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5화>
145화. 그사이에
안시현이 신 55에서 메소드 연기법을 다시 꺼내 든 건, 그렇게 해야지 한노을의 감정을 소름 돋는 수준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제대로 적중했다.
박의준 감독이 처음으로 결과물을 확인하지 않고 OK 사인을 냈을 정도로 신 55에서 안시현이 보여 준 감정 연기는 일품이었다.
당초 안시현은 『90일』을 준비하면서 딱 두 번만 메소드 연기법의 힘을 빌리자고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신 55였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해외 로케이션이다.
다른 신들은 변화된 연기법으로도 충분히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신 55와 해외 로케이션은 아니었다.
지독한 연습과 고민 끝에, 메소드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신 55의 촬영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덕분에 안시현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연습 때부터 줄곧 절정의 연기력이 필요한 부분이라 판단했고, 신 55의 결과가 좋았기에 더더욱 메소드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이러려고 연기법에 변화를 준 거니까.’
연기법에 변화를 주면서 안시현은 메소드로 인한 후유증에 더 이상 부담을 가지지 않게 됐다. 특정 신에서만 선택적으로 메소드 연기를 하면서 폭발적인 연기력을 보여 주는 게 가능해졌다.
『칠전팔기』에서는 메소드가 없이도 의도대로 연기를 할 수 있었지만,『90일』은 아니다.
애초에 두 영화의 감정 표현의 정도가 다르다.
『90일』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노을이 버킷리스트를 하면서 다양한 감정 표현을 보여 주는 영화다.
특히나 죽음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한노을의 감정 변화가 다양해지고, 안시현의 연기 난이도 또한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이 감정 표현이 절정에 이르는 게 신 55와 해외 로케이션에서 촬영하게 될 신들이다.
‘메소드를 통해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해답이야.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준비를 해야겠지.’
한노을 역을 맡기 위해 안시현은 『칠전팔기』를 위해 만들었던 근육질 몸매를 포기했다. 작정하고 근육량을 일반인 수준으로 줄여야 했다.
자신의 몸을 등한시하는 워커홀릭 한노을에게 근육질 몸매는 가당치 않았으니까.
안시현의 노력은 박의준 감독을 만족시켰지만…….
정작 당사자인 안시현은 만족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 후반부, 특히 해외 로케이션에서 촬영할 신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자신의 몸매가 한노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한노을은 치료를 거부한 채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이뤄 나간다. 결국에는 몸이 축나고 조금씩 말라 가는 시점이다.
따라서 평범한 몸매가 아닌 마른 몸매가 필요했다.
지금 상황에서 안시현이 마른 몸매를 만드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박의준 감독 또한 한계가 있다 판단했고, 관객들의 몰입을 위해 직접적으로 몸매를 드러내는 장면을 최대한 배제할 계획이었다.
이에 안시현은 박의준 감독에게 해외 로케이션 전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다.
“최대한 원하시는 몸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얼굴만이라도 완벽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가능할지는 알 수 없지만, 노력은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려고 몸값 비싸게 받는 거잖아요.”
무리하게 마른 몸매를 만들려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걸 알면서도 안시현은 완벽한 한노을을 표현하기 위해 마른 몸매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단, 꾸준히 건강 검진을 받으며 몸에 이상이 있을 경우 당장 중단한다는 조건이 달렸지만 말이다.
이는 안시현 또한 동의한 부분이었다.
아무리 한노을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이 넘쳐난다고 한들, 건강이 악화되는 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몸이 망가지지 않는 선에서 뭐든지 다 해 볼 생각이었다.
‘후회를 남기지 말자. 크랭크업을 하는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해.’
* * *
신 55를 기점으로 한노을은 다양한 감정 표현을 하게 됐다. 기계처럼 보이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해 나갈 때마다 최주은에게 온갖 감정을 다 드러냈다.
문제는 감정 표현이 다양해진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거였다.
감정 표현이 다양해진 만큼 육체의 고통으로 인한 짜증과 분노 또한 자연스레 증가했으니까.
오죽하면 가끔은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크흐흑…… 제발 날 좀 죽여 줘요! 이렇게 하루하루 괴롭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아요!”
“우리 같이 죽을래요?”
“당신이 뭘 알아! 내 고통에 공감하는 척하지 마!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지 당신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이상한 소리 안 할 테니까 제발 날 버리지 마요. 제발요…….”
그렇게 온갖 감정을 토해내고 통증이 가라앉으면, 한노을은 항상 최주은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할 정도로 죄인이 된 기분을 느꼈다.
정작 최주은은 한노을이 감정 변화가 격해져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 줬다.
어느 날.
한노을은 진심으로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최주은은 어째서 자신의 옆에 있는 걸까?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함께하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해도 거절을 했고, 버킷리스트를 위해 필요한 비용만을 지불해 달라고 한 게 전부다.
돈이 필요해서 접근한 건 아니라고 봐야 했다.
시한부인 자신에게 돈 말고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수없이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아 결국 직접 물어보게 된 것이다.
최주은은 솔직한 한노을의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노을 씨는 세상 모든 행동에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네. 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이유 없는 행동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의도 없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바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거군요. 상식적으로는 물질적인 것을 바라야 하는데, 돈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으니까요.”
“심지어 적은 액수도 아니었죠.”
최주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노을의 생각은 그가 사업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한노을처럼 매 순간 합리적인 판단만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솔직히 돈 준다고 했을 때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액수가 워낙 커야 말이죠.”
“고민하지 말고 그냥 받지 그랬어요?”
“그럼 제가 노을 씨 옆에 있는 의미가 퇴색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치 제가 돈을 바라고 노을 씨에게 접근한 것 같잖아요.”
최주은이 미소를 지은 채 한노을의 손을 잡았다.
“전 노을 씨의 마지막을 지켜 주고 싶었던 거예요. 가족도 친구도 없는 당신의 모습이, 마치 저를 보는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거든요.”
“정말 그게 다예요?”
“네. 순수한 호의, 그게 다예요. 사람은 매사에 합리적인 이유만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답니다.”
“…….”
한노을이 고민에 빠졌다. 최주은의 진심이 무엇일지, 그녀가 정말로 자신에게 바라는 게 없는 건지를 한참 동안 고민해 봤지만…….
결국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OK.”
동시에 박의준 감독이 OK 사인을 냈다.
“이대로 가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무려 11번의 촬영 끝에 OK 사인을 받아 내자, 양소라는 곧장 안시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 때문에…….”
신 83.
한노을이 최주은의 진의를 의심하는 신은, 해외 로케이션을 제외하면 최주은의 대사가 가장 많은 신이다.
조연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최주은의 대사가 많은 건 당연하지만, 그 대사가 특정 몇몇 신에 유독 많이 몰려 있는 게 문제가 됐다.
『90일』이 데뷔작인 양소라가 안시현의 연기력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대사가 적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대사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연기력 차이가 눈에 띄게 보였다. 양소라의 연기력 부족으로 인해 안시현의 연기마저도 상대적으로 퇴색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악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 신을 여러 번 나눠서 촬영하면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거였다.
그럴 때마다 양소라는 자신 때문에 수차례 촬영했다는 생각에 미안함을 드러냈지만…….
“잘하고 있으니까 부담가지지 마, 소라야. 연기 많이 좋아졌는데?”
안시현은 시선은 전혀 달랐다.
그는 촬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는 양소라의 연기력을 칭찬했다.
메가폰을 잡은 게 완벽주의자인 박의준 감독이고, 호흡을 맞추는 게 제대 이후 물오른 연기력을 과시하고 있는 안시현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어찌 됐든 양소라의 연기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당사자인 양소라가 만족하지 못해서 그렇지.
“선배님과 김진모 선배님은 데뷔 때부터 엄청 잘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간첩입니다』 때부터 NG 안 내기로 유명하셨다면서요.”
“나랑 진모? 진모야 그쪽으로는 타고났고…… 나야 메소드였으니까 캐릭터에 과하게 몰입해서 NG를 낼 일이 적긴 했지.”
“저도 선배님들처럼 잘하고 싶어요. 대한민국에서 제 이름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배우로 성공해서 인정받고 싶어요.”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그러니까 부담감 좀 내려놓고 캐릭터에만 집중해. 오히려 부담감이 발목을 잡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노력해볼게요.”
거듭된 조언에도 계속해서 NG를 의식하던 양소라는,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NG를 의식하지 않았다. NG 또한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때부터 양소라의 연기력은 일취월장했다.
신인 티를 벗게 됐고, 상대적으로 NG를 내는 횟수 또한 줄어들었다.
그 덕분일까?
해외 로케이션을 정확히 열흘 앞두고, 『90일』은 대부분의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검토 후 9월 말에 필요한 장면을 일부 추가 촬영하기로 했지만, 말 그대로 일부일 뿐이고 사실상 해외 로케이션 이후 국내에서 단 한 신만 더 촬영하면 크랭크업이 된다고 보는 게 맞았다
열흘의 휴식을 앞두고 박의준의 안시현에게 물었다.
“시현 씨. 열흘 동안 뭐 하실 건가요?”
“식단 관리 하면서 쉬려고요. 그동안 소홀했던 육아에도 집중하고, 와이프랑 데이트도 하고요.”
“시간 효율적으로 잘 쓰시네요. 그래도 제게 하루 정도는 시간 내줄 수 있죠?”
“하루를 통째로요?”
“네. 대신 하루는 안 넘길 겁니다.”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90일』을 촬영하며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은 많은 교감을 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만, 아예 하루를 통째로 비워 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하루 종일 뭘 하려고 그러는 걸까?
호기심이 품으며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야 뭐…… 언제 비워 드릴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죠.”
“그럼 내일 당장 비울게요.”
“네. 오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박의준 감독이 안시현에게 연락을 했다.
-매형 극단으로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광대들요? 이번 달은 공연이 없어서 쉴 텐데……. 일단 알겠습니다.”
안시현이 대학로로 향했다.
극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대 위에 설치해놓은 스크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안시현은 박의준 감독이 자신과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오셨어요? 매형은 스케줄이 있어서 저녁에나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편하게 쓰라고 열쇠 주고 가셨어요.”
“스크린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이렇게 쓰려고 합니다.”
박의준 감독이 리모컨을 눌렀다.
동시에 스크린에는 한노을을 연기하고 있는 안시현의 모습이, 놀이공원에서 촬영한 신 55에서의 모습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시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파악했다. 동시에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그사이에 편집까지 하신 겁니까?”
박의준이 안시현에게 보여준 건 신 55의 촬영본이 아닌 편집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