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3화 (143/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4화>

144화. 미안해

자유이용권을 구매한 한노을이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최주은은 그런 한노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걷던 중.

한노을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돌리더니, 살금살금 따라오던 최주은을 바라보았다.

“안 따라오셔도 되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놀이공원인데 혼자보다는 둘이 오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렇게 걱정되면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함께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생각 좀 더 해 보고 답할게요. 아, 방해 안 하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테니까 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즐기세요.”

“즐기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회전목마만 탈 거니까.”

“다른 놀이기구는 안 타고요?”

“다른 거 타고 싶으시면 즐기고 오세요. 전 회전목마면 충분합니다.”

한노을은 단호하게 회전목마로 향했다.

그리고는 일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면 관심을 가지지 않는 회전목마를 주야장천 탔다.

그 모습을 보며 최주은은 혀를 내둘렀다. 그녀가 중간에 다른 놀이기구를 타고 오고, 허기가 져서 식사를 하고 왔음에도 한노을은 여전히 회전목마 위에 앉아 있었으니까.

말을 걸어 볼까 싶었지만 이내 그만뒀다.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한노을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   *   *

신 55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노을이 목마를 타는 걸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보여 줘야 한다.

따라서 30분에 한 번씩 회전목마를 타는 걸 촬영하기로 했고, 박의준 감독은 안시현에게 대역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루 종일 회전목마만 타는 걸 촬영하면서, 신의 마지막에 감정 연기를 제대로 해낸다는 게 체력적으로 어려울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안시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직접 할게요.”

“괜찮겠어요?”

“힘들 것 같으면 말할게요.”

박의준 감독은 체력적인 문제로 감정 몰입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걱정했지만, 안시현은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면서 감정을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따라서 대역을 쓰는 걸 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역을 써서 회전목마를 타는 장면을 촬영하면 몰입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박의준 감독이 그런 안시현의 의도를 눈치챈 건, 회전목마를 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안시현의 표정 또한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면서부터였다.

고작 10여 초 내외.

짧게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고 표정이 클로즈업 되지 않을 예정임에도, 안시현은 그것을 바탕으로 조금씩 감정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박의준 감독이 혀를 내둘렀다.

‘이래서 대역을 쓰지 않겠다고 한 거였구나.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이 장면을 가지고 감정을 끌어올릴 생각을 하다니…….’

박의준 감독은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부분이 신 55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핵심은 신 마지막 부분에서의 감정 표현이라고 봤다.

따라서 안시현이 체력을 낭비하지 않고 마지막에 감정을 끌어내 주길 바라며 대역을 제안한 건데…….

설마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부분에서 감정을 끌어올리는 방법을 채택할 줄이야.

이에 박의준 감독의 생각이 바뀌었다.

“카메라 감독님, 죄송하지만 시현 씨 표정도 따 주실 수 있을까요?”

“표정을요?”

“네. 잘만 편집하면 신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으음. 알겠습니다.”

안시현의 연기로 인해서 즉흥적으로 좋은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안시현은 해가 질 때까지 지겹도록 회전목마를 타면서도, 그것을 지루해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을 끌어올리는 매개체로 사용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카메라 감독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스태프들의 안시현이 회전목마를 타면서 감정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걸 눈치챌 정도였다.

그리고 다들 혀를 내둘렀다.

안시현이 좋은 배우라는 거야 그동안 쌓아 온 필모그래피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게다가 『90일』 스태프들 중 상당수는 안시현과 『형아, 동생』 때 함께 작업을 했다. 안시현이 남다른 배우라는 걸 일찌감치 경험했던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90일』를 촬영하며 안시현의 연기에도 좀처럼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형아, 동생』의 주지성과 비교하면 한노을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폭발적인 연기를 느끼기는 힘드니까.

하지만…….

신 55를 촬영하며 스태프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어떤 캐릭터건 안시현이 연기하면 다르다는 걸, 연기에 미친 사람을 연기를 하면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다는 걸 제대로 느꼈다.

하다하다 반나절을 10초로 축약하는 장면을 감정 끌어올리는 매개체로 사용할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스태프들은 『형아, 동생』 흐른 시간만큼 안시현의 연기가 발전했음을 느끼고, 배우들은 사소한 것조차도 허투루 하지 않는 안시현을 보며 감탄하던 그때.

“액션.”

마침내 신 55의 핵심 장면의 촬영이 시작됐다.

한노을이 운행이 끝난 회전목마에 몸을 파묻었다. 그 모습을 본 최주은이 당황한 채 한노을에게 다가갔다.

“노을 씨! 어디 아파요? 저 좀 봐…… 노을 씨, 울어요?”

통증 때문에 몸을 파묻었을 거라는 최주은의 예상과 달리, 한노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에 최주은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통증이라면 간호사인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대처를 해 줄 수 있겠지만, 눈물을 달래 주는 건 간호사의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쉬운 걸…… 왜 그때는 못 해 줬을까요?”

“뭘 못 해 줬다는 거예요?”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이 있었어요. 놀이공원 한번만 놀러 가자고 그렇게 졸랐는데, 일을 핑계로 단 한 번도 응해 주지 않았어요. 결국 일에 미친 저를 견디지 못하고서 떠났고요. 그때 제가 놀이공원을 갔다면…… 그녀는 제 곁에 남아 있었을까요?”

가족도, 친구도 없다. 사랑하는 사람마저도 워커홀릭인 그에게 지쳐 옆을 떠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한노을은 최주은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그나마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그녀라면, 적절한 보상을 지불할 경우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함께해 줄 것만 같았으니까.

한노을의 버킷리스트는 일에 치여 사는 동안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연인이 하고 싶다고 했던 것들을 착실하게 정리해 놓은 것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부모님, 다른 사람의 반려가 된 여인,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그나마 몇 없는 옛 친구들을 떠올리며 삶을 되짚어 보는 과정인 셈이다.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하면서 한노을은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았는지 깨닫고 있었다.

사회적 지휘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다.

만약…….

몸이 아프지 않았다고 가정했을 때, 10년 후의 자신은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한노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일에만 미쳐 사는 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어쩌면 10년 후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지금보다 더 불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의 지난 삶은 잘못된 걸까?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데, 마지막까지 후회를 하며 눈을 감아야 할까?

한노을은 이런저런 고민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일에 치여 살며 잊고 있었던 감정을 또한 하나둘씩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침내.

회전목마를 타며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죄책감과 미안함이 폭발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한노을이 오열했다.

“미안해, 하나야. 미안해, 엄마, 미안해…… 모두…….”

회전목마에 몸을 파묻은 채 고개를 숙이고서 서럽게 울었다. 그동안 꾹꾹 억눌러 왔던 감정을 거리낌 없이 모두 토해 냈다.

일에 몰두한다는 핑계로 소중한 것들을 등한시했던 시간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때를 떠올리며 가슴을 움켜쥔 채 괴로워했다.

그 모습을 보며 최주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은 채 한노을을 향해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TV에서 본 노을 씨는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항상 어딘가가 허전해 보였어요. 환자로 알게 된 이후에도 뭔가 비어 보였는데…… 이제야 채워진 것 같네요. 당신도, 똑같은 사람이었네요.”

“…….”

최주은의 말에 한노을은 대답하지 못했다. 솟구려 오른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한노을이 어느 정도 진정됐을 때.

최주은이 속에 담아 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에 부탁하셨던 마지막 버킷리스트, 함께할게요. 함께하고 싶어요.”

*   *   *

“OK. 이대로 가겠습니다.”

평소 박의준 감독은 촬영 영상을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최종적으로 OK 사인을 내곤 했다.

이는 안시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었지만…….

신 55의 마지막 장면에서만큼은 달랐다.

안시현의 연기는 표현 방법을 찾기 어려울 만큼 좋았고, 양소라는 『90일』을 촬영하면서 가장 좋은 집중력을 보여주며 안시현의 연기를 망치지 않았다.

박의준 감독은 신 55에서만큼은 촬영본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그림이 나왔다고 판단했다.

신 55에서 안시현이 보여줘야 할 오열은 단순한 눈물 연기가 아니었다.

기계처럼 일만 바라보며 지난 12년을 살아왔던 워커홀릭 한노을이, 죽음을 앞두고서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워커홀릭이 되기 전으로 되돌아가게 되니까.

또한 최주은이 한노을의 마지막 버킷리스트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최주은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 줬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유명인인 한노을이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지만, 뭔가가 결여된 듯한 모습에 선뜻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뭔가가 결여된 한노을과 함께하기엔 꺼려지는 버킷리스트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노을의 결여는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이루며 변화할 조짐을 보이다가, 회전목마를 타는 것을 기점으로 완전히 해결됐다.

안시현은 결여된 감정이 채워지는 한노을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기 전까지 회전목마를 타며 조금씩 감정을 끌어올린 게 적절했다.

간만에 메소드를 꺼내 든 덕에 촬영이 끝나고도 한동안 감정이 가라앉지 않아 고생하긴 했지만, 촬영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시현의 입가에서는 좀처럼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간만에 메소드를 꺼내 들어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냈으니 기분이 좋은 게 당연했다.

촬영장으로 돌아온 직후.

박의준 감독이 스태프와 배우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서 입을 열었다.

“해외 로케이션 일정 확정됐습니다. 해외 로케이션의 정확한 일정과 준비물은 내일 중으로 안내드리겠습니다.”

“오! 드디어 확정된 건가요?”

“북유럽이라…… 기대되네요. 저 해외 가 보는 거 처음이에요. 해외 로케이션 때문에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우리는 한국에서 촬영 잘하고 있을 테니, 소라 넌 가서 제대로 촬영하고 와.”

“네. 열심히 할게요.”

양소라가 주먹을 불끈 쥐며 선전을 다짐했다.

해외 로케이션의 경우, 일정이 정해져 있기에 국내에서의 촬영과 달리 완성도를 위해 하염없이 촬영을 반복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대다수의 배우들이 안시현과 함께 해외 로케이션을 떠나게 될 양소라를 격려해 줬다. 그녀가 얼마나 연기를 잘해 주느냐가 해외 로케이션의 성공 여부를 가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촬영이 거듭될수록 그녀의 연기력이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데뷔작이라는 게 티가 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양소라 또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알기에, 해외 로케이션을 앞두고 죽어라 연습을 하면서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드디어 일정이 잡혔구나.’

해외 로케이션 일정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각오를 다진 건 안시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얼마나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느냐가 『90일』의 성패를 가를 테니까.

배우들이 경험이 부족한 양소라에게만 관심을 집중하는 건, 안시현이 좋은 연기를 보여 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시현은 그 믿음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더 메소드를 사용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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