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50화 (150/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1화>

151화. 기다리던 거

한창 회식을 하던 중 안시현은 박정상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이 입국하자마자 네 이름을 언급했어. 덕분에 실시간 검색어 1위야.

-오자마자 화끈하게 터트리셨네요.

-경쟁자들 다 나가떨어지는 거 아냐?

-저랑 상관없이 달려들걸요. 무려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이잖아요. 조만간 오디션 참가할 거라고 공식 입장을 발표하는 배우들도 있을 거예요.

무려 기욤 뒤자르댕이다.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영화사에 수많은 업적을 새긴 거장이 한국에서 오디션을 진행할 거라고 밝혔다.

안시현이 오디션에 참여할 거라는 건 배우들의 입장에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기욤 뒤자르댕이 공식적으로 밝힌 배역은 주연 하나와 조연 하나, 단역까지 더해지면 더 늘어난다고 한다.

단역으로라도 출연하기 위해서 이 악물고 오디션을 준비할 배우들이 제법 많으리라.

-네 의도대로 되고 있네. 회식은 재미있냐?

-감독님이 취해서 주무시고 계신 거 말고는요.

-술 약하신가 보네. 2시간 후에나 그쪽으로 넘어갈게. 이따가 보자.

박정상과의 문자메시지를 기점으로 다수의 지인들로부터 연락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중.

김진모가 가장 흥분된 반응을 보였다.

얼마나 흥분했으면 전화를 하는 게 아니고, 회식 장소에 직접 찾아왔을 정도다.

“안,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후배님들, 시현이 좀 잠깐 빌려 갈게. 잠깐 나갔다 와서 한잔 같이하자고.”

자신을 보고 감격하는 후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해 준 뒤, 김진모는 안시현을 잠시 밖으로 데리고 나가 대화를 나눴다.

“너 진짜 오디션 보기로 했어? 캐스팅 제안 거절하고?”

“어. 주연 자리 주겠다고 했는데 뻥 차 버렸어.”

“크흐흐. 정신 나간 자식. 넌 진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연기에 미친놈이야.”

김진모는 안시현의 태연한 대답을 듣고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살다 살다 기욤 뒤자르댕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는 사람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정작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른 안시현의 태도가 너무 태연하다 보니 더욱 웃음이 나왔다.

“다들 오디션 볼 거라고 벌써부터 난리더라. 주연 노린다는 사람도 많고, 일찌감치 포기하고 조연으로 눈높이 낮춘 사람들도 꽤 있던데.”

“분위기가 좋은 편인가 봐?”

“무려 기욤 뒤자르댕 감독이니까. 거기에 네가 오디션에 참여하기로 한 덕분에, 어쨌거나 주연 배역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잖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다들 도전해 보겠다는 거지.”

만약 안시현이 캐스팅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오디션을 통해 따낼 수 있는 주요 배역은 조연 하나다.

하지만.

안시현의 오디션 도전 선언으로 인해서 주연 배역까지 경쟁 구도에 포함되게 됐다. 안시현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존재하긴 하지만, 배역이 확정된 것과 확정되지 않은 건 배우들에게 큰 차이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안시현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주연 캐스팅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이왕이면 기욤 뒤자르댕의 오디션이 많은 관심을 받길 바랐으니까.

물론,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있기에 내린 결단이었다.

“왜? 너도 하려고?”

“난 일없다. 너랑 배역 하나 놓고 경쟁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아직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게 많아서 할리우드 쪽은 눈길이 별로 안 가네.”

“이런 말하기 좀 뭐하지만, 나랑 경쟁하기 싫으면 조연을 노려 봐도 되는 거잖아.”

“그럴까도 고민했는데…… 경쟁자들이 너무 강하더라고. 주연이나 조연이나 다 피 튀길 거 같아서 그냥 쿨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벌써 오디션 참여하겠다고 밝힌 배우들이 있어?”

“어. 강식 선배님이랑 영민 선배님. 그 외에 연기력에 자신이 있는 배우들도 죄다 참여하려고 들걸?”

“정수 선배님도 참여하시려나?”

“가능성은 충분하지. 흔치 않은 기회이니까.”

연기력에 자신이 있는 배우들이 오디션에 관심을 보일 거라고는 일찌감치 예상했다.

하지만…….

설마 송강식과 황영민이 벌써부터 오디션 참여 의사를 밝힐 줄이야.

얼마나 더 많은 배우들이 오디션 참여 의사를 드러낼지, 어느 정도로 경쟁이 치열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큼은 확신했다.

“이길 수 있지?”

“질 것 같았으면 오디션을 통해서 배역을 따내겠다는 미친 소리를 하지도 않았겠지.”

“그래…… 뭐, 너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오디션 구경이나 가야겠다.”

어떤 배우가 오디션에 참여하더라도, 모두 다 이기고 주연 배역을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길을 택한 만큼, 실력으로 정면 돌파한다. 꼼수는 통하지 않을 거야.’

*   *   *

『90일』의 크랭크업 이후 며칠 동안.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 오디션과 관련된 기사가 계속해서 쏟아지며 연예계의 화제로 떠올랐다.

언론의 최대 관심사는 어떤 배우가 그 오디션에 참여할 것인지였다.

김진모가 불참 의사를 드러내고 송강식과 황영민이 참여 의사를 드러낸 것을 기점으로, 수많은 배우들이 각각 참가와 불참 여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기사화가 됐고, 아예 참가와 불참 여부를 정리한 기사도 다수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기욤 뒤자르댕의 오디션 개최 여부는 대한민국 연예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안시현은 김진석 대표와 차를 마시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눴다.

“생각보다 참여하는 배우가 많은 것 같은데?”

“감독님 성향 때문이죠. 나이와 성별에 제약이 없는 걸로 유명하시잖아요.”

“하긴. 그 양반 스타일이 워낙 확고해야 말이지.”

기욤 뒤자르댕은 배우에 다라 캐릭터성에 변화를 주기로 유명한 감독이다. 자신이 만든 틀에 배우를 맞추는 게 아닌, 배우가 구축한 세계에 자신이 맞춰 주는 방식의 작업을 선호하다.

그러는 편이 배우의 연기력을 120% 끌어내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고 믿었으니까.

한 번 이상 주연을 맡아 본 배우만 하더라도 족히 30명이 넘게 오디션 참여 의사를 드러낸 건, 기욤 뒤자르댕의 성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나이와 성별은 상관없이, 오로지 캐릭터에 대한 해석과 연기력만 놓고 판가름을 내린다.

모두가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주연과 조연 두 자리가 있고, 단역까지 생각하면 자리가 더 늘어난다는 게 메리트로 다가왔다.

오디션 참가 의사를 밝힌 대다수의 배우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단역도 상관없으니 캐스팅만 되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들에게는 배역의 비중보다는 기욤 뒤자르댕이라는 거장의 마지막 작품에 출연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안시현 또한 단역으로라도 출연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지는 일은 있어선 안 되지.’

그럼에도 눈높이는 주연으로 향했다.

애초에 이길 자신이 없다면, 무리하게 주연 자리를 공석으로 내놓지도 않았을 거다.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그렇게 주연 배역을 따내는 편이 더 이슈가 될 거라고 판단했기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날 저녁.

안시현은 김희숙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 대본 리딩이 11월, 크랭크인이 12월로 예정되어 있다.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 오디션은 12월.

공교롭게도 시기가 겹친다.

주연 배우로서 작품에 몰입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에, 김희숙 작가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출연 분량 촬영 1월 이후로 미뤄 줄까요? 대본 리딩이야 뭐 적당히 나와도 되잖아요? 시현 씨야 알아서 잘할 테니까요.

“촬영에는 지장 안 가게 하겠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그리고 주연 배역 꼭 따내요. 겸사겸사 홍보 효과도 누리면 좋잖아요.

“네. 무조건 따내겠습니다.”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이 오디션에 참여하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안시현의 출연 분량 촬영을 1월로 미뤄 주고, 대본 리딩도 거의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배려를 해 주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안시현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두터웠다.

오디션 참여로 안시현이 차기작 준비를 소홀히 할 배우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보여 줄 수 있는 믿음이었다.

실제로 안시현은 『90일』이 크랭크업 한 이후, 거의 휴식을 취하지 않은 채 곧장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겸사겸사 몸을 만드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VVIP』.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 타이틀이다.

안시현이 연기해야 할 배역은, 공교롭게도 『너와 나의 시간』에서 연기했던 정영빈과 이미지가 겹치는 백화점 사장 역이다.

다만 이미지 자체는 전혀 다르다.

문제는 제대로 연기하지 못했을 때, 『너와 나의 시간』에서 보여 준 정영빈 연기와 유사하다는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거다.

자기 복제.

이미지의 고착화.

수없이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음에도 실패한 배우들의 전례로 볼 때, 『VVIP』는 안시현의 연기 인생에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전혀 다른 스타일로 제대로 연기를 해내면 다시 한번 믿고 보는 안시현이라는 찬사를 받을 테고, 실패하면 그동안 극찬을 받았던 연기력에도 다소 오점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안시현은 후자를 눈곱만큼도 고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정영빈과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 백화점 사장을 연기할 자신이 없었다면,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VVIP』와 오디션 준비 모두 10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일단은…… 운동부터 다시 시작하자.’

본격적인 캐릭터 구축에 앞서 안시현이 시작한 건, 『VVIP』의 대본을 수없이 검토하며 다시 각 잡고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90일』의 한노을을 연기하기 위해 근육을 줄이고 살을 뺀 탓일까?

안시현은 어느 순간부터 이전과 달리 체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느꼈다. 이에 다시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운동을 하며 몸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VVIP』나 오디션에서 노출을 할 필요는 없으니 완벽하게 만들 필요까지는 없지만…….

최소한 고된 촬영 스케줄을 제대로 버텨 낼 만한 체력을 기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90일』의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는 거의 정신력으로 버텼으니까. 체력이 떨어진다는 건 배우로서 치명적인 약점이야.’

체력은 곧 집중력으로 연결된다. 체력이 떨어지면 배역에 몰입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90일』을 촬영하는 내내 체력이 떨어졌음에도 좋은 연기를 보여 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휴식기가 길었던 덕분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두 작품을 거의 연속으로 진행해야 한다. 『90일』까지 포함시키면 사실상 세 작품 연속이다.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에 운동을 통해 최대한 체력을 길러 안정적인 연기력을 시종일관 보여 줄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의욕만 앞선 무모한 도전이 될 테니까.

안시현은 휴식기에는 최대한 집안일과 육아에 신경 쓰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기는 연기에만 집중해요. 라온이는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봐줘도 충분하잖아요. 어머님도 그러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어요.”

부모님과 정혜영의 배려 덕분에 온전히 몸을 만드는 데에만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물론 집에 있는 시간에는 가족에게 충실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혹여나 부모님이 라온이를 돌보며 힘든 부분이 없을까 챙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흘렀다.

10월 말.

슬슬 본격적으로 『VVIP』의 캐릭터 구축을 위해 연습실을 방문했을 때.

곽상필이 연습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 배우, 기다리던 거 나왔어요.”

그리고 두툼한 종이 뭉치를 건넸다.

『Timeless』.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시나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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