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2화>
142화. 더 높은 곳을
신 5.
대표로서의 마지막 출근 날, 개인 물품을 정리하는 한노을의 모습을 그리는 신이다.
한노을이 대표실에서 조용히 개인 물품을 정리했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10분 남짓, 박스에 담은 짐이라고는 다이어리 몇 개와 필기구가 전부였다.
그 외에 개인 물품은 하나도 없었다.
“…….”
짐을 모두 정리한 뒤.
한노을이 의자에 앉았다. 생각 이상으로 없는 개인 물품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12년 동안 일했는데…… 남은 게 없네.”
췌장암 판정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담배를 피며 한노을은 생각에 잠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군 복무를 한 뒤, 1년 동안 아르바이트와 노가다를 하며 모은 자본금으로 창업을 했다.
그로부터 12년이 흘렀다.
회사는 대기업 투자 후 주식 상장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성장했고, 한노을은 성공한 30대 사업가로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하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자 그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젊음을 바쳐 일에만 몰두했던 게, 회사에 자신의 젊음을 바쳤던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그래서 한노을은 회사를 매각했다.
그를 통해 얻게 된 거액으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한노을이 대표실 곳곳을 눈에 담았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공간이 아니게 된 곳을 기억에 꾹꾹 눌러 담으며, 지난 12년 동안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즐거웠던 기억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12년 동안 회사에 모든 걸 바쳤는데, 1년의 반 이상을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즐거웠던 기억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줄이야.
한노을은 마지막으로 명함과 명패를 담고서 짐을 챙기는 것을 모두 끝마치고서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대표실을 둘러보고서, 마침내 문을 열고 대표실을 나섰다.
그 직후.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12년 동안 매 순간 감사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대표님!”
직원들이 저마다 준비한 선물을 든 채 한노을의 마지막을 환송하기 위해 대표실 앞에 모여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노을의 두 눈이 커졌다.
“이게…… 다 뭡니까?”
“항암 효과가 있다는 것들 좀 준비해 봤어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완쾌하고 다시 돌아와 주실 거죠?”
“힘들 때도 있고, 뒤에서 욕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표님이랑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고요.”
암 중에서도 치료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췌장암이고, 이미 암세포가 다른 장기와 뼈까지 전이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이다.
사실상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직원들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노을에게 다 낫고 다시 돌아와 달라고 호소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소문해서 구한 항암 효과가 있다는 온갖 보약들까지 잔뜩 준비한 채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한노을이 삶의 끈을 놓지 않길 바라서, 천운이 따르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한노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선물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직원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12년 동안 청춘을 바쳐 만들어 낸 회사를 떠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즐거운 기억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내 12년은 잘못됐었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아니네요.”
췌장암 판정을 받은 이후.
한노을이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미소를 지었다.
“약속하겠습니다. 완치가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한노을이 직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당초 박의준 감독은 카메라 감독에게 신 5에서는 한 차례 끊어 갈 타이밍이 있을 거라고 말해 줬다.
바로 한노을이 짐을 정리하고서 대표실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후에는 직원들의 대사가 이어지기에, 안시현의 감정 연기를 깔끔하게 담아내고서 NG를 대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인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카메라 감독은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 나갔다.
촬영 전 박의준 감독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정말로 신 5에서 원 테이크가 가능할지 기대감을 품었다.
“OK.”
결과적으로 안시현이 마지막 대사를 친 이후에야 박의준 감독은 사인을 냈다. 이내 촬영 분량을 체크하며 잠시 동안 고민의 시간을 가진 뒤…….
“이대로 가겠습니다.”
신 5의 촬영은 한 번으로 마무리할 것임을 알렸다.
원 테이크에 성공한 것이다.
‘적응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 다들 무대 출신이라 그런지 연기력은 깔끔하단 말이지. 앞으로 그리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카메라 감독은 원 테이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신 2를 촬영할 때 계속해서 NG를 냈던 단역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 줬기 때문으로 봤다.
안시현이야 신 2에서나 신 5에서나 한결같이 좋은 연기를 보여 줬으니까.
반면 박의준 감독은 카메라 감독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신 5의 원 테이크를 바라보았다.
단역 배우들이 다른 모습을 보여 준 덕분에 원 테이크가 가능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신 2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여 줬던 후배 배우들을 끌고 가 버리는구나. 존재감 미쳤네.’
다만 다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던 이유가 안시현 때문이라는 걸, 문을 열고 나온 안시현의 엄청난 집중력과 연기 때문이라는 걸 간파했다.
또한 휴식 시간에 안시현이 배우들과 함께 최종 점검을 한 것 또한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봤다.
박의준 감독은 『90일』을 촬영하면서 원 테이크가 나오기 힘들 거라고 봤다. 만약 가능하다면 안시현이 단독으로 나오는 몇몇 신에서나 기회를 노려 볼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신 5를 촬영하면서 박의준 감독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안시현의 연기력은 뛰어났고, 심지어는 후배들을 독려하고 이끌어 나갈 줄도 알았다.
박의준 감독은 생각했다.
이상적인 주연 배우의 모습에 대해 설명하라고 한다면, 현재 안시현의 보여주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될 거라고 말이다.
‘7년 전…… 결단을 내리기를 잘했어. 그때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황홀한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 * *
『90일』의 공개 촬영 이후.
언론들이 비슷한 시간에 연달아 기사를 쏟아 냈다.
-완벽주의자 감독과 톱배우의 만남. 크루즈가 될까, 난파선이 될까?
-안시현, 촬영 첫날부터 원 테이크를 보여 주다.
-팔색조의 화려한 귀환.
-명불허전 안시현, 원톱의 자격을 증명했다.
『90일』과 관련해서 긍정적인 견해와 부정적인 견해가 공존하는 분위기였다.
다만 신 2의 촬영 직전에는 비율이 4 대 6 정도였다면, 신 5가 원 테이크로 마무리되고 나서는 6 대 4로 분위기가 반전됐다.
긍정적인 시선이 대세인 가운데, 불안 요소들로 인한 우려가 많은 상황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심지어 불안 요소들도 크진 않았다.
안시현을 제외한 배우들이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제대로 된 필모그래피를 쌓지 못한 이들이라는 것, 그만큼 원톱인 안시현의 부담이 크다는 것 정도였다.
다만 그마저도 신 5에서 보여 준 안시현의 폭발적인 연기력으로 인해, 안시현이라면 불안 요소들이 무색하리만큼 『90일』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거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
박정상으로부터 언론들이 낸 기사를 정리해서 보고받은 김진석 대표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박수를 치면서 입을 열었다.
“분위기 좋네. 작정하고 준비한 것 같더니, 첫날부터 제대로 보여 줬나 봐? 현장에서 촬영 지켜본 최 팀장은 뭐라고 하던가?”
“입대 전의 정신 나간 집중력으로 연기를 하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연기해서 소름 돋았다고 하더군요.”
“짜식. 갈수록 발전하고 있구만. 연기력으로는 발전할 만한 여지를 찾기 힘드니, 다른 쪽으로 출구를 찾아낸 모양이야. 박 실장, 『90일』 말이야……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나?”
박정상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90일』의 제작비와 촬영장의 분위기, 개봉사의 혜인원의 영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끝에 어렵사리 결론을 내리고서 답했다.
“손익 분기점은 넘지 않겠습니까?”
“상업적인 성과 말고, 작품성만을 놓고 본다면 얼마나 인정을 받을까?”
“으음. 제 부족한 식견으로는…… 시현이가 제대로 연기만 한다면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다시 한번 노려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시현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로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3회 수상한 배우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거고 말이야.”
대한영화제의 경우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에게 대체로 후한 평가를 주는 시상식이다. 실제로 대한영화제 주연상을 받은 배우 중 예술영화에서 폭발적인 연기력을 보여 준 배우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때문에 안시현의 세 번째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노려 보는 게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목표라고 보는 게 맞았다.
예술영화라는 프레임으로 인해 흥행 면에서는 아쉬운 면이 많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근데 왜 난, 시현이가 조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더 높은 곳이라면…….”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시현이는 세계 3대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노리는 것 같아.”
김진석 대표는 안시현이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목표로 연기하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안시현이 캐릭터 구축을 위해서 유독 더 노력을 기울이는 스타일인 건 사실이지만, 『90일』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이전보다 더 심했다.
심지어는 한노을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버킷리스트까지 죄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안정적인 연기를 위해 비중을 줄였던 메소드를 다시 사용하겠다는 것만 봐도,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만을 바라보고 있는 건 절대 아니야.’
『90일』의 크랭크인 전.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에게 몇몇 신에서만큼은 메소드를 다시 끄집어낼 것임을 시사했다. 한노을 캐릭터를 완벽하게 표현하려면 변화된 연기법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변화된 연기법만으로도 안시현이 연기하는 한노을 캐릭터의 완성도는 엄청날 거다. 이미 『편지』와 『칠전팔기』를 통해 변화된 연기법의 가치를 몸소 증명해 보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여러 이유 때문에 웬만하면 꺼내 들지 않았던 메소드를 과감하게 사용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그 이상을 목표로 바라보기 때문,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됐다.
김진석 대표는 그런 안시현의 목표가 마음에 들었다.
대한민국 배우 중 그 누구도 도달해 보지 못한 세계 3대 영화제 남우주연상이라는 목표를 안시현이 이뤄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를 위해서 소속사인 JM액터스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다.
곽상필이 박의준 감독을 돕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고민 끝에 김진석 대표가 결론을 내렸다.
“박 실장.”
“네, 대표님.”
“자네 2주 후에 휴가지?”
“그렇습니다.”
“휴가 열흘 더 줄 테니, 프랑스 한번 다녀올 생각 있나? 그 대신 딱 하루만 내가 지시하는 스케줄을 소화해 주면 되는데 말이야.”
“프랑스라면…… 황금영화제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허허허. 이 사람아, 생각하고 있다고 한들 개봉도 안 한 영화를 가지고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는가? 자네는 그냥 사람 한 명만 만나고 오면 돼. 통역사 붙여 줄 테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고.”
김진석 대표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90일』이 개봉했을 때를 대비해 일찌감치 큰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