거야. 면도하고 이발 좀 해야 돼서 조금 늦는다더라고. 허구한 날 집구석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사람 몰골이 아니거든. 이해 좀 해 줘.”
“괜찮아요. 선배님하고 둘이서 여유롭게 커피 한잔하면 저야 좋죠.”
“그나저나…… 생각보다 빨리 반응했다? 난 조금 더 고민해 볼 거라고 예상했거든.”
“부모님이나 아내가 전적으로 제 편이거든요. 제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언제든지 복귀하라고 난리예요.”
“좋은 가족들이네.”
“덕분에 행복하죠. 선배님, 이 시나리오 아직 제작 논의 없었습니까?”
“없었어. 자세한 건 감독 만나서 이야기 들어 보면 알 거야. 아,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데 네가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본 적이 있다고요?”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독들마다 특유의 스타일이 존재하는데, 최정수로부터 건네받은 시나리오는 자신이 아는 감독 중 겹치는 스타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스타일 변화를 시도했을 수도 있지만…….
겹치는 부분이 아예 없을 정도로 스타일의 변화를 꾀할 만한 감독은, 적어도 안시현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혹시, 극단원인가?’
그나마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면, 극단원 중 한 명이 집필하고 있는 시나리오라는 것 정도였다.
안시현이 고민에 빠진 사이.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장신의 사내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곧장 최정수와 안시현에게로 다가오며 고개를 숙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몰골이 워낙 엉망이라…….”
“그럴 수도 있지. 인사들 해. 구면이지?”
“박의준입니다. 감독으로서 안시현 배우님을 뵙게 될 줄이야…… 감개무량합니다.”
그 순간.
안시현은 사내가 누군지 깨달았다.
‘『빌딩 숲』 연극 무대에서 바람잡이 할 때, 조연출 하고 있던 정수 선배님 처남!’
박의준.
한동안 극단 광대들에서 조연출 생활을 하며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다고 했던 최정수의 처남이자, 회귀 전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던 인물이다.
‘2011년부터인가 독립영화 감독을 했었지 아마? 결국 대중영화 메가폰은 한 번도 못 잡았었고.’
안시현이 시나리오를 보고서 박의준을 떠올리지 못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대중영화의 메가폰을 잡아 본 경험이 없다.
안시현이 수많은 영화를 봤지만 독립영화까지 작정하고 찾아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다. 때문에 안시현은 회귀 전 박의준의 작품을 겪어 보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들었다.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좋은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있는 감독이, 어째서 대중영화로 영역을 넓히지 못한 채 커리어를 마감했을까?
‘뭐…… 겪어 보면 알 수 있겠지.’
안시현은 박의준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억눌렀다. 사람이 아닌, 자신이 보고 매력을 느꼈던 시나리오 자체에 집중하기로 했다.
“시나리오 잘 봤습니다.”
“마음에 드셨나 모르겠네요.”
“마음에 드는 부분이 70%,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30% 정도였습니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부분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집필 과정에서 참고하겠습니다.”
“원톱이라서 주연 배우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은 것, 대중영화보다는 예술영화에 가까운 방향성. 이 정도입니다.”
박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안시현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무덤덤하게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예술영화는 메이저 무대에서 손익 분기점을 돌파하는 게 불가능할까요?”
“제작비, 출연진, 감독, 배급사 등을 종합적으로 두고 판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JM액터스의 자체 제작, 안시현 주연, 박의준 감독, 손익 분기점 150만 정도라면 어떻겠습니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문제 될 게 없겠네요.”
“동의합니다.”
안시현은 박의준의 뜻에 동의했다.
원톱과 예술영화에 가까운 방향성.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말해 달라고 해서 말해 주긴 했지만, 사실 제작 단계에 들어가면 그리 큰 문제가 될 만한 부분들은 아니었다.
『칠전팔기』가 그러했듯이, 원톱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지라도 해당 배우가 뛰어난 연기만 보여 준다면 흥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또한 예술영화 중에서도 상업적으로 성공한 사례가 더러 있다.
때문에 안시현은 애당초 박의준을 만나러 나오며 해당 부분들을 문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자리는 불만을 토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닌, 차기작을 확정하기 전 머릿속을 뒤덮은 한 가지 의문을 해소하기 위한 자리였으니까.
“저도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한노을 캐릭터, 절 생각하고 구상하신 겁니까?”
“눈치채셨군요.”
“티가 좀 많이 나서요.”
“『편지』에서 보여 준 안시현 배우님의 사이코패스 연기를 보며, 이런 캐릭터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지 않으실까 싶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안시현은 주인공인 한노을 캐릭터가 자신을 주연으로 고려하고서 구상한 캐릭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29살이라는 캐릭터의 나이, 다양한 감정 변화를 겪는 캐릭터성, 중간중간 메소드가 아니라면 완벽하게 표현하기 힘들 것 같은 몇몇 신들까지.
요구하는 연기력의 기준치가 너무 높았다.
동년배 중에 그나마 연기가 가능할 것 같은 배우를 떠올리면 자신과 김진모가 전부였고, 위아래로 범위를 조금 더 넓혀도 떠오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만 메소드 연기를 요구하는 부분에서 김진모가 아닌 자신을 생각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안시현의 판단이 맞았고 말이다.
아마도 최정수는 박의준의 의도를 알고서 안시현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해 준 것이리라
“제가 한노을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차피 제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제작비도 그렇고, 원톱에게 요구하는 연기력도 그렇고, 안시현 배우님이 아니라면 제작을 포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집필을 마무리해야죠. 습작으로 남겠지만.”
박의준의 태도는 단호했다. 안시현이 아닌 다른 주연 배우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다른 배우에게 주연을 맡기더라도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었다.
안시현이 장고에 빠졌다.
마음은 이미 시나리오에 뺏긴 지 오래였다. 주연 배우로서 촬영에 임하는 건 사실상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만 주연으로서의 권한을 어디까지 확보하고 요구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몇 분이 흐른 뒤.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두 개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열 개라도 괜찮습니다.”
“일단 제작 시점은 빨라야 내년 여름이었으면 합니다. 제가 아직 휴식이 더 필요해서요. 게다가 한노을 캐릭터를 위한 준비도 조금 필요하고요.”
“받아들이겠습니다.”
박의준의 입장에서 보면 첫 번째 조건은 사실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시나리오의 집필을 끝낸 뒤 투자사와 접촉하고, 캐스팅 라인을 확정하는 등 이런저런 준비를 끝내려면 안시현이 말한 내년 여름 전후나 되어서야 제작이 가능할 테니까.
더 빠르게 앞당길 수도 있겠지만…….
박의준은 고려하지 않았다.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기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준비를 끝마치고서 크랭크인을 하고 싶었다.
“두 번째 조건은 뭡니까?”
“정수 선배님이 출연해줬으면 합니다. 딱 봐도 정수 선배님을 생각하고 만든 캐릭터가 보이더라고요.”
“일없다. 나 당분간 쉴 거야. 내년까지 연기는 거들떠도 안 볼 거니 기대하지 마라.”
최정수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드러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박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매형을 생각하고서 만든 캐릭터가 하나 있긴 합니다. 이미지를 떠올리기 편하게 그렇게 한 건데…… 필요하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저기 처남? 나 내년까지 연기할 생각 없다니까.”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형이 출연해야 하는 부분은 내후년에 따로 촬영하면 되거든요. 별로 안 많아요.”
“……얼마나 되는데?”
“한 신이요. 대사는 열 마디 정도?”
“열 마디? 에휴. 됐다, 됐어. 그 정도면 그냥 내년에 촬영하는 걸로 하자. 열 마디 때문에 촬영 스케줄 미루면 죄다 욕한다.”
“네. 그렇게 말하실 줄 알았습니다.”
촬영 스케줄을 최소 2008년 여름으로 미뤄 놓았고, 거기에 최정수가 단역으로 출연하며 어느 정도로 화제성을 만들 수 있는 판까지 만들어 놓았다.
이제 남은 건 시나리오 집필을 끝내는 것, 그리고 투자사를 확정하고서 제작 단계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박의준과의 미팅 다음 날.
안시현은 추가로 지급받은, 70%까지 완성된 시나리오를 들고서 JM액터스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김진석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줬다.
“제 차기작이에요.”
김진석 대표는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일단 시나리오를 검토하고서 정확히 필요한 부분만을 질문했다.
“타이틀도 없고, 감독 이름도 안 적혀 있네. 감독 이름이 뭐야?”
“박의준입니다. 정수 선배님 처남이에요.”
“아아, 멀쩡하게 미국 유학 갔다 와서는 대뜸 시나리오가 쓰고 싶다고 했던 그 또라이구나.”
“잘 아시네요?”
“정수가 나한테 하소연한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라고 했어. 백날 말해 봐야 안 통할 거라고. 이렇게 그럴 듯한 시나리오를 완성해 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어떤 것 같아요?”
“투자나 자체 제작?”
“네.”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가 당연히 투자나 자체 제작을 결정할 거라고 생각했다. 김진석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의 가치를 알아볼 걸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시현아, 미안하다만 이건 투자도 제작도 못 하겠다.”
김진석 대표의 선택은 안시현의 예상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