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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34화 (134/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4화>

134화. 다시 만들면 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김진석 대표의 대답에, 안시현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드세요?”

“시나리오야 마음에 들지. 네 차기작이니까 일단 원톱도 안정적으로 확보된 상태니 투자 가치도 있고.”

“그런데 어째서죠? 혹시 감독님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면 곤란한데…….”

“기초가 없긴 하겠지만, 그거야 어떻게든지 보완 가능하니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만. 이런 좋은 시나리오를 쓸 정도면 가능성을 기대해 봐도 되겠지.”

“그럼 아무 문제도 없지 않나요?”

시나리오도 주연 배우도 감독도 문제가 없는데, 그럼에도 투자를 하지 않겠다니?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작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 김진석 대표는 딱히 표정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다.

“시현아, 우린 대중영화에만 투자하고 자체 제작한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예술영화로 만들어야 돼. 아예 작정하고 한 사람의 3개월만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대중성을 고려하고 양다리를 걸치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거야. 그래서 안 하겠다는 거야.”

“…….”

순간 안시현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는 박의준의 시나리오를 예술영화의 요소가 가미된 대중영화의 관점에서 바라봤지만, 김진석 대표는 철저하게 예술영화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JM액터스는 흥행 가능성이 높은 대중영화와 드라마에만 투자 및 자체 제작을 하고 있다.

때문에 박의준의 시나리오는 JM액터스로부터 도움을 받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대중영화가 아닌 예술영화로 본다면 말이다.

안시현은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어중간하게 선을 지키려다가 이도저도 아닌 영화를 만드느니, 예술영화 쪽으로 확실하게 방향성을 잡는 게 맞겠네요.”

“오히려 그렇게 가는 게 흥행에도 도움이 될걸? 상대적으로 제작 규모도 줄일 수 있고.”

“동의해요. 이왕이면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에 투자사를 구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멀리 돌아가지 마. 대부분의 경우 의외로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가까운 곳이라…….”

대중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선상에서 저울질을 했던 것처럼, 안시현은 이번에도 김진석이 자신을 위해 대놓고 힌트를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네요. 왜 몰랐을까요. 정말 가까운 곳에 답이 있었는데 말이죠.”

*   *   *

김진석 대표를 만나고 며칠 뒤.

안시현은 박의준에게 미팅을 요청했고, 다시 한번 대학로에서 만나게 됐다. 박의준은 지난 만남 때처럼 말끔한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집필은 잘되고 계세요?”

“네. 주연 배우가 확정되고 나니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잘되네요. 오늘은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건가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감독님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머릿속에 생각하는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만드는 데에 얼마나 필요할 것 같습니까?”

“40억 원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홍보비까지 포함해서 대략 넉넉잡고 60억 원 생각하면 되겠네요.”

박의준이 생각하는 제작비와 안시현이 생각하는 제작비 사이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당초 안시현이 생각했던 제작비는 박의준이 말한 제작비의 두 배를 훌쩍 넘겼다.

다만 그것은 대중영화를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의 제작비고, 예술영화를 기준으로 상정한다면 박의준과 기준점이 비슷했다.

박의준의 뜻을 확인하자마자 안시현은 이내 미팅을 요청한 본론을 꺼내들었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제작비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며칠 전, 투자 및 자체 제작 건으로 JM액터스에 이야기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제가 한번 맞춰 볼까요? 예술영화라서 투자도 자체제작도 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던가요? JM액터스는 독립영화와 예술영화 쪽으로는 일절 투자하지 않는다고 들었거든요.”

“아하하. 잘 아시네요. 정답이에요.”

박의준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시현이 JM액터스와 투자 및 자체 제작 건에 대해 대화를 나눌 거라는 것도, 그 대화가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투자 건이라면 안시현 배우님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시현 배우님이 원톱이고, 매형이 단역으로나마 출연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투자사를 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니까요. 시나리오 집필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가 발품 팔겠습니다.”

“아,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미 구했거든요.”

순간 박의준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안시현이 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구하셨다고요? 나흘 지났는데요?”

“나흘이면 좋은 시나리오를 투자사를 구하기엔 차고 넘치는 시간이죠.”

“제 시나리오에 60억 원을 선뜻 투자하겠다고 한 투자사가 있다고요?”

“투자사는 두 곳입니다. 일단 제가 절반인 30억 원을 투자하겠습니다. 오해하실까 봐 첨언하자면, 일룡백화점이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투자하는 겁니다.”

“배우님이 직접요?”

“그만큼 전, 감독님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듭니다.”

김진석 대표와의 미팅 후.

정혜영과 상의한 끝에 안시현은 자신이 직접 박의준의 시나리오에 투자를 하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마음만 먹으면 제작비 전체를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일부러 절반만 투자할 생각이었다.

자신이 모든 금액을 투자하고서 원톱을 맡으면 자연스레 박의준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고, 언론의 시선도 썩 호의적이지만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투자해 줄 영화 제작사 또한 일찌감치 구해 놓은 상태였다.

“나머지 절반은…… 오셨네요. 직접 이야기 들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박의준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이내 자신의 시나리오에 절반을 투자하겠다고 결정 내린 투자사의 정체를 알게 됐다.

“……혜인원 대표님이시죠?”

“우리 구면이죠? 한 3년 전이었던가? 최 배우랑 같이 술 한 잔 했던 것 같은데, 맞나요? 그땐 유학 중이었고 방학이라 잠깐 귀국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다.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인원.

2000년 이후 투자한 영화들이 모두 흥행하며 대한민국 최고 규모의 영화 제작사 겸 배급사로 자리 잡게 된 거물이 투자를 하기로 했다.

*   *   *

안시현은 자신이 제작비의 절반을 투자하겠다고 결정한 다음 날, 혜인원을 찾아가 대표에게 미팅을 요청하고서 시나리오를 보여 줬다.

그리고는 제작비의 절반을 투자해 달라고 요청했다.

답변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시나리오 좋은데요? 마음에 드네요. 마음 같아서는 전액 투자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절반은 이미 제가 투자하기로 해서요.”

“그건 좀 아쉽네요. 그럼 절반만 투자하는 걸로 하고, 배급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감독님과 대화를 해 봐야 알겠지만, 저는 혜인원에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그럼 저희야 좋죠. 이 시나리오, 예술영화임에도 상업적으로 제법 흥행할 것 같은 냄새가 팍팍 나거든요. 무려 주연이 안시현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게 박의준 감독과 혜인원의 대표가 투자와 관련해서 상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안시현은 내심 감탄했다.

고작 두 번 만난 게 전부이지만, 안시현은 박의준이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느꼈다.

캐릭터가 살아 있고 메시지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시나리오도 인상적이지만, 투자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는 것만 봐도 그가 작정하고 입봉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박의준은 혜인원으로부터 제작과 관련된 대다수의 권한을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혜인원은 투자사 및 배급사로서 최소한의 권한만을 행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안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투자는 하겠지만, 권한을 행사할 생각은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브레이크를 걸 정도의 권한이면 되겠네요. 나머지는 감독님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자유롭게 만들어 보라는 건가요?”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좋지 않겠어요? 제가 연기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한데, 감독님도 저와 같은 과가 아닌가 싶어서요.”

박의준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같은 과입니다. 그래서 괜찮냐고 물어본 거예요. 만족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거든요.”

“오히려 그래 주시면 저야 환영이죠. 힘들긴 하겠지만, 결과물만큼은 확실할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제작 단계에 돌입하기까지 약 1년이 남은 상황.

일찌감치 투자 및 배급을 확정한 상황에서, 안시현과 박의준은 스태프 구성 또한 빠르게 끝마쳤다.

“감독님께서 몸담은 곳이 없으시면, 저희 혜인원의 스태프들과 일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다들 베테랑이다 보니 감독들의 든든한 손발이 되어 줄 겁니다.”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죠.”

이제 남은 건 시나리오의 완성과 캐스팅 라인 확정뿐.

‘차기작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알리는 편이 좋겠어.’

안시현은 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빨라야 2008년 여름에야 크랭크인이 가능한 상황이다. 굳이 서둘러서 차기작에 대해 발표하며 언론의 이목을 끌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나서 차기작에 대해 알리는 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미팅을 마무리 한 직후.

“한가위 전에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박의준은 언제까지 시나리오를 완성하겠다고 짧게 언급을 한 뒤에 떠났다.

미팅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안시현은, 주차를 하고서 차에서 한참 동안 내리지 않았다. 70%가량 완성된 대본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결심을 내렸다.

“아까운 내 근육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근육이야 다시 만들면 되는 거니까.”

배역을 위해 근손실을 감수하기로 말이다.

*   *   *

시나리오에 마음을 완전히 뺏겼음에도, 역설적이게도 안시현은 미팅 이후 시나리오를 손에 쥐지 않았다.

서재에 조심스레 보관해 뒀을 뿐이다.

‘캐릭터 구축은 시나리오가 완전히 완성된 이후에 시작한다.’

아직 시나리오가 완성되지 않았다.

70% 완성된 시나리오만으로도 캐릭터의 매력이 제대로 느껴졌지만, 캐릭터 구축을 위해서는 100% 완성된 시나리오가 필요했다.

극중에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캐릭터이니만큼, 완성되지 않은 시나리오로 캐릭터를 구축하면 후반부에서 몰입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안시현은 시나리오를 보기보다는 라온이를 돌보며 전업주부로서의 삶에 매진했다. 정신을 차릴 때마다 눈에 띄게 성장해 있는 자신의 딸을 보며 행복을 느꼈다.

육아가 버겁다고 느낄 즈음이면 부모님이 라온이를 맡아 줬고, 휴식을 취하거나 정혜영과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 과정에서 안시현은 단 한 건의 스케줄조차 소화하지 않으며 조용히 지냈다.

간간히 팬 카페에 근황을 알리는 글조차 올리지 않았다면, 기자들이 안시현에 대해 기사를 쓸 만한 내용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2007년 9월의 어느 날.

안시현은 라온이를 재우고 아파트 상가에 있는 슈퍼에 장을 보러 나왔다가 최정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님.”

-해 지면 극단으로 와. 처남이 시나리오 완성했어.

“지금 감독님과 같이 있으세요?”

-한 3개월 정도 어디 감금되어 있었던 몰골로 나타나서는 완성된 시나리오 주고 잠들었다. 잠 좀 재우고 멀쩡하게 만들어 놓을 테니까, 넉넉잡아 7시 전후로 와.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네, 그럴게요.”

최정수와의 통화를 끝마친 직후.

안시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추석 연휴를 열흘 남겨 둔 시점.

박의준이 약속대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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