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7화>
137화. 힘을 빼고
지난 몇 달.
안시현은 『칠전팔기』 당시 비약적으로 늘렸던 근육량을 일반인 수준으로 줄여 나갔다.
근육량이 줄며 딱 안시현의 키에 어울리는 평범한 수준의 몸매를 만든 뒤로는, 최봉팔이 지시한 대로 가볍게 아침 운동만 하면서 현상 유지를 하는 데에 집중했다.
‘근육을 늘리는 것보다 없애는 게 더 힘들 줄이야.’
회귀 이후 안시현은 철저하게 몸 관리를 해 왔다.
그 좋아하던 담배를 완전히 끊고, 술 또한 정혜영과 간혹 와인을 마실 때를 제외하면 입조차 안 댔으며, 주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을 만큼 몸 상태를 신경 썼다.
또한 웬만해서는 아침 운동을 빼먹는 법이 없었고, 『칠전팔기』 이후로는 근육량까지 늘며 운동에 자신감이 붙다 보니 더욱 매진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근육량을 늘리는 것보다 줄이는 게 오히려 몇 십 배는 더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의 발목을 잡은 건 건강에 대한 강박증이었다.
췌장암으로 인해 좋아하는 연기를 마음껏 하지 못했던 회귀 전의 기억이 잊을 만하면 떠올랐고,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몸 관리에 만전을 기했다.
근육량이 일반인 수준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는 건 아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불안했고, 수차례 건강 검진을 받으며 불안함을 해소하면서 어렵사리 근육량을 줄이는 게 가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박의준 감독이 한노을을 병마에 맞서 싸우며 괴로워하는 캐릭터로 그리려고 했다면, 안시현은 감량을 통해서 마른 몸매를 만들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박의준 감독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그동안 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경험해 보기 위해 노력하는 당당한 한 남자의 900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따라서 과도한 감량은 필요하지 않았다.
‘크랭크업 하자마자 다시 몸 만들어야지. 몸 상태에 변화를 줘야 하는 배역은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만하자. 정신적으로 좀 버겁네.’
촬영이 마무리되자마자 다시 운동에 박차를 가할 거라고 다짐하며,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배우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노을 역을 맡게 된 배우 안시현입니다. 익순한 분들도 계시고, 초면인 분들도 계시네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트러블 없이 크랭크업 하는 겁니다.”
지금껏 안시현은 촬영 현장에서 배우나 스태프들과 트러블을 겪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있다고 해 봐야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류성웅이 시비를 게 전부인데, 그 정도야 분위기가 살벌한 현장에 비하며 애교 수준이다.
주연 배우들끼리 얼굴을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해서 아예 따로 촬영을 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안시현은 좋은 촬영장의 분위기가 곧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배우다. 때문에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최대한 좋은 현장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행히 줄곧 좋은 사람들과 작품을 하다 보니 현장 분위기가 나빠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안시현은 『90일』 또한 훈훈한 분위기 속에 크랭크업을 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안시현의 자기소개 후.
배우들이 순서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배우는, 간호사 최주은 역을 맡게 된 양소라였다.
‘최주은 역 오디션을 본 배우 중에서 가장 연기가 깔끔했어. 괜히 훗날 주연급 여배우로 발돋움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몸소 보여 줬지.’
훗날 주연급 여배우로 성장하게 될 그녀는 극 중 비중이 제법 큰 배역인 최주은 역을 당당히 거머쥐었다.
박의준 감독의 의도를 100% 간파한 캐릭터 해석이 인상적이었고, 연기력 또한 제법 안정되어 있었기에 캐스팅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녀 외에도 몇 년 후부터 브라운관과 스크린에 자주 얼굴을 비출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됐다.
원톱인 안시현의 비중이 워낙 높기에 크게 눈에 띄지는 않겠지만…….
그들에게는 그 기회마저도 절실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수개월의 준비를 통해 오디션을 본 양소라와 광대들의 터줏대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무명 배우들이었다.
연기는 괜찮으니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은, 인지도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연기력만을 기준으로 판가름을 한 덕에 오디션에서 합격할 수 있었다.
안시현은 그들이 『90일』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긴 무명 생활을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랐다.
배우들의 자기소개가 모두 끝난 뒤.
마지막으로 박의준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봉 감독 박의준입니다. 다들 기사를 통해 접하셨다시피 최정수 배우님께서 제 매형입니다. 그래서 단역으로나마 출연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고요.”
“최정수 선배님께서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뭐…… 그건 부수적인 문제라 생각합니다. 대본 리딩을 앞두고 배우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건 단 하나입니다. 의견 제시도 좋고, 불만이 있다면 말씀해 주셔도 좋습니다. 단, 감독의 영역을 침범하는 분은 용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입봉 감독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를 직접적으로 날린 뒤, 박의준 감독이 슬쩍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릴 분이 계십니다. 들어오시겠어요?”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를 본 배우들의 두 눈이 커졌다. 어떤 배우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감, 감독님!”
“감독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독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칭송받는 곽상필이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까.
은퇴했다지만 그의 명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은퇴한 후에 JM액터스의 자체 제작 영화 및 드라마가 계속해서 흥행하며 명성이 더더욱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무명 배우들에게 있어, 곽상필은 눈을 마주치기조차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정작 곽상필은 자신을 보고서 당황하고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는 배우들이 부담스러웠지만 말이다.
“허허허. 은퇴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감독이에요. 박 감독님을 도우려고 온 거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환대해 주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럼…… 『90일』 제작에 곽 감독님께서도 참여해 주시는 겁니까?”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겁니다.”
당초 곽상필은 촬영 전까지만 박의준 감독을 도와주려고 했지만, 막상 이것저것 가르치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박의준 감독의 성장세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에 곽상필은 『90일』이 크랭크업을 할 때까지 박의준 감독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것 또한 감수하기로 했다.
그만큼 그는 박의준 감독이 마음에 들었다.
“현장에 복귀하는 건 아닙니다. 제 마지막 작품이 『편지』라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 다만, 입봉 감독의 부담을 조금 덜어 주기 위한 조언자 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곽상필까지 소개를 끝마친 뒤.
10분 정도 숨 돌릴 시간을 가진 뒤에야 비로써 첫 대본 리딩이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박의준 감독과 곽상필은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여 줬다.
“아직 캐릭터 완성이 덜 된 건가요?”
“아…… 네. 죄송합니다. 출연하던 연극이 한 달 전에 마무리돼서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한 달 남았는데 괜찮겠어요?”
“크랭크인 전까지는 완성하겠습니다.”
“으음. 네, 부탁드릴게요.”
박의준은 아쉬운 모습이 엿보이는 배우들에게 쓴소리를 하는 역할을 맡았다. 혹여나 입봉 감독이라고 얕잡아 볼 수도 있는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안목이 부족하다면 비웃음을 살 수도 있건만…….
그 어떤 배우도 박의준 감독을 무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듣고서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몇몇 배우는 감사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정확한 안목을 바탕으로 배우들에게 피드백을 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곽 고문님께서 작정하고 도와주셨나 보네.’
현장 경험이 없는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에 냉철한 피드백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시간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봐야 안목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박의준 감독은 단시간에 훌륭한 안목을 갖추고 와서 배우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몇 달 동안 박의준 감독이 곽상필과 함께 얼마나 노력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박의준은 죽어라 노력했다.
부족한 현장 경험을 메이킹 필름을 보고 피드백을 하는 식으로서 채워 나갔다. 다수의 작품을 보며 장점과 단점을 명확하게 파악을 과정을 거쳤다.
『90일』의 제작을 준비하면서 부족한 현장 경험을 간접적으로 보충해야 했기에, 하루에 3~4시간 자는 게 전부일 정도로 지난 몇 달을 바쁘게 보냈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만큼은 뿌듯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입봉 감독이라고 무시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고생했어요.”
대본 리딩 이틀 전.
곽상필로부터 감독으로서의 자질을 일정 부분 인정받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곽상필이 크랭크업 때까지 조언을 해 주겠다고 자처했으니, 박의준 감독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선의 결과였다.
“연기 좋네요. 무대 경험이 꽤 있나 봐요?”
“네! 6년째 오디션 보면서 무대에도 서고 있습니다!”
“무대 연기와 카메라 앞에서 보여 줘야 할 연기가 소폭 다르다는 걸 이해하게 되면, 앞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겁니다.”
정곡을 찌르며 필요한 말만을 하는 박의준 감독과 달리, 박상필은 배우들의 장점과 단점을 고루 말하면서도 응원을 하는 데에 힘썼다.
박의준 감독이 채찍이라면, 곽상필은 당근이었다.
‘곽 고문님이 칭찬하는 쪽이 효과가 더 크긴 하지. 선택 잘했네.’
안시현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흐뭇한 마음으로 대본 리딩을 지켜보았다.
첫 대본 리딩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박의준 감독 혼자였다면 입봉 감독이기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곽상필이 함께해 주면서 보완해 줬다.
그리고 이 분위기는 크랭크업 때까지 줄곧 이어질 가능성이 꽤나 높았다.
다들 성공에 목이 말라 있는 이들이다.
무명 배우이기에 겪는 서러움과 성공에 대한 욕심은 안시현이 가장 잘 알고 있다. 회귀 전, 20대 전체를 무명 배우로 지내지 않았던가.
당초 무명 배우들이 기댈 만한 언덕은 안시현이라는 톱배우가 원톱이라는 것, 박의준 감독의 매형이 최정수라는 것 정도였다.
거기에 곽상필이라는 거물이 더해지게 됐다.
어떤 식으로든 『90일』이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연기만 잘한다면 관심을 발판 삼아 배우로서 입지를 다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지긋지긋한 무명 생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라도 다들 죽어라 노력하리라.
대본 리딩 막바지.
마침내 안시현의 차례가 다가왔다.
“마지막은…… 신 5입니다. 바로 갈까요?”
“전 스탠바이 완료입니다.”
“저도 쉬었다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바로 가도록 하죠.”
신 5는 정기 건강 검진에서 이상 소견이 발견된 뒤, 추가 검사를 통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게 된 한노을의 모습을 그린다.
의사 역할을 맡은 배우의 대사 비중이 꽤나 많긴 하지만, 그보다는 병마를 받아들이는 한노을의 마음가짐이 드러나야 하는 신이다.
다시 말해 안시현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제는 신 5뿐만 아니라, 『90일』이라는 영화 자체가 안시현에 대한 의존도가 극도로 높다는 것.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며 다양한 감정 표현을 보여 줘야 하는 안시현을 바라보는 배우들의 눈빛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과연 어떤 연기를 보여 줄까? 지금껏 보여 준 연기와 명성에 걸맞게 명불허전일까?
기대감이 한껏 부푼 가운데 시작된 대본 리딩.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어떻게 참으셨습니까? 아무리 췌장암이라도 이 정도면 증상이 있었을 텐데…….”
“수술이나 항암 치료를 받으면, 완치할 수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어렵습니다. 이미 암세포가 다른 장기와 뼈로도 전이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호전이 아니라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안시현의 대사를 듣는 배우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힘을 빼고 툭툭 내뱉듯이 대본 리딩을 한다라…….’
안시현은 이전과 달리 전력을 다하지 않고, 쓱 훑어본다는 느낌으로 대본 리딩에 임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