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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49화 (14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0화>

150화. 거절했어요

해외 로케이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헬싱키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사흘의 시간이 남았기에, 사리셀카에서 하루를 더 머문 뒤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헬싱키로 이동하게 됐다.

덕분에 헬싱키에 가기 전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회식을 하고 싶지만…… 현지 식사에 입맛에 안 맞는 분들이 맞으시니 크랭크업을 한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회식은 역시 한식으로 해야 제맛이죠!”

“아직 마무리가 남았으니 그때까지만 다들 힘냅시다! 아자아자, 파이팅!”

해외 로케이션이 끝난 거지 촬영이 모두 마무리된 게 아니다. 크랭크 업까지는 아직 추가 촬영이 남아 있다.

스태프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귀국 전까지만 긴장을 푼 채 즐기기로 했다.

그날 저녁.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과 기욤 뒤자르댕은 사리셀카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세 사람이 식당 한가운데에 있는 난로에서 몸을 녹이는 사이, 수프와 빵이 먼저 테이블 위에 세팅됐다.

안시현은 빵을 수프에 푹 적셔 흐물흐물한 상태로 먹으며 맛을 음미했다.

“와…….”

“황홀해요?”

“제가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맛있어요.”

“최근 한 달 동안은 극단적으로 식단 관리를 했으니까 그럴 만도 하죠. 천천히 드세요. 급하게 먹다가 탈 나면 안 되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스테이크 백 덩어리라도 먹고 싶어요. 아. 역시 사람은 잘 먹고 살아야 하나 봐요.”

『90일』을 준비하면서 안시현은 근육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고, 최근 두어 달은 마른 몸매를 만들기 위해서 식단을 극단적으로 관리하기까지 했다.

그 탓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게 오랜만이었다.

안시현은 수프와 빵을 잔뜩 먹고, 스테이크까지 배불리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간만에 제대로 식욕을 충족시킨 뒤, 안시현의 시선이 기욤 뒤자르댕에게로 향했다.

“이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시나요.”

“일단은 돌아가는데,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한국에 오신다고요?”

“아, 상필이 말하지 않았나 보군요. 제 차기작 오디션을 서울에서도 진행하기로 해서요.”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기욤 뒤자르댕의 차기작 시놉시스를 보면 한국인이 출연하는 건 맞지만, 주연 배역 하나에 기껏해야 비중이 적은 조연이나 단역 한둘이 전부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오디션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욤 뒤자르댕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에서의 오디션을 예고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안시현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감독님, 혹시…… 마지막 작품입니까?”

“네. 상필에게 『편지』가 마지막 작품이었듯, 시현에게 보여 준 시나리오가 내 마지막이에요. 그래서 단역 한 명까지도 제 눈으로 보고 뽑으려고요.”

그랬다.

기욤 뒤자르댕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오디션을 감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안시현에게 과하게 집착하는 것도, 스케줄이 잡혀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시놉시스를 보여 준 것도 마지막 작품을 앞두고 있다고 하면 모두 이해가 됐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마음에 드는 배우들과 후회하지 않을 결과물을 남기기 위해서 안시현이라는 배우를 반드시 필요로 한 것이다.

‘마지막 작품이라…….’

안시현 또한 결국 사람이다.

작품을 결정하는 데에 감정적인 부분이 배제될 수는 없다. 실제로 안시현이 지금껏 출연한 작품 중 판단에 감정이 관여한 경우는 꽤나 많다.

물론 기욤 뒤자르댕과 인연이 깊은 건 아니다.

안시현이 그의 영화를 좋아하고, 『편지』가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곽상필로 인해 약간의 친분을 쌓은 것이 전부였다.

인연은 없지만…….

“시나리오, 언제까지 주실 수 있습니까?”

“오디션 시작하기 전에 가능해요. 10월 안이요.”

“좋네요. 드라마 시작하기 전에 시나리오 보고 출연 계약서 쓰면 되겠네요.”

욕심은 났다.

무려 기욤 뒤자르댕이다.

세계 영화사에 수많은 업적을 남긴 명감독이다. 가장 최근에 메가폰을 잡았던 작품마저도 황금영화제 5개 부문에서 수상을 하며 극찬을 받았다.

그런 그가 마지막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심지어 거대 자본이 투자될 할리우드 작품이다. 안시현이 얼핏 듣기로는, 블록버스터급까지는 아니라도 제작비로는 고생할 일이 없다고 했다.

예술영화임에도 거액 투자를 이끌어 낸 건 기욤 뒤자르댕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번 기회에 할리우드 진출도 해 보고 좋은 거지.’

배우라면 대부분 할리우드 진출을 꿈꾼다.

안시현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 또한 기회가 된다면 할리우드 진출을 하고 싶었다.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에, 그것도 주연이라면 최고의 기회다. 어쩌면 안시현의 배우 인생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안시현은 시나리오를 보고 결정을 내리려던 기존의 계획을 철회하고,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다.

기욤 뒤자르댕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시현의 결단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가장 까다로운 캐스팅 라인 하나를 해결한 덕에 속이 후련해졌다.

“고마워요. 덕분에 주연을 모두 확정한 채 오디션을 준비할 수 있게 됐어요.”

“죄송한데, 확정된 건 아니에요.”

기욤 뒤자르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연 계약서를 쓰겠다고 해 놓고, 확정이 난 게 아니라는 게 뭔 소리가 싶었지만…….

잠시 후.

말뜻을 파악한 기욤 뒤자르댕이 경악했다. 안시현의 말도 안 되는 발상에 어이가 없었다.

“오디션에 참여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오디션 연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참여해야죠. 오디션 없이 캐스팅 라인 확정하는 것보다 당당하게 오디션을 통해서 연기로 인정받는 게 훨씬 좋은 그림일 거예요. 오디션 영상을 보여 주면 저에 대한 반발도 줄일 수 있을 테고요.”

무려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이다.

출연 배우나 투자사들 또한 캐스팅 라인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안시현이 좋은 배우인 건 맞지만, 할리우드의 시선으로 보면 성에 안 차는 배우를 데리고 왔다 생각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실제로 안시현은 한국 배우가 좋은 조건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려고 하다가 무산되거나, 어렵사리 하더라도 조건이 낮아지는 경우를 꽤나 많이 봐 왔다.

안시현은 그런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이왕 할리우드에 진출할 거라면 다른 배우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좋은 조건에 하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려면 차라리 오디션을 보는 게 나을 거라고 봤다.

“저야 그러면 좋은데…… 괜찮겠어요?”

기욤 뒤자르댕이라고 해서 오디션을 보려고 하는 안시현의 의중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이왕 안시현과 작업을 할 거라면 번듯하게 주연으로 캐스팅해서 최대한 좋은 조건을 보장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실제로 투자사에게 그와 관련된 확답을 듣기도 했고 말이다.

문제가 있다면 대중들의 시선, 그리고 함께 연기를 할 배우들의 시선이다.

안시현에 대해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속된 말로 낙하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 우려를 없애려면 오디션을 보면 된다.

고민 끝에 기욤 뒤자르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시현의 진심에 감동한 채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시현. 최대한 빨리 시나리오 전달해 줄 테니까, 오디션 준비 잘해 줘요.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 자신 있는 거죠?”

“자신 없으면 덥석 계약했겠죠.”

안시현이 기욤 뒤자르댕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동시에 다짐했다.

연말에 예정된 오디션에서, 모든 경쟁자들을 제치고 자시의 가치를 증명하고 말겠다고.

*   *   *

귀국 이후.

『90일』의 추가 촬영이 보름 동안 진행됐다.

편집 과정에서 다소 아쉽다고 느꼈거나 추가했으면 하는 부분들, 아직 촬영이 진행되지 않은 일부 신들의 촬영하느라 다들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바쁜 시간이었지만 촬영장에서는 연일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나 추가 촬영 막바지 즈음에는 체력적으로 지칠 시기임에도 분위기가 초반보다 더 좋았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단역으로 출연했던 몇몇 배우들이 오디션을 통해 차기작을 결정지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중 몇 명은 제법 괜찮은 배역을 따냈고, 조건 또한 좋은 편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 덕분에 지난 몇 달 동안 배우로서 많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배우를 그만두는 그 순간까지, 선배님은 제게 최고의 멘토일 겁니다.”

그럴 때마다 배우들은 안시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안시현은 촬영장에서 항상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고, 연습 장소가 마땅히 않고 환경이 열약한 후배 배우들을 위해 기꺼이 같이 연습하기를 자청하곤 했었다.

그런 안시현에게 후배들이 감사의 뜻을 전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리라.

“잘되면 나중에 밥이나 사 줘. 그러면 돼.”

배우들의 성과와 별개로, 『90일』의 추가 촬영 또한 결과가 매우 좋았다.

촬영 당시에는 마음에 들었더라도, 막상 편집을 해 놓고 보면 아쉽거나 추가했으면 하는 부분이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나 박의준 감독은 『90일』이 입봉작이다 보니, 편집을 거치면서 더욱 그런 점들이 부각됐다.

다행히 벌충해야 할 부분들을 정확히 짚어 내면서 기분 좋게 추가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독님! 다음에도 저희랑 작품 같이하셔야죠?”

“물론이죠. 좋은 작품 들고 찾아갈 테니, 잘됐다고 무시하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저 울지도 몰라요.”

“크흐흐. 감독님이라면 버선발로 맞이하겠습니다.”

안시현이 기분 좋게 크랭크업 이후의 회식을 즐기고 있던 그 시간.

기욤 뒤자르댕이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그의 소속사를 통해 한국행이 예고된 덕분인지, 꽤나 많은 기자와 팬들이 공항에 모여 있었다.

덕분에 취재 열기가 뜨거웠다.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 한국을 방문한 이유가 곽상필 전 감독님 때문입니까?”

“상필과는 저녁에 보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은 자주 보겠죠. 그가 프랑스에 있을 때, 제가 지겹도록 옆에 붙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한 건 상필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 자리에서 방문 목적을 밝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적이라…….”

기욤 뒤자르댕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글라스를 벗으며,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기자들을 쑥 훑어본 뒤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앞선 대답들과 달리 한국어로 말이다.

“내 마지막 작품에 필요한 주요 한국인 배역이 둘 있어요. 단역을 포함하면 그보다 더 늘어나겠죠? 배역을 맡을 배우들을 오디션으로 찾으려고 왔어요.”

웅성웅성.

비교적 명확한 발음으로 한국어를 구사한 덕분에, 기욤 뒤자르댕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와 팬들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꽤나 술렁였다.

특히나 기자들은 기욤 뒤자르댕의 발언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며 직감했다.

특종이다.

이건 특종감이다.

스케줄이 비어 있는 수많은 배우들이 오디션에 참여할 거고, 스케줄이 겹치면 어떻게든지 양해를 구해서 맞추고 오디션에 참여할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대한민국 배우 오디션 역사상 가장 많은 배우들이 몰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던 중.

“해당 배역과 관련해서 사전 캐스팅은 진행되지 않은 건가요? 기욤 뒤자르댕 감독이라면 수많은 배우들이 작품을 함께하려고 했을 텐데요.”

한 기자가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기욤 뒤자르댕이 쓴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시현이 제 러브콜을 거절했어요. 오디션에 참여하겠다고요.”

그날 저녁.

기욤 뒤자르댕, 그리고 안시현에 관한 수많은 기사들이 포털 사이트를 점령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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