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8화 (14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49화>

149화. 다행이에요

지난 이틀.

기욤 뒤자르댕은 기대감을 잔뜩 안은 채 시간을 보냈다. 안시현이 『90일』의 피날레를 장식할 세 신을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시현이 어떤 식으로 준비를 하고 있을까 확인하고 싶었다. 방 안에 미리 몰래카메라라도 설치해 놓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헛된 망상까지 할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양소라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90일』에 출연하는 조연 중 최주은의 비중이 가장 큰 건 사실이지만, 결국 최주은 또한 한노을을 받쳐 주기 위한 역할에 불과하니까.

비단 기욤 뒤자르댕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양소라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최주은을 잘 연기해 주기를 바라는 정도였다.

하지만…….

사리셀카에서의 세 신을 촬영하기 위해 호텔 로비에 모였을 때, 기욤 뒤자르댕은 양소라의 변화를 대번에 눈치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분위기 자체가 이틀 전과 달라져 있었으니까.

‘알을 깨고 나왔군.’

기욤 뒤자르댕은 배우의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감독이지만, 때론 사소한 계기가 배우를 단기간에 성장시키는 걸 자주 목격해 왔다.

지금의 양소라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NG에 부담을 느끼는 거 같더니, 그걸 이런 식으로 극복할 줄이야.’

양소라는 NG에 과한 부담을 느꼈다.

오죽하면 핀란드에서 그녀를 처음 본 기욤 뒤자르댕마저도 NG가 날 때마다 정신적으로 흔들린다는 걸 대번에 파악할 정도였다.

박의준 감독의 피드백과 안시현의 적절한 조언이 아니었다면, 진즉 연기력이 무너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NG에 대한 부담감이 심했다.

NG에 대해 부담을 느끼거나 카메라 앞에만 서면 위축되는 배우들은 제법 많다.

그런 경우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떻게든 이겨 내면서 좋은 배우로 성장하거나, 끝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자리를 잡지 못하거나.

지금의 양소라는 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박의준 감독과 안시현 또한 양소라의 변화를 느꼈다.

안시현은 양소라의 극적인 변화를 진심으로 반겼다.

회귀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배우로서 성장하기 시작한 양소라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여 줄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번 촬영, 소라를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일만 잘하면 되겠구나.’

『90일』의 대미를 장식할 세 신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양소라의 연기력에 대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진심으로 기뻤다.

이전처럼 양소라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할 필요 없이, 오롯이 자신의 연기에만 집중하면 될 테니까.

박의준 감독의 경우…….

“동선상 끊어 가야 하는 부분이 아니라면, 끊어 가지 않겠습니다.”

“음. 확실히 시현 씨의 상태가 남달라 보이긴 하네요. 알겠습니다. 주연 배우가 작정하고 준비한 만큼 최고의 그림을 담아 보겠습니다.”

카메라 감독에게 동선 문제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여러 번 나눠 촬영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았다.

이에 카메라 감독은 안시현이 작정하고 사리셀카에서의 촬영을 준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소라 씨가 NG에 부담만 안 느껴 준다면,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만 있다면 생각 이상으로 더 좋은 그림이 나올 거야.’

안시현은 『90일』을 촬영하는 내내 매번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 줬다. 연기와 관련해서 아쉬운 부분을 피드백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다만…….

박의준 감독이 안시현에게 기대했던, 『형아, 동생』이나 『편지』에서 보여 줬던 폭발적인 연기력은 신 55 정도를 제외하면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이유야 여럿 있었지만…….

온전히 연기에만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 가장 컸다.

안시현이 후배들의 조언자 역할을 자처한 건 사실이지만, 촬영 중반부가 넘어가면 알아서들 잘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촬영이 거듭될수록 다들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내며 안시현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양소라였다.

배우 교체를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NG에 대한 과한 부담감을 호소하는 양소라의 모습은 안시현이 한노을에 100% 몰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건 양소라의 마음가짐이 이전과 전혀 달라졌다는 게 촬영 전부터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안시현이 한노을의 마지막 순간에 100% 몰입하기 위한 여건을 만들기에는 말이다.

*   *   *

산타 빌리지에 도착한 최주은은 감탄을 토했다.

북유럽에서 본 대부분의 관광 명소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이국적인 풍경이었지만, 산타 빌리지는 그중에서도 정점을 찍었다.

물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핀란드에 온 이후, 한노을의 상태가 눈에 띄게 악화되고 있었으니까. 딱 봐도 진통제로도 더 이상 고통이 완화되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최주은의 한노을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핀란드에서의 여행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순간.

한노을이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이룬 뒤에 눈을 감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마지막 목적지인 사리셀카에 도착했을 때.

혹한의 날씨에도 식은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진 한노을이, 최주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해가 질 때까지만 혼자 있게 해 주겠어요?”

“하지만…….”

“힘들면 바로 연락할게요. 부탁이에요.”

“……네.”

최주은은 한노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하루 종일이라면 기를 쓰고서라도 반대했을 테지만, 반나절이라고 하니 난감했다. 게다가 한노을의 끝이 임박했다는 걸 느끼고 있기에 그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거절하기 어려웠다.

결국 한노을은 반나절의 자유 시간을 얻었다.

한노을이 해가 질 무렵 숙소에 들어올 때까지, 최주은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한노을을 보고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한노을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한노을은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위해서 남은 기력을 모두 쥐어짜며 필사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기에 최주은은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내일까지만,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이룰 때까지만 한노을이 버텨 주기를 말이다.

다음 날.

“좋은 아침이에요, 주은 씨.”

“컨디션 좋아 보이네요.”

“최근 들어서 가장 좋아요. 봐요. 식은땀도 안 나고, 몸도 안 떨리잖아요.”

한노을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이후 처음으로 식은땀을 흘리지 않은 채 최주은과 아침 인사를 나눴다.

비정상적으로 좋은 컨디션을 보며 최주은은 확신했다.

회광반조.

막연하게 멀지 않았다고만 생각했던 한노을의 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말이다.

순간 최주은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애써 무덤덤한 척, 앞으로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한노을을 안고서 펑펑 울고 싶었지만…….

“그 정도면 진통제 안 맞아도 되겠는데요?”

“아, 그건 좀…….”

“농담이에요. 진통제는 필수죠. 이리 와요.”

애써 감정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순간, 한노을의 동공에 새겨질 자신의 모습이 웃고 있기를 바랐으니까. 그래야 한노을이 자신에게 미안해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   *   *

한노을의 마지막 버킷리스트는 오로라를 배경으로 셀카 찍기였다.

“와…….”

“아름답네요.”

마침내 보게 된 오로라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때마침 날도 좋아서 이번 달 들어 가장 아름다운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덤이었다.

한참 동안 멍하니 오로라를 바라본 이후.

한노을이 가방에서 폴라로이드 사진기와 함께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색이 바랜 사진을 바라본 최주은의 두 눈이 커졌다.

한 소년이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부모님과 함께 오로라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은…….”

“22년 전, 이곳에서 부모님과 찍은 사진이에요. 이곳에 다시 와서, 이 사진을 들고 셀카를 찍고 싶었어요. 제가 부모님과 함께한 마지막 여행이었거든요.”

“…….”

한노을이 무덤덤하게 셀카를 찍었다. 결과물을 확인한 뒤, 미소를 지으며 최주은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주은 씨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버킷리스트를 모두 이룬 기분이 어때요?”

“후련해요. 진심으로요. 오로라 좀 더 보다가 숙소로 들어갈까요?”

최주은이 몸을 돌리며 대답했지만…….

“너무 길게 구경하지는 마요. 날이 너무 추워서 노을 씨 몸에 좋지 않…….”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불과 몇 초.

그사이 한노을이 눈밭 위에 쓰러져 있었다.

버킷리스트를 해 나가는 내내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던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떨어트린 채로.

“노을 씨! 정신 차려 봐요! 노을 씨!”

한노을은 즉시 병원으로 후송됐다.

병원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한노을이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힘없이 툭 최주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노을 씨, 정신 들었어요. 저 알아보겠어요?”

“치료…… 안 했죠?”

“안 했어요, 안 했다고요. 그냥 병원으로 가고만 있는 거니까 화내지 마요.”

“마지막까지 제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요.”

한노을이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최주은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눈앞이 흐려지고 말았다.

한노을이 최주은의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속삭였다.

“다행이에요.”

“뭐가요?”

“마지막 순간만큼은, 합리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한 거요. 그리고…… 주은 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죽고 나서도 제 마음대로 할 거예요. 귀 좀 가까이 가져다 대 줘요. 목소리가 잘 안 나와요.”

최주은이 한노을의 얼굴 쪽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 한노을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서 속삭였다.

동시에 최주은의 두 눈이 커졌다.

한노을의 귓속말이 워낙 놀랄 내용이기도 했거니와, 그 말을 함과 동시에 한노을의 손이 바닥을 향해 툭 떨어졌기 때문이다.

한노을의 바이탈 사인이 멈췄다.

“아…….”

최주은이 한노을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소를 지은 채 마지막을 맞이한 한노을을 보며, 울컥하는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서럽게 속삭였다.

“바보 같은 사람…….”

*   *   *

안시현은 한노을의 마지막 순간을 박의준 상상하던 대로 완벽하게 표현해 줬다.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애써 멀쩡한 척하는 모습도, 22년 만에 오로라 앞에 서 감상에 젖은 모습도, 구급차 안에서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 생명이 다하는 모습까지.

한노을의 바이탈 사인이 멈춘 순간, 정말로 안시현의 바이탈 사인이 멈췄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스태프마저 있을 정도로 최고의 메소드 연기였다.

양소라 또한 열연을 펼쳤다.

한노을의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고서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 주려 하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감정을 찾지 못하고 숨죽여 흐느끼는 연기가 일품이었다.

사리셀카에서의 마지막 촬영은 동선 이동이 많다 보니 수차례 끊어서 촬영해야만 했다.

때문에 한 신을 연속으로 촬영할 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몰입도를 유지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건만, 안시현과 양소라 모두 한순간도 집중력이 흔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미소를 지은 채 후련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한노을과 복받치는 감정을 토해 내는 양소라의 모습이 대조되는 건 박의준 감독이 원한 최고의 기름이었다.

“OK.”

박의준 감독은 고민하지 않았다.

『90일』을 촬영하며 세 번째로, 촬영본을 확인하지 않고 OK 사인을 냈다.

사리셀카에서의 세 신을 촬영하는 동안, NG가 난 건 고작 세 번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중.

안시현과 양소라의 실수로 인해 NG가 난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완벽한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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