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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35화 (13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5화>

135화. 마음껏 드십시오

이전과 달리 시나리오의 표지에는 떡하니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90일』.

단순하면서도 스토리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제목에 안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이 타이틀 잘 뽑으셨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90일』보다 더 핵심을 짚는 타이틀이 떠오르지 않았다.

안시현은 타이틀에 만족감을 느끼며 차분하게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퇴고 과정에서 수정된 부분이 꽤 있네.’

일단 주인공 한노을의 캐릭터성을 표현하기 위해 과정에서 일부 표현 방식이 소폭 수정되어 있었다.

다행히 큰 변화는 아니었다.

큰 틀은 유지한 채로 자잘한 부분들만 수정했기에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쪽이 조금 더 표현법이 좋기도 하고.’

게다가 수정된 표현 방식이 조금 더 세련됐다는 느낌이 들기에 안시현은 만족했다.

기존 분량까지 검토를 끝낸 뒤, 마침내 안시현은 새로운 분량을 검토해 나갔다. 한노을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했던 조각들이 하나둘씩 끼워 맞춰져 갔다.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차분하게 시나리오를 끝낸 안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박의준 감독과 안시현의 생각은 대체로 비슷했다.

한노을은 안시현이 지금껏 그가 맡아 왔던 배역 중에서도 가장 높은 난이도를 자랑했다.

만약 스토리의 방향성이나 한노을 캐릭터에 대한 해석에서 이견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캐릭터 구축에 문제가 생기리라.

“시나리오 좋네요. 퇴고 끝낸 거죠?”

“네. 완전히 끝낸 상태입니다. 혹시 아쉬운 부분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반영하겠습니다.”

“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음에 들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조금 쉬신 후에, 스태프 확정하고 오디션을 통해서 캐스팅 라인 확정하시죠.”

“혹시 특정 배역에 점찍어 둔 배역이 있다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박의준 감독의 질문에 안시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왕 예술영화로 방향을 잡은 거, 안시현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 라인을 확정하기를 바랐다.

굳이 검증된 배우를 쓰면서 제작비를 늘리는 게 꺼려지고도 했거니와, 애초에 한노을의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영화이다 보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없습니다. 아, 개인적인 바람이 있긴 한데…… 이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일단 저와 정수 선배님을 배역을 제외한 배역들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서 뽑는 걸로 방향을 잡죠.”

물론 개인적인 바람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박의준 감독에게 말할 부분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럼 전 슬슬 캐릭터 구축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벌써요?”

“기간이 많이 남아 있기는 한데, 원톱이기도 하고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완벽하게 준비하려고요. 몸도 만들어야 하고요.”

“아…… 하긴 그렇겠네요. 이해했습니다. 공개 오디션에는 오실 거죠?”

“감독님께서 부르시면 당연히 가야죠.”

11월 말.

공개 오디션을 예정하기로 했다.

*   *   *

박의준 감독으로부터 완성된 시나리오를 받은 다음 날, 안시현은 팬카페에 자신의 차기작이 확정됐으며 2008년에 촬영에 들어갈 것임을 팬들에게 알렸다.

팬 미팅 당시 차기작 소식을 보도 자료를 통해서가 아닌, 자신이 직접 알려 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로부터 30분 뒤.

JM액터스는 보도 자료를 통해 안시현이 입봉 감독인 박의준의 『90일』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제작비 중 일부를 안시현이 투자했다는 것 또한 알렸다.

이에 언론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흥행보증수표 안시현, 차기작 결정하다!

-예술영화 선택한 안시현, 이번에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제작비 투자, 안시현의 새로운 도전.

-『90일』의 박의준 감독, 배우 최정수 처남인 것으로 알려져 화제.

-하버드 졸업생이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데뷔 후, 안시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고서 승승장구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배우들에게 묻어 간 것도 아니다.

『나는 간첩입니다』를 제외하면 모든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줬고, 심지어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보여준 리수철 연기마저도 신 스틸러 역할을 제대로 해내며 극찬을 받았으니까.

흥행보증수표.

이 평가는 『칠전팔기』에서 원톱을 맡으며 더욱 확고해졌다.

드라마든 영화든 작품의 흥행을 결정지을 만한 파급력을 가진 배우로 평가되고 있는 상황에서, 안시현이 결정한 차기작은 예술영화였다.

심지어 독립영화 경험조차 전무한 초짜인 박의준 감독과 함께 하는 걸 택했다.

박의준 감독이 최정수의 처남이고 하버드를 졸업했다는 게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안시현이 초보 감독과 함께하는 예술영화마저도 흥행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게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안시현이라고 해도,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아도 경험 없는 감독과 함께한다면 흥행 가도를 이어 가지 못할 거라고 보는 시선이 대세였다.

심지어 예술영화이지 않은가.

그로부터 열흘 뒤.

박의준이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했다. 김진석 대표와 회의실에서 단둘이 미팅을 하게 됐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고?”

“시나리오 쓰느라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이제는 제작 단계에 돌입해야 하니 더 바쁘겠지만요.”

“오늘 미팅을 요청한 건, 네가 『90일』의 메가폰을 잡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서야.”

“안시현 배우님이 걱정돼서는 아니고요?”

“그 부분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지.”

박의준 감독의 날카로운 질문에, 김진석 대표는 흔쾌히 인정했다.

그가 박의준 감독을 도우려는 건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다. 핵심 배우 중 한 명인 안시현의 필모그래피가 망가지는 걸 바라지 않아서였다.

“시나리오는 잘 봤다. 분명 좋은 대본이고, 우리 배우 중에서도 몇 명이 오디션에 지원할 의사를 밝혔어. 다만…… 시나리오가 좋다고 해서 결과물이 좋을 거라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내 솔직한 입장이다.”

『90일』의 시나리오는 김진석 대표의 눈으로 볼 때도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훌륭했다. 예술영화라는 걸 감안해도 어느 정도는 흥행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그것은 시나리오만 봤을 때의 이야기다.

박의준은 메가폰을 잡아 본 경험이 없다. 심지어는 제작 현장을 경험해 보지도 않았다. 연극의 제작 현장을 경험해 본 게 사실상 전부다.

시나리오와 별개로 박의준이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김진석 대표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다.

“시현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녀석이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건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모든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 영향이 꽤나 커. 그리고 난, 시현이가 이번에도 성공하기를 바란다.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싶지 않거든.”

만약 김진석 대표가 여전히 현역이었다면 새로운 도전을 위한 안시현의 선택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태도를 취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이제 배우가 아닌 한 회사의 대표다.

그의 입장에서는 안시현이 예술영화에 출연해 흥행보증수표라는 이미지를 망치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배우가 하고 싶어 하는 작품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그의 스타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90일』이 흥행보증수표 안시현의 이미지에 흠집 가지 않을 수준으로 흥행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그리고, 곽 고문이 개인적으로 널 가르쳐 주고 싶다 말하기도 했고 말이야.”

“……곽상필 감독님께서요?”

“네가 자기처럼 될 가능성이 보인다나 뭐라나. 뭐, 그건 둘이 알아서 잘 이야기해 봐. 난 자리만 만들어 주고 빠질 테니까.”

다행히 김진석 대표는 『90일』의 흥행과 관련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시나리오를 본 곽상필이 박의준 감독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며 먼저 미팅을 요청했으니까.

『90일』의 제작까지는 아직 수개월이 남았다.

곽상필이라면 그동안 박의준 감독을 그럴듯한 감독으로 만들어 줄 가능성이 높았다.

“감독, 계속할 거지?”

“제 꿈입니다. 그러려고 보장된 미래도 포기했고요.”

“그럼 이번 기회 놓치지 마. 이건 시현이를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널 위한 일이기도 해. 정수 걱정 그만 시키고 감독으로서 떳떳하게 자리 잡아야지?”

“네. 매형에게 신세 그만 져야죠.”

박의준 감독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곽상필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찾아오기 힘든 기회임을 말이다.

*   *   *

박의준 감독이 곽상필로부터 감독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배우기로 결정했을 그때.

안시현은 대학로를 방문해 있었다.

그는 김치찌개 집에서 극단 광대들의 배우 몇 명과 식사를 하면서 슬쩍 『90일』의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웬 시나리오?”

“제 차기작이에요.”

“아아, 정수 형님 처남 거? 정수 형님 말 들어 보니까 시나리오 잘 뽑혔다던데?”

“네. 11월 말부터 공개 오디션 진행할 예정이에요.”

“캐스팅 제안은 안 하고?”

“공개 오디션만으로 뽑기로 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시나리오 읽어 보고, 마음에 드시는 분들 있으면 공개 오디션에 참여해 주셨으면 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순간 배우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들 모두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진출할 수 있음에도, 오랜 시간 광대들에 남아 최정수와 함께 무대를 지키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찌 보면 연극 무대를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건드는 발언일 수도 있는 상황.

다른 사람이었다면 화부터 냈을 거다.

그들이 기특하게 생각하는 안시현이 도와 달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꺼냈기에 표정이 굳는 데에서 그친 거다.

정작 이야기를 꺼낸 안시현은 무덤덤했지만 말이다.

“시현아, 우리가 무대에 대한 애착이 큰 거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들 모두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스크린과 브라운과 진출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까.”

“잘 알고 있네. 우리가 부자는 아니지만 처자식들 먹여 살릴 만한 돈은 벌고 있고, 대출금도 착실하게 갚고 사는 중이야. 무엇보다 무대가 너무 좋아서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이해합니다.”

“그런데도 도와 달라고? 차라리 인지도 있는 배우들에게 캐스팅을 제안하지 그러냐?”

“선배님들이 꼭 맡아 주셨으면 하는 배역이 있어요.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을 거고요. 일단 검토라도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해 주세요.”

배우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안시현이 건넨 시나리오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고민한 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시나리오를 손에 쥐었다.

“정수 형님에게 들어서 어떤 배역인지 대충 알겠다. 작정하고 리얼리티를 살려 보시겠다?”

“뭐…… 한 작품 정도라면, 그것도 네가 주연을 맡은 예술영화에다가 출연 분량이 많지 않으면 고려해 봐도 나쁘지는 않겠지.”

“간만에 스크린에 얼굴 좀 비추겠네. 딸내미 데리고 영화관 갈 명목 생겨서 좋다 야.”

“일단 검토하고 답해 줘도 되지?”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천천히 검토해 보고 말씀해 주세요.”

안시현은 확신했다.

『90일』의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순간, 광대들의 터줏대감들이 흔쾌히 공개 오디션 참여 의사를 밝힐 것이라고 말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안시현이 다시 한번 대학로를 방문했다.

무대 설치를 돕기를 몇 시간, 마침내 공개 오디션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시나리오 좋더라. 역할도 마음에 들고. 합격 여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디션에 참여는 해 보마.”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감사하면 한턱 쏴라.”

“오늘 저녁은 제가 풀코스로 대접하겠습니다.”

“1차는 김치찌개에 소주, 2차는 파전에 막걸리.”

“흐흐흐. 마음껏 드십시오.”

안시현이 『90일』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 하나를 충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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