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0화>
140화. 그 대신
“대표님, 이것 좀 봐 주시겠어요?”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를 만나자마자 미리 인쇄해 온 대본을 건넸다.
김진석 대표는 대본의 정체를 대번에 간파했다.
“김희숙 작가님 차기작?”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네가 김희숙 작가님을 만나러 간다고 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이따가 김희숙 작가님 오시기로 했는데, 오늘 바로 출연 계약서 써도 될까요?”
“안 될 게 뭐 있겠어. 회사 입장에서는 네가 김희숙 작가님 차기작에 출연한다고 하면 싫어할 이유가 없지.”
지금 상황에서 김희숙 작가만큼 성공이 보장된 드라마 작가는 없다. 괜히 STS에서 최고 대우를 해 주며 시놉시스만 보고서 계약을 체결한 게 아니다.
안시현이 출연한다면 어느 정도의 흥행성을 확보하고 가는 거니 JM액터스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김진석 대표의 관심사는 전혀 다른 데에 있었다.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앞으로 절대 다작은 안 할 것 같더니, 영화 촬영 끝나자마자 드라마 촬영하게 생겼는데? 그사이 마음이 바뀌었어?”
“다들 절 가만 놔두질 않네요. 그리고 다작을 선호하지는 건 여전하지만, 좋은 시나리오와 대본이 있을 때 한정으로 바쁜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안시현은 다작을 선호하지 않는 배우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건 사실이지만 다작을 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되도록 한 작품을 한 뒤에는 적절한 휴식기를 가지기 위해 노력한 편이었다.
하지만…….
『칠전팔기』 이후 휴식기를 가지면서 안시현의 가치관은 조금 달라졌다.
좋은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여럿 들어온다면, 스케줄이 완전히 겹치지 않는 한 다작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안시현의 태도 변화에 김진석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시현을 데뷔 전부터 줄곧 마음에 들어 했지만, 다작을 하지 않는 건 못내 아쉬워했다. 비록 조건부일지라도 안시현의 생각이 달라졌다니 기뻤다.
한 회사의 대표가 아닌, 은퇴한 선배 배우로서 느끼는 기쁨이었다.
“내가 현역 때를 떠올리면 지금까지 제일 후회하는 게 뭔지 아냐?”
“온갖 수상 기록은 죄다 가지고 계시면서 후회하시는 게 있다고요?”
“있지. 더 많은 작품을 못 한 거.”
김진석 대표는 배우로 활동할 당시 꾸준히 작품을 활동을 했다.
35년 동안 도합 30작품에서 주연을 맡았고, 훌륭한 연기를 바탕으로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최다 수상을 비롯한 다양한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은퇴 후 지인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줄곧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다.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하지 못한 것을 말이다.
“너도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느끼게 될 거야. 정말 열심히 해서 후회가 남지 않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은퇴하면 온통 후회투성이더라고. 그러니까 넌 이것저것 고민하지 말고 좋은 작품 있으면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덤벼들어. 후회는 적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냐?”
김진석 대표는 자식과도 같은 안시현이 자신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길 진심으로 바랐다.
아무리 좋은 필모그래피를 쌓았어도, 온갖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더라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놓치면 어느 순간 후회하게 될 거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 김진석 대표의 마음이 전달된 걸까?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쉬면서 고민 많이 했어요. 일 년에 몇 작품씩 출연하는 다작까지는 힘들겠지만, 스케줄이 겹치지 않는 선에서는 최대한 많이 작품에 출연하려고요. 물론 마음에 드는 대본과 시나리오만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알지?”
“네. 대본과 시나리오는 차고 넘칠 정도로 들어올 거고, 그중 마음에 드는 걸 고르기만 하면 되니까요.”
안시현의 명확한 답변을 들은 이후에야 김진석 대표는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그는 얼마 전, 김진모에게 같은 조언을 했을 때를 떠올리며 깨달았다.
‘친구끼리 닮는다더니 대답도 어쩜 그리 똑같이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아무리 잘해도 물가에 내놓은 자식처럼 걱정됐는데…… 이젠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겠어.’
이제 더 이상 안시현과 김진모를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말이다.
* * *
결과적으로 김진석 대표는 김희숙 작가의 완성된 대본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우려를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 배역, 제대로 소화 못하면 캐릭터 돌려 막기 한다고 비판받을 거 알지? 지금껏 쌓아온 이미지에 금 가는 거 한순간이야.”
“그래서 더 재밌지 않겠어요? 보나 마나 언론들도 방영 전부터 그 부분을 집중 조명할 테니 홍보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고요.”
“뭐, 너라면 비슷한 캐릭터도 전혀 다르게 표현할 거라고 믿는다.”
김희숙 작가가 안시현을 생각하며 만든 다니엘 킴 캐릭터는, 안시현이 이전에 연기했던 캐릭터와 직업이 겹치는 부분이 더러 존재한다.
구체적으로 파고들면 다른 캐릭터다.
다만 겉으로만 놓고 보면 이름이랑 배경만 살짝 바꾼 유사한 캐릭터로 보일 수도 있는 게 사실이다.
안시현이 김희숙 작가에게 시련이라고 표현한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유사한 캐릭터성을 지닌 캐릭터를 한 배우가 거듭 연기하다 보면 이미지가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
배우로서 특정 이미지가 굳어진다는 건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한다.
한 번 이미지가 굳어지면,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로만 캐스팅 제안이 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소화할 수 있는 배역에 한계가 생긴다.
괜히 수많은 배우들이 굳어진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 연기 변신을 시도하는 게 아니다.
안시현의 경우 회귀 후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칠전팔기』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비슷한 이미지의 캐릭터를 맡지 않았다.
『90일』에서도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와는 유사성이 거의 없는 배역을 연기하게 됐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다.
결국에는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와 유사한 이미지의 배역을 맡게 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김희숙 작가가 제안한 다니엘 킴 캐릭터가 그러했다.
잘못하면 데뷔 후 처음으로 연기력 논란이 생길 수 있는 상황임에도, 안시현은 당당하게 김희숙 작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전에 연기했던 캐릭터와 비슷한 배역임에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안 들게 연기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김진석 대표 또한 그런 안시현을 믿었다.
지금까지 안시현이 보여 줬던 캐릭터 해석과 연기력이라면, 기존에 연기했던 캐릭터의 비슷한 이미지의 배역을 맡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캐릭터만을 연기해 왔기에 연기력이 돋보인다는 일부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안시현이 제대로 박살 내 주기를 바랐다.
그날 저녁.
김희숙 대표가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했다.
출연 계약서 작성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김희숙 작가와 STS 측에서 안시현이 바라는 조건을 모두 맞춰 주기로 한 덕분이었다.
또한 『90일』의 크랭크업 전후로 캐스팅이 마무리될 예정이었기에,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휴식 후 촬영에 임할 수 있게 됐다.
“출연 소식은 STS 쪽에서 오디션 관련해서 보도 자료 내면서 자연스럽게 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시현 씨가 『90일』에 집중하기에 좋겠죠?”
“네. 크랭크인 전에 소식이 알려지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주연 캐스팅은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여주야 알고 계실 테니 말씀드릴 필요 없을 것 같고. 서브 남주는 여러 배우를 물망에 올려놓고 캐스팅 제안을 하고 있는데, 전에 대표님과 이야기를 나눴던 것처럼 될 것 같네요.”
순간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희숙 작가 또한 JM액터스 소속이기에 캐스팅 라인과 관련해서 김진석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JM액터스의 자체 제작이나 투자가 아니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고, 조언을 구하거나 소속 배우의 캐스팅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사이 벌써 다른 주연 배우 두 명에 대한 논의가 되었다는 건 의외였다.
분위기상 두 배우 모두 JM액터스 소속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다른 두 주연 배역에 어떤 배우들이 캐스팅될 예정인가요?”
“아,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여주는 한나래 씨가 맡기로 했어요. 서브 남주는…… 고민 많이 했는데 우정태 씨에게 맡기려고요.”
한나래와 우정태.
두 사람이 언급되자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이거…… 캐스팅 라인이 꽤나 재밌게 됐는데?’
* * *
6월 1일.
다수의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JM액터스 사옥에서 『90일』이 크랭크인을 하게 됐다.
JM액터스 사옥 주차장에서 간결하게 고사를 지낸 뒤, 박의준 감독은 김진석 대표에게 고개를 숙였다.
“촬영 허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회사의 기둥이 부탁하는데 당연히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촬영 기간은 예정대로 3일입니까?”
“네. 넉넉잡아 3일이고,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내일 중으로 끝날 것 같습니다.”
“기자들이 기사 쓸 내용이 많았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90일』의 초반 신들의 상당수는 한노을이 운영하는 마케팅 회사가 배경이 된다.
이에 『90일』은 JM액터스 사옥에서 회사 신을 초반에 몰아서 촬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회사의 외관은 나오지 않고 대표실과 회의실 내부만 나올 예정이었기에, 촬영할 동안만 소품을 비치하는 선에서 촬영 준비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스태프들이 스태프들은 고사 전후로 촬영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안시현은 고사 때만 잠깐 얼굴을 비추고는 크랭크인 직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본 리딩 내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던 안시현이기에, 모습이 보이지 않자 다수의 배우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이에 박의준 감독은 안시현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에 대해 답을 해 줬다.
“염세주의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 방해하지 말고 놔둡시다.”
그랬다.
안시현은 크랭크인을 앞두고 차분하게 마지막 점검을 하기 위해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얼마 후.
안시현이 박정상의 연락을 받고서 회의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집은 채,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지친 기색을 잔득 드러내며 박의준 감독에게 말했다.
“준비 끝났습니다.”
“네. 상태를 보아 하니 준비는 완벽한 것 같네요.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
스태프분들이 분주하게 촬영 준비를 마무리했다.
『90일』의 스태프는 『형아, 동생』을 통해 안시현과 촬영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이다.
덕분에 그들은 안시현의 상태를 보고서 느꼈다.
캐릭터에 몰입할 준비가 끝났다는 걸, 사인이 나오는 순간 안시현이 아니라 한노을이라는 캐릭터가 그 자리를 대신할 거라는 걸 말이다.
촬영 준비가 마무리된 직후.
다수의 기자들이 취재 열기를 불태우는 가운데, 박의준 감독의 사인과 함께 신2의 촬영이 시작됐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마케팅 회사의 대표, 한노을이 갑작스런 회의를 소집하고서 직원들을 훑어보았다.
“오늘 이렇게 긴급회의를 소집한 건,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저희 주식 상장이라도 되는 건가요? 아니면 대기업에서 투자받게 된 거예요?”
“아! 대표님께서 저번에 이야기하셨던 투자 건이 긍정적으로 마무리됐나 보네요!”
“그쪽에서 얼마나 투자해 준다고 하던가요?”
직원들이 잔뜩 들떴다.
한노을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얼마 전부터 이야기가 나오던 대기업의 투자 건이 긍정적으로 결론이 났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투자 건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직원들의 예상은 벗어났다.
호들갑을 떨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다.
“그 대신, 회사를 매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회의실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