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39화>
139화. 인정합니다
한노을은 안시현이 지금껏 맡았던 배역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캐릭터성을 지녔다.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이뤄 나가면서 겪는 다양한 감정들을 표현해야 한다.
어떤 감정은 몇 분, 어떤 감정은 몇 초, 또 어떤 감정은 편집을 통해 아예 생략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안시현은 촬영을 하면서 모든 버킷리스트에 어울리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사전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한노을은 전형적인 워커홀릭이다.
일에 미쳐 산 덕분에 30대 초반의 나이에 그럴 듯한 마케팅 업체의 대표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췌장암으로 인해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된 남자다.
직접 버킷리스트를 체험해 보고 한노을이 느꼈을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크랭크인을 하더라도 제대로 몰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회귀 전 경험해 봤던 북유럽 여행을 제외한 모든 버킷리스트를 체험해 본 이후, 안시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본 리딩에 임했다.
함께 연습할 파트너들도 생겼으니 연습에 한결 탄력이 붙게 된 상황.
“으음. 선배님, 방금 제 감정 표현 조금 어색하지 않았어요?”
“표현 자체는 괜찮았는데, 한노을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것 같긴 했어. 네 배역에만 너무 몰두하지 말고 이때 한노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떤 감정일지를 조금 더 생각해 봐.”
“한노을의 생각이라…….”
박의준 감독은 완벽주의자다.
그런 그의 성향은 곧 배우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대본 리딩을 하며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곧장 배우들에게 피드백을 해 줬고, 배우들은 피드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게 됐다.
안시현과 연습을 하게 된 두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박의준 감독으로부터 피드백을 받았고, 크랭크인 전까지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서 연습을 하며 시도 때도 없이 안시현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에 안시현은 흔쾌히 조언을 해 줬다.
열정이 넘치는 후배 배우들을 위해서라면 조언 정도야 지겹도록 해 줄 의향이 있었다.
대본 리딩이 없는 날.
오전에 시작한 연습은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됐다. 안시현은 연습이 끝나면 후배 배우들에게 저녁 식사로 든든하게 고개를 사 먹였다.
“잘 먹겠습니다, 선배님!”
“요즘 선배님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연습실도 좋고, 저희 식사까지 챙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꼭 성공해서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은 됐고, 꼭 성공해라. 나중에 인터뷰에서 잊지 말고 내 이름이나 한번 언급해 줘. 그러면 돼.”
“네! 명심하겠습니다!”
“너희, 평소에 연습 어디서 했어?”
“극단 창고, 옥탑방, 아니면 노래방에서 했습니다. 노래방은 보통 작품 들어가기 직전에만 몇 번 갔습니다. 아무래도 돈이 들다 보니…….”
“이하 동문입니다.”
두 후배의 연습 환경에 대해 듣게 된 안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니까.”
“아, 맞다. 선배님도 데뷔 전에 김진모 선배님과 옥탑방에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나 같은 경우는 옥탑방에서 연습하다가, 새벽에 극단에서 연습한 적도 많고, 중요할 때는 한 끼 굶는다 생각하고 통장 잔고 싹싹 털어서 노래방에서 연습했어. 그러면 노래방 아주머니가 밥 먹고 하라면서 라면 끓여 주셨지.”
안시현이 회귀 전 무명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후배 배우들의 고충에 공감했다.
연습실을 제공하고 식사를 사 주는 거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연기가 좋아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겨 내며 연기에 매진하고 있는 후배들이 『90일』을 통해 조금이나마 주목받는 것이었다.
‘조언을 받아들이는 거 보면 재능이 없는 건 아니야. 제대로 된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던 거겠지.’
두 배우가 신 스틸러 역할을 할 가능성은 낮다.
애초에 『90일』 자체가 철저하게 한노을의 행보만 조명을 한 영화다. 다른 배역들의 경우 한노을을 받쳐 주는 선에서 역할이 한정된다.
『나는 간첩입니다』의 리수철처럼 신 스틸러 역할을 할 만한 상황 자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연기력을 인정받기 힘든 건 아니다.
예술영화이긴 하지만 안시현을 원톱으로 내세웠다. 마케팅비도 꽤나 편성했기에 대중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 끌어낼 수 있을 거다.
이번에 좋은 연기를 보여 준다면 최소한 지긋지긋한 무명 생활에서 벗어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따라잡히지 않게 노력해야겠어.’
혹여나 배우들 중 누군가가 기대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 주며 존재감을 뿜어낸다면? 그로 인해 한노을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묻히게 된다면?
철저하게 한노을 위주로 흘러가야 하는 『90일』의 방향성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고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배우들에게 한노을의 존재감이 묻히니 살살 할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방법은 하나였다.
단 한 신도 빼놓지 않고, 실종일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그를 위해 안시현은 극 중 캐릭터의 버킷리스트를 직접 체험해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연습에 매달렸다.
그리고 크랭크인 5일 전.
“너희, 계속 여기서 연습하고 싶지?”
“염치없는 거 알지만, 가능하다면 크랭크인 전까지 계속 신세 지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매니저 형한테 연습실 편하게 쓸 수 있도록 내가 말해 놓을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연습 더 안 하십니까?”
“크랭크인 전까지는 좀 쉬려고. 그사이에 잡아 놓은 약속도 몇 개 있고 말이야.”
“그럼 크랭크인 날 뵙겠습니다!”
안시현은 연습 중단을 선언했다.
연습으로 얻어 낼 수 있는 선에서는 이미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기에, 이제는 휴식을 취하며 만전을 기할 생각이었다.
다음 날.
안시현이 JM액터스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요?”
“아, 프랑스어 강의 영상 좀 보고 있었어요.”
“갑자기 웬 프랑스어? 해외 진출이라도 하려고요?”
“아하하. 아뇨. 필요한 데가 좀 있어서요. 그나저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미팅 안 해 준 거 빼면 잘 지냈죠.”
김희숙 작가가 카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칠전팔기』의 크랭크업 이후,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에게 두 차례 미팅을 요청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정중하게 거절을 당했다.
배우로서의 미래를 위해 휴식기를 가질 거라고, 다시 연기를 할 준비가 되면 연락을 주겠다면서 말이다.
그로부터 꼬박 1년 후.
이번에는 안시현이 먼저 김희숙 작가에게 미뤄 두었던 미팅을 하자고 요청했고, 『90일』의 크랭크인 며칠 전에 만남을 가지게 됐다.
“이렇게 만나 주시는 거 보면, 연기에 대한 고민은 어느 정도 끝나셨나 보네요?”
“네. 이제 다시 앞만 보고 달리려고요.”
『칠전팔기』이후의 휴식기 동안 안시현은 대본 리딩에서 힘을 빼는 것뿐만 아니라, 배우로서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철저하게 마음에 드는 작품들 위주로 연기하자고, 언제 어느 순간 연기를 그만두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자하고 말이다.
그래서 김희숙 작가와의 미팅을 하게 됐다.
김희숙 작가가 굳이 자신에게 미팅을 요청할 만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혹시 늦은 건 아니죠?”
“솔직히 말하자면…… 타이밍 아주 좋았어요. 이제 곧 준비가 끝날 것 같거든요.”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럼 1년 전부터 미뤄 뒀던 본론을 다시 꺼내 볼까요? 제 차기작, 함께해 주실 수 있겠어요?”
김희숙 작가의 질문에 안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함께해요.”
너무나도 흔쾌한 대답에 오히려 김희숙 작가가 당혹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게…….
김희숙 작가는 대부분의 미팅이 그러하듯 안시현이 대본을 보고 어떤 배역인지 확인한 뒤에 답을 해 줄 거라 생각하고서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헌데 안시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대답부터 하고 봤다.
“질문한 사람이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대본도 안 보고 배역도 안 따지고 결정해도 돼요?”
“믿고 보는 김희숙 작가와 흥행보증수표의 만남인데, 고민할 필요 있겠어요?”
지난 몇 년.
김희숙 작가는 집필하는 작품마다 대박을 쳤다.
도합 세 작품 중 두 작품이 최고 시청률 40%를 돌파했고, 나머지 한 작품은 2004년에 최고 시청률 57.5%를 기록하며 역대급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제 김희숙 작가는 대본을 집필하기도 전에 방송사에서 모셔 가려고 안달이 난 거물이 됐다.
실제로 그녀의 차기작은 STS에서 시놉시스만을 보고 역대 최고 대우로 계약을 체결해 놓은 상황이다.
역대 최고 대우를 받는 드라마 작가와 데뷔 후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흥행보증수표 배우의 만남.
안시현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김희숙 작가님은 한 번 주연을 맡겼던 배우와 다시 작업하지 않기로 유명했지. 예외가 있다면…… 이미 한 번 작업을 한 배우에게 100% 어울리는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 정도?’
김희숙 작가가 자신에게 먼저 캐스팅 제안을 한 거라면, 그에 어울리는 대본과 캐릭터를 준비해 놨을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믿고 보는 작가와 흥행보증수표의 만남이라…….”
안시현이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던 김희숙 작가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고민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사실 전 웬만하면 한 번 작업을 했던 주연 배우와는 다시 작업하고 싶지 않았어요. 드라마를 통해 최대한 다양한 색을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작품은 시현 씨가 반드시 주연 중 한자리를 맡아 줬으면 좋겠어요.”
“출연 계약서는 천천히 쓰고, 일단 대본이랑 캐릭터 확인부터 해도 될까요? 작가님이 어떤 캐릭터를 저에게 맡길지 궁금해서 미치겠거든요.”
“그럴 줄 알고 외장하드에 저장해 왔어요.”
“지금 바로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저에게 맡길 캐릭터 이름이 뭔가요?”
“다니엘 킴이요.”
안시현이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이내 대본이 저장되어 있는 폴더를 열고서, 김희숙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해 온 대본을 확인해 나갔다.
30분 후.
“…….”
안시현이 노트북을 껐다.
대본을 일부 확인하고 자신이 맡아야 할 캐릭터에 대해 파악했지만, 그럼에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않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10분 뒤.
안시현이 턱을 매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시련을 주시기 있습니까? 이거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캐릭터인데요?”
“전 시현 씨라면 잘 소화해 줄 거라고 믿어서요. 그리고…… 마냥 쉬운 것보다는 난이도가 있는 쪽이 조금 더 재밌지 않겠어요?”
안시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작품을 같이해 봤고, 그 후로도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분을 유지했기 때문일까?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의 성향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다니엘 킴 캐릭터는 안시현의 입장에서 봤을 때 난이도가 어렵다. 오히려 그래서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어려운 걸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게 사실이었다.
“인정합니다. 어려우면서도 재밌을 것 같네요.”
안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김희숙 작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계약서는 내일, 대표님과 식사하면서 쓰시죠. 출연료는 뭐…… 알아서 잘 챙겨 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시현 씨가 출연한다는 걸 STS 쪽에서 알게 되면, 없던 돈도 끌어모아서 퍼 주려고 난리가 날 걸요? 시현 씨로 인해서 붙는 광고의 수와 단가 차이를 생각하면, 출연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예요.”
다음 날 다시 만나서 출연 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한 채 미팅은 1시간여 만에 마무리가 됐다.
그날 저녁.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