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2화 (14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3화>

143화. 부담 가지지 마

대표직을 내려놓은 이후, 한노을은 이틀 동안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가 집에서 마음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2년.

그는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쉰 적이 없었다.

주말에도 업무에 매진했고, 휴가조차 모조리 반납한 채 회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쳐왔다.

그래서일까?

한노을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내는 휴식을 어떻게 즐겨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소파에 드러누운 채 TV를 보는 걸 말고는 마땅히 떠오르는 휴식 방법이 없었고, 결국 이틀 동안 온갖 TV 채널을 다 돌려 보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노을이 첫 번째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

이틀의 휴식 후, 한노을은 남은 버킷리스트 중 다음으로는 뭘 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단…… 하루에 1억 쓰기부터 해 볼까?”

하루에 1억 쓰기, 슈퍼카 사서 박살 내기, 식당에서 골든벨 울리기, 옷가게에서 파는 상품 다 달라고 하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음식 먹어 보기 등.

일단 돈을 써서 할 수 있는 것들 위주로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실천해 나갔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때.

한노을은 도합 20개의 버킷리스트를 달성했다.

그리고 다시 병원을 찾았다.

검사를 받거나 치료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 버킷리스트를 모두 달성할 때까지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진통제를 처방받으러 온 것이다.

의사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노을을 바라보았다.

“많이 고통스러울 텐데 괜찮으세요?”

“예상했던 일이라서 괜찮아요. 아직 해야 할 게 많이 남았으니까, 다 할 때까지는 버텨 봐야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진통제로도 통증을 이겨 내기 힘든 순간이 올 거예요. 그래도…… 전 한노을 씨가 힘든 상황들을 이겨 내고 버킷리스트를 다 달성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통제 처방해 드릴게요.”

처방전을 받고 수납을 하던 중 간호사가 한노을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폈다.

“이런 질문하기 조심스러운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버킷리스트를 차례대로 이뤄 나가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즐거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별 느낌이 없더라고요. 제가 너무 재미없게 살아서 그런가 봐요.”

“하고 싶었던 일들 아니에요?”

“안 해 봐서 궁금했던 일들이죠. 아, 마지막 버킷리스트는 제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이긴 합니다.”

“마지막 버킷리스트가 뭔데요?”

간호사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한노을을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말해 달라고 재촉하는 듯한 모습에, 한노을은 고민을 하다 조심스레 속내를 드러냈다.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제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함께해 주세요.”

*   *   *

“오케이.”

신 24.

한노을이 진통제 처방을 위해 병원을 방문했다가, 간호사 최주은에게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함께해 달라고 부탁하는 신이 여섯 번 만에 OK 사인이 떨어졌다.

“오늘 촬영도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안시현이 스태프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안시현에게 양소라가 다가오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 때문에 계속 NG가 나서……. 앞으로는 NG 안 나게 하겠습니다!”

신 24가 여섯 번 만에 어렵사리 OK 사인을 받은 건, 양소라가 거듭 NG를 냈기 때문이다.

촬영 경험이 전문해서일까?

한 번 NG를 내자 양소라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캐릭터에 몰입하지 못하며 연달아 NG를 내고 말았다.

훗날 주연급 배우로 성장한다는 게 믿지 않을 만큼, 자신으로 인해 NG가 났다는 심리적 부담감을 이겨 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안시현이 양소라를 따로 불러서 조언을 해 주고 진정을 시킨 뒤에야 어렵사리 OK 사인을 받아 낼 수 있었다.

“소라야.”

“네, 선배님.”

“촬영하면서 NG 안 내는 배우 없어. NG 때문에 미안해하면 할수록 전력을 다해 연기하기 힘들어. NG를 제대로 된 연기를 위한 발판으로 삼는다 생각해.”

“노력할게요.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NG를 하면 자꾸 주위 시선이 신경 쓰여요. 이것도 결국 제대로 된 배우로 성장하려면 이겨 내야겠죠.”

양소라는 안시현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스태프들에게도 일일이 사과를 하고 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의준 감독이 안시현에게로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시현 씨, 간만에 식사나 같이할까요?”

“그러고 보니 감독님이랑 같이 식사한 지도 꽤 오래됐네요. 간만에 같이 식사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촬영을 마무리한 뒤,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하기 전.

박의준 감독이 안시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한 게 뭐 얼마나 있다고요.”

“아닙니다. 주연 배우로서도, 선배로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시잖습니까. 덕분에 촬영이 예상보다 훨씬 더 수월합니다.”

박의준 감독은 비교적 넉넉하게 촬영 기간을 잡았다.

이는 안시현을 제외하면 대다수 배우들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데에서 기인한 결정이었다.

경험이 부족하기에 NG가 그만큼 많이 날 테고, 디렉팅할 부분 또한 많을 거라고 판단했지만…….

촬영은 예상한 것보다 순조로웠다.

안시현이 후배 배우들에게 적절하게 조언을 하며 촬영장 분위기를 이끌어 준 덕분이었다.

“솔직히 시현 씨가 후배들을 이끄는 역할까지 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혹시 제가 너무 주제넘게 나섰나요?”

“하하하. 그럴 리가요. 오히려 일이 줄어들어서 좋은걸요. 시현 씨가 주연을 맡아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박의준 감독의 거듭된 감사 인사에 안시현은 별다른 이야기 없이 미소로 화답을 했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박의준 감독이 과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시현 씨, 제가 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품게 된 줄 아십니까?”

“안 그래도 하버드 잘 다니시던 분이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영화감독이 된 건지 궁금했는데, 개인적인 이유를 묻는 건 실례일 것 같아서 조용히 있었어요.”

“계기가 생긴 건 2001년이었어요.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요. 어떻게 제가 그날을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인생이 변하게 된 날인데.”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를 마시며 박의준 감독은 차분하게 2001년 당시에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방학이라서 한국에 들어왔는데 할 게 너무 없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죽어라 공부만 해서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딱히 없었거든요. 허구한 날 집에 틀어박혀 있었죠. 그러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슈퍼 다녀오는 길에 대여점이 하나 보이더라고요. 충동적으로 들어가서 비디오 하나를 빌렸는데…… 그게 제 인생을 바꿔 놓을 줄이야.”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으셨나 보네요.”

“정확히는 영화가 아니라 배우를 보고 몸에 전기가 통했죠. 제가 본 영화는 『나는 간첩입니다』였고, 제 인생을 바꿔 놓은 캐릭터는 리수철이었어요.”

그 순간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박의준 감독이 영화감독을 꿈꾸게 된 계기가 설마 자신일 줄이야.

어째서 회귀 전에는 박의준 감독의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없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계기 자체가 없었기에 전혀 다른 삶을 살았으리라.

“시현 씨의 리수철 연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내가 만든 이야기를 저 사람이 연기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부터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목표가 현실로 이뤄지게 됐는데, 기분이 어떤가요? 막상 현실이 되니까 별로이거나 한 건 아니죠?”

“한노을을 보고 있자면 저까지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에요. 대답은 이걸로 충분하겠죠?”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이뤄가면서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워커홀릭 한노을의 연기를 보며 무기력함을 느꼈다는 건, 연기를 한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연기가 완벽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심지어 완벽주의자인 박의준 감독이 한 말이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자신이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평판 안 깎아 먹으려면 앞으로도 부지런히 노력해야겠네요.”

*   *   *

박의준 감독의 속내를, 영화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듣게 된 이후 안시현은 그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촬영장에서 좋은 케미를 보여 줬다.

완벽주의자인 박의준 감독이 디렉팅을 하면, 안시현이 배우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추가적으로 조언을 하거나 함께 호흡을 맞춰 보는 식으로 도움을 준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배우들을 이끌고도 촬영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건, 박의준 감독과 안시현의 찰떡 호흡 덕분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어느새 6월이 지나 7월이 다가왔다.

한 달 사이.

『90일』의 전체 신의 40% 정도를 촬영하며 예정보다 더 빠르게 진도를 뺐다.

이 기세라면 8월 내로 촬영이 모두 마무리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그 무렵.

-김희숙 작가와 안시현의 재결합!

-안시현,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 캐스팅 확정!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 주연 3인방 모두 정해졌다.

-또다시 백화점 사장, 시험대에 오르게 될 안시현의 연기력.

아직 타이틀이 알려지지 않은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에 안시현과 한나래와 우정태가 주연으로 캐스팅했음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동시에 세 사람이 맡은 배역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 또한 공개되며 관심이 집중됐다.

언론의 주된 관심사는 『너와 나의 시간』의 정영빈 캐릭터에 이어 다시 한번 백화점 사장 역을 맡게 된 안시현이 어떤 연기를 보여 줄지에 집중됐지만…….

정작 당사자인 안시현은 박정상을 통해 기사와 관련된 내용을 전달받았음에도 시큰둥했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약한데?”

“아직 캐스팅 라인도 확정되지 않은 차기작과 관련된 언론들의 왈가왈부에 신경 쓸 정신이 없어서요.”

“하긴, 지금은 회전목마가 더 중요하니까.”

“맞아요. 회전목마가 더 중요하죠.”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다.

안시현과 박정상은 대망의 회전목마 신을 촬영하기 위해 놀이공원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으니까.

신 55.

한노을이 억지로 자신을 따라온 최주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루 종일 회전목마를 타다가, 폐장을 알리러 온 직원이 말을 걸자 오열하는 신이다.

신55는 『90일』에 큰 의미가 있는 신이기도 하다.

시종일관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기계처럼 버킷리스트를 이뤄 나가던 한노을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감정을 드러내며 분위기가 반전되니까.

때문에 안시현은 차기작에 대한 소식보다는 놀이공원에서의 촬영을 앞두고 점검을 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렇게 도착한 놀이공원.

“오셨어요, 선배?”

극 중 안시현을 제외하면 가장 출연 비중이 높으며, 놀이공원 신을 함께 촬영하게 된 양소라가 안시현을 향해 깎듯이 고개를 숙였다.

“빨리 왔네.”

“동선 체크하고 대사 연습하고 있었어요. 중요한 신이라서 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너무 부담가지지 마. 여러 번 나눠서 갈 거니까.”

놀이공원이며 시간의 흐름을 반영해야 하기에 촬영은 수차례에 나눠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상대적으로 집중력을 유지해야 할 시간이 적다는 걸 양소라에게 이야기하며 긴장감을 풀어 주려 했지만…….

정작 그녀는 여전히 힘이 바짝 들어간 채로 대사를 읊조리며 촬영을 준비해 나갔다.

‘인파가 없어서 다행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잔뜩 긴장해서 연기에 집중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90일』는 1년에 단 하루, 놀이공원이 시설 정기점검을 하는 날에 촬영을 하게 됐다.

덕분에 촬영을 지켜보는 인파는 없었다.

시민 역을 맡아 줄 엑스트라들을 섭외하기 위해서 고생 좀 했지만, 하루종일 놀이공원에서 촬영해야 하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스태프들이 촬영 준비를 모두 마친 직후.

“액션.”

박의준 감독의 사인과 함께, 『90일』의 핵심 신 중 하나인 신 55 촬영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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