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5화 (145/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6화>

146화. 재밌을 것 같네요

편집본을 보며 안시현은 순수하게 놀랐다.

편집본의 퀄리티 때문이 아니라, 촬영을 진행하면서 편집까지 한 박의준 감독의 열정 때문이다.

연출이 더해지지 않은 단순 편집본일 뿐이지만, 박의준 감독이 어떤 식으로 『90일』을 만들어 가고 표현하고 싶은지 느끼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시나리오 집필 의도대로 철저하게 한노을에게 모든 걸 집중하겠다는 건가?’

『90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조연과 단역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한노을의 마지막 90일을 조명해 주기 위한 역할로서 등장한다.

영화의 모든 구성이 한노을에게 철저하게 집중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촬영 과정에서는 부각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편집을 거치고 나자 티가 확 났다.

신을 따로 떼어 놓고 볼 때와 달리, 전체적인 그림을 놓고 보니 모든 캐릭터들의 행동이 한노을의 행동에 제각각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거기에 박의준 감독이 치밀하게 준비한 몇몇 복선과 장치들 또한 빛을 발했다. 아직 편집이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인상적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편집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연출이 더해진다면?

“표현의 아쉬움으로 인해 추가 촬영이 필요할 것 같은 몇몇 부분을 제외하면, 대체로 감독님의 의도대로 촬영이 잘 진행된 것 같네요.”

“네. 제가 봐도 결과물이 잘 나온 것 같습니다.”

안시현은 확신했다.

지금까지 촬영한 분량만 놓고 보면, 일부 아쉬운 부분을 제외하고는 박의준 감독이 의도한 대로 최선의 결과물이 나왔다고 말이다.

특히나 『90일』의 주요 신 중 하나인 신 55에서의 몰입감이 장난 아니었다.

동시에 안시현은 책임감 또한 느꼈다.

“이거……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네요.”

“너무 엄살 떠는 거 아니에요?”

“저 진짜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건데요?”

“웃으면서 그러면 신뢰가 안 되잖아요.”

지금까지 촬영한 결과물이 좋다는 건, 해외 로케이션에서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는 촬영 기간에 제약이 있다는 거다.

보름.

그 안에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야 한다.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연장은 없다.

부담을 느낄 법도 하건만…….

말한 것과 달리 안시현은 여유가 넘쳤다. 부담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준비를 철저하게 했기에 자심감이 더 큰 것이 사실이었다.

오히려 안시현은 해외 로케이션이 기대됐다.

한시라도 빨리 해외 로케이션에서 전력을 다해 연기하고 싶었다. 이미 『90일』의 완성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날.

안시현은 박의준 감독과 함께 저녁 늦게까지 편집본을 확인하며 연출과 추가 촬영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뒤늦게 스케줄을 끝내고 극단에 모습을 드러낸 최정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오전에 온다더니 아직까지 편집본 보고 있는 거야? 두 사람 다 대단하다, 대단해.”

엄청난 열정을 자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90일』의 결과물이 노력에 비례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해외 로케이션을 위한 출국 전.

안시현은 오전을 연습에 할애한 뒤, 오후에는 육아 및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에 집중했다.

출국 하루 전 날.

안시현이 김진모의 집을 방문했다.

간만에 서로 쉬는 날이 겹치며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밖에서 먹지 굳이 집까지 부르고 그러냐.”

“삼겹살은 신문지 깔아 놓고 집에서 구워 먹는 게 제 맛 아니겠냐? 간만에 둘이 보는데 사인 공세에 시달리기 싫기도 하고.”

“뭐,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겠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촬영 언제 마무리되냐?”

“다음 주쯤? 밤에 또 촬영 나가야 돼. 이번 작품 끝나면 연말까지 작품 안 하고 푹 쉬려고. 연달아 드라마 두 개 하니까 몸이 남아나질 않는 느낌이야.”

“그래도 작품 선택은 잘했더만 뭐.”

“크흐흐. 내가 또 작품 보는 눈이 좋잖냐. 뭐, 너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야.”

“분위기를 보면 2년 연속 대상 수상, 충분히 가능할 것 같던데? 시청률도 나쁘지 않아.”

“아, 진짜 그러면 무대 위에서 대성통곡 한다.”

2007년.

김진모는 STS에서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생애 첫 연기대상 수상의 영애를 안았다.

그리고 2008년 여름.

방영 전까지만 하더라도 혹평 일색이었던 16부작 의학 드라마 『바이탈 사인』이 10회에 시청률 30%를 돌파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 중심에는 열정 넘치는 레지던트 박효상을 완벽하게 연기한 김진모가 존재했다. 김진모의 열연과 중견 배우들의 든든한 뒷받침이 『바이탈 사인』의 흥행을 이끌었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거기에 억지 러브라인을 만들지 않고 철저하게 레지던트 박효상의 성장기에만 집중한 것 또한 주효했다.

호불호가 갈리는 의학 드라마임에도 시청률 30%를 돌파하자, 일각에서는 김진모가 일찌감치 MBS 연기대상을 확정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시청률과 연기력, 두 가지 모두 확실하게 잡았으니 지극히 당연한 평가였다.

이에 김진모 또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MBS에서 2008년에 시청률 30%를 돌파한 드라마는 『바이탈 사인』을 제외하면 단 하나인데, 주연 배우의 연기력을 놓고 보면 『바이탈 사인』 쪽이 우세다.

2년 연속 연기대상 수상.

비록 방송사는 STS와 MBS로 다르지만, 2년 연속 수상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해내면 내가 연기대상에서는 널 앞서게 되는 거네. 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경쟁자가 마땅히 보이지 않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MBS가 더 이상 너랑 일 안 하려는 게 아니면 무조건 줄걸?”

“그러기를 바라고 있다. 넌 어때? 그놈의 예술영화 촬영은 할 만하냐?”

“지난주에 1차 편집본 확인했는데 괜찮더라. 추가 촬영 별로 안 해도 될 것 같더라고. 해외 로케이션만 잘 마무리하면 완벽할 것 같아.”

“해외 로케이션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나?”

“어. 그래서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있잖냐.”

삼겹살은 잔뜩 굽고 있는데, 정작 먹는 건 김진모 혼자였다. 안시현은 삼겹살 대신 집에서 직접 준비해 온 과일을 먹고 있었다.

해외 출국 전에 보다 철저한 몸 관리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더 마른 몸매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며 김진모가 쓴 웃음을 흘렸다.

“근육질 몸매 보기 좋았는데, 이러다 조만간 완전 깡마른 몸매 되는 거 아냐?”

“촬영 끝나면 다시 복구해야지.”

“고기 먹자고 불렀는데 나 혼자 먹으니까 좀 미안한데? 집에 좀 가져가서 제수씨랑 나눠 먹을래?”

“응. 네 형수가 좋아하겠다.”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김진모는 준비한 삼겹살 중 절반을 덜어 내서 안시현이 가져갈 수 있게 싸 주었다.

식사가 끝난 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김진모가 물었다.

“요즘 재미있냐?”

“어. 완전 좋아. 이번 작품은 흥행 여부 신경 쓰지 않고 선택한 거라서 마음이 편해. 나라는 배우가 한 사람의 마지막을 얼마나 공감되게 표현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거든. 너는?”

“대사에 의학 용어 있는 거 빼면 좋아. 와, 저번에 1분짜리 대사에 의학 용어 빼곡한 거 보고서 외우다가 토할 뻔했잖아.”

“덕분에 원 테이크로 유명세 좀 탔지.”

“난 그게 그렇게 난리가 날 줄 몰랐잖아.”

김진모와 안시현 중 원 테이크로 유명세를 탄 건 대부분 안시현 쪽이었다. 김진모의 경우 원 테이크보다는 연기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가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호평을 받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김진모가 『바이탈 사인』에서는 1분짜리 대사를 포함, 도합 3분이 넘는 신의 원 테이크에 성공하면서 제법 유명세를 탔다.

MBS 측에서 홍보 효과가 있을 거라 판단해서 공식 홈페이지에 원 테이크 원본 영상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의학 용어를 막힘없이 내뱉으며 환자를 수술하겠다고 눈물로서 호소하는 김진모의 연기는 일품이었다. 캐릭터에 얼마나 몰입했는지, OK 사인이 나고도 한동안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안시현의 장점이었던 엄청난 몰입도를 김진모 또한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안시현은 그런 김진모가 너무 좋았다.

김진모가 배우로서 발전하면 할수록, 자신 또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각오를 다지게 됐으니까.

해가 질 무렵.

안시현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김진모의 집을 나섰다. 김진모는 그런 안시현을 주차장까지 배웅해 줬다.

시동을 거는 안시현을 향해 김진모가 운전석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시현아, 우리 앞으로 20년만 이렇게 더 해 먹자. 너 없으면 따라잡을 사람 없어서 재미없으니까, 내년에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한 번 더 타자. OK?”

김진모의 말에 안시현이 피식 웃었다.

“너나 잘하세요. 뒤처지면 버리고 갈 거니까.”

“와. 매정한 거 봐라.”

회귀 후 어느덧 10년째가 됐다.

그럼에도 김진모와의 우정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회귀 전보다 더 관계가 탄탄해졌다는 느낌까지 받고 있는 상황이다.

안시현은 진심으로 바랐다.

20년 후에도 김진모와 서로 연기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이기를 말이다.

*   *   *

다음 날.

『90일』의 스태프들이 공항에 모였다. 안시현이 가장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내며, 해외 로케이션을 위해 출국한 15명의 인원이 모두 집합했다.

원래는 더 적은 인원이 가려고 했지만…….

원활한 촬영을 위해 박의준 감독과 안시현과 양소라 외 12명의 스태프가 함께하게 된 것이었다.

수속을 하기 전.

박의준 감독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입을 열었다.

“저희 영화의 흥망성쇠를 가를 해외 로케이션을 앞두게 돼서 긴장되네요. 아무쪼록 서로 얼굴 붉히지 않고 기분 좋게 귀국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통역사는 현지 공항에서 마중을 나오기로 했습니다. 아, 그리고 마중 나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을 겁니다.”

“가이드라도 구한 건가요?”

“가이드는 통역사가 같이해 줄 겁니다. 촬영에 도움을 주실 분은 아니고, 특별 손님이 있습니다.”

박의준 감독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역사나 가이드가 마중을 나오는 거야 원활한 촬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지만, 손님이 마중을 나온다는 건 다소 의아한 부분이었다.

이에 박의준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시현 씨, 소라 씨. 예술영화 보세요?”

“저야 잡식성이라 이것저것 다 봐요. 해외 쪽 예술영화에서 영감을 받을 만한 명작이 많기도 하고요.”

“전 유명한 작품 정도만……. 근데 갑자기 그건 왜요?”

“프랑스 최고의 거장께서 저희의 해외 로케이션 일정을 지켜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순간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은 안시현이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바로 『편지』의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으로 인해 프랑스에 갔을 때, 곽상필과 친분이 두터운 거장이 안시현에게 호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심지어는 안시현에게 함께 작품을 할 생각이 없냐고 대놓고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그런 그가 『90일』의 해외 로케이션을 지켜보겠다고 한다.

안시현은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곽상필 고문님 때문이겠지.’

곽상필이 박의준 감독을 후계자로 낙점했기에, 프랑스의 거장에게 박의준 감독을 한 번 지켜볼 생각이 없냐고 연락을 한 것이리라.

겸사겸사 그가 관심을 드러냈던 배우인 안시현이 주연을 맡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시현 씨는 그분을 뵌 적 있겠네요.”

“네. 황금영화제 때 같이 식사도 했었습니다. 젠틀한 분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간만에 뵙는 건데 기분이 어때요?”

박의준 감독에 질문에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재밌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해외 로케이션은 안시현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정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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