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7화 (147/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8화>

148화. 재밌겠는데?

“답변을 보류하겠습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이 시놉시스, 시나리오를 봐야 감이 올 것 같아서요. 시나리오 주시면 다시 검토해 볼게요.”

“다른 배우들은 제가 함께하자고 하면 고민하지 않던데, 시현 씨도 그래 줄 순 없을까요?”

“죄송하지만 전 감독님과 작가님의 명성만을 보고서 작품을 선택하지 않아서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택했던 작품이 하나 있긴 하지만, 제 버킷리스트였으니 논외로 쳐야 하고요. 시나리오 검토해 본 뒤에 다시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안시현이 답변을 보류한 건, 기욤 뒤자르댕이 보여 준 시놉시스만으로는 자신이 작품 내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안시현이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없는 건 아니다.

자신이 작품 내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를 중요시한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작품 내에서의 역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출연을 고사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기욤 뒤자르댕?

그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거장인 건 사실이지만, 그 사실이 맡을 배역이 무조건적으로 마음에 들 거라는 걸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지금껏 안시현이 검토를 하기 전부터 무조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작품은 단 하나, 『편지』가 유일했다.

그 외에는 예외가 없었다.

아무리 회귀 전의 기억이 있고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해도, 최소한 시나리오의 일부라도 보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에게도 당당하게 시나리오를 요구한 것이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와 작품을 하는 걸 포기할 생각이었다.

무리해서 할리우드에 도전할 필요는 없으니까.

안시현의 당당한 제안 이후.

“하하하!”

기욤 뒤자르댕이 박장대소했다.

시나리오를 요구하는 안시현의 태도에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 좋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배우라면 감독의 명성이나 제작비 규모 따위가 아닌, 자신이 맡을 배역이 작품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기준으로 선택하는 게 맞죠. 시나리오는 준비되는 대로 줄게요. 부디 제 시나리오가, 시현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안시현이 기욤 뒤자르댕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욤 뒤자르댕이 자신에게 건네줄 시나리오를 기대하며 말이다.

*   *   *

북유럽 여행을 떠날 무렵, 한노을의 몸 상태는 진통제가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만큼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한노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야 해요.”

북유럽에 가야 한다고, 반드시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이루고야 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주치의도, 최주은도 그런 한노을을 말리지 못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한노을의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막는 건, 북유럽 여행을 가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으니까.

주치의가 할 수 있는 건…….

진통제를 최대한 많이 처방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노을과 최주은이 북유럽 여행을 떠났다.

한노을은 진통제에 의존한 채 고통을 최대한 참으며, 그토록 오고 싶었던 북유럽 곳곳을 눈에 담았다. 북유럽의 주요 관광지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하여 남겼다.

그 모습을 보며 최주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돼요?”

“이제 서로 필요한 건 다 아는 사이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궁금한 게 있나요?”

“사진 찍는 거요. 굳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는 이유가 뭐예요?”

“별 의미 없어요. 그냥 이쪽이 더 기록을 남긴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즉석에서 확인하고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어도 되기도 하고요. 렌즈를 통해 본 세상과 인화된 세상이 다른 경우도 많잖아요.”

“으음.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네요.”

“괴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노을은 마케팅 회사 대표일 때부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기록을 남기는 걸 즐겼다. 버킷리스트를 하나둘씩 해 나가는 와중에도 폴라로이드 사진기는 항상 그의 옆을 따라다녔다.

다만 극중에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예 없었다. 대놓고 보여 주면서도 의아하리만큼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대한 언급을 지양했다.

북유럽에 와서야 최주은이 질문을 하는 것으로 처음 언급이 된 것이다.

‘정말 별 의미가 없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최주은의 의문을 품었다.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과 달리, 폴라로이드 카메라에 대한 한노을의 집착은 흡사 광적이라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지만…….

최주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도 한노을이 속내를 숨긴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문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노을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폴라로이드 사진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기보단, 최대한 그가 바라는 마무리를 준비하는 게 맞았다.

“앞으로의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이제 다 끝나가요. 산타 빌리지 갔다가, 사리셀카로 이동할 거예요.”

“이제 슬슬 끝이 보이네요.”

한노을이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힘든 내색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 최주은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상태를 살폈다.

“진통제 좀 더 놔 줄까요?”

“괜찮아요. 버틸 만해요. 사리셀카까지 가려면 최대한 아껴야죠.”

“진통제 많이 챙겨 왔으니까 그런 걱정하지 말고 노을 씨 몸부터 챙겨요. 참는다고 다가 아니잖아요.”

“진짜 참을 만해서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애써 무덤덤한 척한 것과 달리, 북유럽 여행을 다니며 한노을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진통제로도 감당이 안 될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남은 스케줄은 산타 빌리지에 들렀다가 마지막 목적지인 사리셀카에 가는 것뿐이었지만…….

그때까지 몸이 버텨 줄지 알 수 없었다.

‘사리셀카까지만 가자.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제가 그때까지만 버텨 주라.’

한노을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음을,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이다.

*   *   *

산타 빌리지에서의 촬영까지 순조롭게 끝마친 후, 사리셀카로 이동하는 기차 안.

박의준 감독이 남은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

“사리셀카에 도착하면 짐을 풀고, 다음 날까지 푹 쉬면 됩니다. 마무리가 남은 만큼 휴식 후,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고 촬영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틀이라……. 좋네요.”

일정을 들은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약 이틀 동안의 휴식 동안, 한노을의 마지막 순간을 표현할 준비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고 나서 푹 쉬자.’

안시현이 생각했을 때, 『90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리셀카에서 촬영하게 될 세 신이다. 이 신들이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작품성이 갈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당연히 핵심은 안시현의 연기다.

양소라의 연기도 중요하지만, 최주은은 한노을의 캐릭터성을 부각하기 위한 효율적인 장치라고 봐야 한다.

가장 중요한 기둥이 흔들리면 아무리 장치가 좋아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못한다.

『90일』을 촬영하는 내내 안시현은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박의준 감독의 완벽주의자 성향으로 인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원 테이크도 두 번이나 해냈을 정도다.

문제는 마무리가 완벽하지 못하다면 지금까지의 열연도 의미가 퇴색된다는 데에 있다.

안시현은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틀 동안 이를 악물고 최종 점검을 해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리라 거듭 다짐했다.

사리셀카의 한 호텔에 도착해 짐을 푼 직후.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과 함께 호텔 밖으로 나갔다. 호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과일 가게에 가서, 이틀 동안 먹을 최소한의 과일을 구입한 뒤 돌아왔다.

“그럼 이틀 후에 뵐게요.”

“마지막이니만큼 더욱 기대되네요. 황금영화제 때처럼 소름이 돋기를.”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핀라드에서의 해외 로케이션 내내 안시현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던 기욤 뒤자르댕은, 이틀 후에 보자는 안시현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토를 달기는커녕 오히려 안시현을 응원했다.

이틀 동안의 최종 점검을 통해서 안시현이 보여 줄 한노을의 마지막 모습이 궁금했으니까.

‘상필이 보여 준 『90일』의 시나리오대로라면, 결국 한노을의 마지막 순간이 완성도를 결정할 수밖에 없어.’

박의준 감독에게 흥미를 느낀 이후, 곽상필은 『90일』의 시나리오를 여러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손수 번역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기욤 뒤자르댕에게 보여 줬다.

덕분에 기욤 뒤자르댕은 『90일』의 시나리오를 파악하고 있었다.

해외 로케이션에 참여한 건 안시현이라는 배우에 대한 호기심과 캐스팅 제안 때문이기도 했지만, 『90일』의 핵심 신들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두 눈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 또한 존재했다.

딱 봐도 난이도가 높아 보이는 신들이다. 안시현에게도 완벽한 몰입을 위한 시간이 필요할 터.

기욤 뒤자르댕은 이틀 후의 짜릿함을 기대하며 차분하게 기다려 주기로 했다.

*   *   *

흔히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들 한다.

안시현은 그 표현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배우로서의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변화를 시도하고 성공했지만, 자신의 뿌리는 메소드에 있음을 잊지 않게 해 줬으니까.

배우로서의 중요한 선택의 순간, 안시현은 항상 메소드를 통해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사리셀카에서의 촬영에서도 안시현은 메소드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다만 최근 몇 번 메소드를 사용했을 때와는 마음가짐이 전혀 달랐다.

‘나는 한노을이다.’

정혜영에게 연락해서 이틀 동안 연기를 위해 연락이 안 될 거라고 말한 뒤, 안시현은 스스로를 지웠다. 자신의 모든 사고를 한노을에게 맞췄다.

배우 안시현이 아닌 사리셀카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겸하하게 맞이할 췌장암 환자 한노을이 되기로 했다.

연기법에 변화를 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배역에 극한으로 몰입하는 방식을 통해서 완벽한 한노을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안시현이 시나리오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이틀 동안 단 한순간도 손에서 시나리오를 놓지 않았다. 잠을 자는 그 순간까지도 시나리오를 손에 쥔 채였다.

‘나는 췌장암 환자다. 뼈와 장기에 암세포가 모두 퍼졌고, 진통제로도 통증을 줄이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다. 그리고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한다.’

한노을의 육체적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는 없다. 죽어라 굶는다고 해서 장기와 뼈에 암세포가 모두 전이된 한노을의 고통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회귀 전 안시현은 한노을과 같은 병을 앓았고, 치료를 받았음에도 병세가 악화되며 삶의 끈을 놓았었다.

그때의 기억이 존재하기에 한노을의 고통에 완벽히 공감하고 캐릭터에 몰입하는 게 가능했다.

이틀의 휴식 시간.

안시현이 아주 조금씩,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을 거쳤다.

같은 시간.

양소라 또한 안시현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방에 틀어박힌 채 시나리오를 붙들고 있었다. 식사조차도 룸서비스를 불러 대충 때울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다.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배님에게 민폐를 끼치면, 배우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입증하는 꼴이야.’

해외 로케이션을 진행하며 제법 많은 NG가 났다. 촬영을 하며 NG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기에, 합당한 피드백을 제외하면 스태프들 중 그 누구도 NG와 관련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양소라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외 로케이션 과정에서 난 수많은 NG 중, 단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양소라에게 책임이 있었으니까.

마지막 세 신만큼은, 『90일』의 핵심이 될 장면들에서는 최대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NG가 나더라도 횟수를 줄여야만 해. 선배님의 좋은 연기를 방해하지 않을 수준으로 말이야.’

이틀 뒤.

촬영을 위해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기욤 뒤자르댕이 가장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동시에 그는 흥미를 느꼈다.

‘이거, 재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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