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8화>
138화. 무슨 일이지?
안시현은 매번 작품을 할 때면 대본 리딩 때부터 작정하고 연기를 펼쳐서 지켜보는 이들을 연달아 감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크랭크인에 들어가면 힘이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기도 했다.
안시현이 대본 리딩 때부터 힘을 주는 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회귀 전 무명 시절에 생긴 습관 탓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감독과 PD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대사 한 마디라도 늘리고 카메라에 1초라도 더 잡히기 위해 이를 악물던 시절.
그때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크랭크인에서 힘이 빠진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기에, 안시현은 대본 리딩 스타일에 변화를 줄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했었다.
『편지』의 대본 리딩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말이다.
안시현은『편지』의 대본 리딩을 순조롭게 마무리하고서, 곽상필로부터 조언을 들은 뒤 변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안 배우, 대본 리딩 때부터 힘을 주고 연기하는 이유가 있나요?”
“아, 그게…… 대본 리딩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제 자리가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있어서요.”
“네? 심각한 스캔들이라도 터지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거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이 영 안 따라 주네요.”
“결국에는 극복해야 할 문제예요. 배우로서 더 성장하고 싶다면요.”
“아하하. 정곡을 찌르시네요.”
안시현은 배우로서 더더욱 성장하고 싶었다.
문제는 연기력의 상승은 노력한다고 해서 마음처럼 손쉽게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실제로 안시현은 『편지』와 『칠전팔기』를 촬영하면서 연기력만 놓고 보면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기에 곽상필의 조언을 받아들이게 됐다.
연기력에서 발전할 만한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면, 대본 리딩에서 힘을 아끼고 크랭크인 이후에 모든 걸 쏟아 내는 방식으로 발전을 꾀하고 싶었다.
『칠전팔기』에서 변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몸에 밴 습관을 대번에 바꾸기란 마음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칠전팔기』에서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각고의 노력 끝에 『90일』을 준비하면서 어렵게 힘을 빼는 방법을 익히게 됐다.
그 모습을 보며 곽상필은 흐뭇함을 느꼈다.
‘허허허. 결국 내 조언을 받아들였구나. 쉽지 않았을 텐데…… 역시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 준다니까.’
자신의 조언이 안시현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에 내심 뿌듯했다.
* * *
대본 리딩에서 안시현이 힘을 빼고 툭툭 내뱉듯이 연기를 함에도, 그 어떤 배우도 거기에 불만을 토로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주연 배우들 중에서는 대본 리딩에서는 가볍게 점검만 하고, 크랭크인 이후에 전력을 다하는 이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지금껏 대본 리딩 내내 힘을 주고 연기했던 게 오히려 이상했던 거고, 힘을 빼고 점검을 하는 지금 모습이 자연스러운 거라고 봐야 했다.
그렇게 첫 번째 대본 리딩이 순조롭게 마무리됐다.
『90일』의 첫 회식 자리.
대다수의 배우들이 안시현과 광대들의 터줏대감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대다수의 배우들이 흥행보증수표인 안시현이 원톱이라 『90일』의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졌다. 『90일』의 시나리오가 좋아서 오디션에 응한 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안시현이 아니었다면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거다.
또한 『90일』의 출연 배우들 중 대부분은 연극 무대 출신이다. 그들에게 있어 오랜 시간 무대를 지키고 있는 광대들의 터줏대감들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혹시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되는 분 계세요?”
“다음 주 수요일이면…… 저 한가해요.”
“저도 시간 될 것 같은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가평 들렀다가 놀이공원 좀 다녀오려고요. 혹시 같이 가실 분 있나 해서요.”
“아아, 버킷리스트요?”
“네. 경비는 모두 제가 지불할 거고, 겸사겸사 맛집도 몇 군데 들르려고 합니다. 같이 가실 분 있으면 번호 교환하죠.”
『90일』은 한노을이 90일 동안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이뤄 가는 걸 조명하는 영화다.
즉, 버킷리스트가 영화의 핵심이다.
버킷리스트를 달성할 때마다 한노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이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니까.
안시현은 캐릭터 구축과 근육량 감소를 하면서, 한노을의 버킷리스트를 미리 체험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덕분에 대부분의 버킷리스트를 미리 체험할 수 있었다.
체험하지 못한 버킷리스트는 북유럽 여행, 그리고 번지점프와 하루 종일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 타기가 사실상 전부였다.
북유럽 여행의 경우 대본 리딩에 돌입한 지금 상황에서는 일정을 잡는 게 어렵기도 하고, 회귀 전에 가 본 경험이 있기에 괜찮을 거라고 봤다.
따라서 나머지 두 개만 경험하면 되는 상황.
‘혼자서 해도 되지만…… 시간 되는 사람들하고 함께 가서 의욕 좀 고취시켜 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사실 버킷리스트 체험을 같이하자는 건 배우들과 친해지기 위한 핑계였다.
무명 배우라는 생각 때문일까?
대다수의 배우들이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의 눈치를 많이 살폈다. 말 한 마디를 할 때도 조심스러워하는 게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안시현은 그들을 보며 회귀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긴 무명 시절을 겪으며 자신감을 상실했고, 한때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기 바빴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이겨 냈기에 마침내 조연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에 성공했다.
배우들의 태도가 그때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지나치게 눈치는 보는 게 마음이 쓰여 그냥 놔둘 수 없었다.
‘배역을 만들어 주거나 대사를 늘려 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줄 순 있겠지.’
* * *
번지점프, 그리고 하루 종일 회전목마 타기.
두 버킷리스트 중 전자는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안시현은 『90일』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 두 명과 번지점프 체험을 했으며, 가평의 한 맛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서 용인의 놀이공원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하루 종일 회전목마 타기는 실패했다.
평일 낮 시간대에 놀이공원에 왔음에도 인파가 제법 있었고, 그 인파들이 안시현을 보기 위해서 주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회전목마를 네 번째 탔을 때, 함께 온 배우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안시현에게 속삭였다.
“선배님, 저 이렇게 관심받아 본 거 처음이에요.”
“저도요. 와, 긴장돼서 쳐다보지도 못하겠어요.”
“이 길을 계속 걸으려면 익숙해져야지. 정 부담스러우면 적당히 하고 나갈까?”
“저희야 그러면 좋긴 한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한 번만 더 타면 될 것 같아.”
안시현이 다섯 번째로 회전목마를 탔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배우들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한노을은 회전목마를 타면서…….’
한노을의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직접 해 보면서, 안시현은 한노을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생각하며 감정 이입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양한 버킷리스트를 실천하며 그때마다 다른 감정을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 만큼, 사전 체험이 크랭크인 후의 연기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번지점프를 할 때.
한노을은 고소 공포증이 심하지만, 어차피 몇 달 후에 죽을 거 이 정도도 못하겠냐는 심정으로 뛴다.
회전목마의 경우는 번지점프와 감정이 전혀 달랐다.
미래를 약속했지만 일에만 매달리느라 소홀했고, 결국 그런 한노을을 감당하지 못한 채 이별을 선언했던 연인이 늘 놀이공원에 가자는 입에 달고 살았었다.
헤어지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노을은 놀이공원을 찾았다.
그리고 곧장 난관에 부딪혔다.
놀이기구를 타 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어떤 놀이기구를 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한노을의 선택은 어린아이들 외엔 좀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는 회전목마였다.
그는 오전에 타기 시작해서 놀이공원이 폐장할 때까지 회전목마만을 타다가, 폐장할 시간이라며 다가온 작원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쉬운 걸 왜 진작 못 해 줬을까 후회하며 말이다.
다섯 번째 회전목마를 타는 순간, 안시현은 이미 완성이 끝난 한노을 캐릭터에 잠시나마 몰입했다. 크랭크인 후에 제대로 된 감정 표현을 해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잠시 후.
안시현을 지켜보던 인파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안시현 우는데?”
“무슨 일이지? 회전목마 잘 타다가 갑자기 왜 울어?”
“혹시 우리 때문인가?”
“에이. 이 정도 인파야 일상일 텐데 그럴 리가 있나. 게다가 우린 사인 요청도 안 하고 보기만 했잖아.”
회전목마를 잘 타던 안시현이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 * *
안시현의 때아닌 눈물로 인해 사람들이 당황한 것과 달리, 함께 온 두 배우는 안시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 어떻게 그 짧은 사이에 몰입을 할 수가 있지? 심지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역시 괜히 성공한 배우가 아닌가? 선배님처럼 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걸까?’
안시현은 다수의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불과 몇 십 초 만에 캐릭터에 몰입하고서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 다 배우이기에 알 수 있었다.
방금 전 안시현이 보여 준 연기는 자신들의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대단했다는 걸 말이다.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캐릭터에 몰입한다는 건, 말이야 쉽지 웬만큼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도 단시간에 해내는 건 어렵다.
심지어 안시현은 거기에 눈물까지 흘렸다.
미친 연기력이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모습이었다.
놀이동산에서 나온 뒤.
근처 식당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두 배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안시현에게 말했다.
“놀이공원에서 보여 주신 연기, 인상 깊었습니다.”
“너무 칭찬하지 마, 목에 힘 들어간다. 나중에 써먹어야 하니까 잠깐 감정 이입해 본 게 전부야.”
“그걸 몇 십 초 만에 해내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선배님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저희, 선배님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안시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하루 종일 같이 돌아다닌 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두 배우는 대본 리딩 당시 눈치를 살피던 것과 달리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출연 분량 자체는 많지 않다.
한 명은 대사 20마디 정도, 다른 한 명은 30마디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어려운 분량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할 분량도 아냐.’
『나는 간첩입니다』 당시 안시현의 대사는 도합 55마디로, 조연 중에서는 가장 대사가 적었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나는 간첩입니다』에 출연한 조연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성공적으로 데뷔를 할 수 있었다.
배우에게 있어 출연 분량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출연 분량이 부족하더라도 극 중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배우가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해석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안시현은 별다른 조언을 하지 않았다.
두 배우 다 무대 출신이라는 자신감이 있고 연기력도 제법 괜찮지만,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며 자신감을 상실한 상태였다.
자신감만 가진다면 『90일』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줄 가능성이 높았다.
“죽어라 노력하면 반드시 그 보상을 받을 거야. 난 항상 그렇게 믿으면서 연기하거든.”
“명심하겠습니다!”
“저희도 죽어라 노력하겠습니다, 선배님! 혹시 가능하다면…… 저희랑 같이 연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파트너 있으면 나야 좋지. 스케줄 맞춰 보자.”
북유럽 여행을 제외한 모든 버킷리스트의 체험을 마무리한 안시현은, 덩달아 크랭크인 전까지 함께 연습을 할 파트너 두 명을 얻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