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2화>
152화. 저는
시나리오를 건네받은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Timeless』.
핀란드에서 봤던 시놉시스의 내용을 떠올리자,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깔끔한 타이틀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엄청 기다렸는데 드디어 나왔네요. 고문님은 이 시나리오 보셨나요?”
“허허허. 저야 이미 봤죠. 장담하건데, 안 배우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을 거예요.”
“바로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그러라고 가지고 왔는걸요. 주요 소속사에는 모두 오늘 중으로 같은 시나리오가 전달될 예정이에요. 고작 몇 시간 먼저 받은 거니, 차별 대우라는 이야기가 나올 일은 없을 거예요.”
“네. 그럼 마음 편하게 보겠습니다.”
안시현은 곧장 시나리오를 확인했다. 시나리오의 내용이 궁금해서 몸이 달아 참을 수 없었다.
시나리오는 영어와 한국어가 혼용되어 있었다. 비중은 8 대 2 정도였지만, 영어의 경우 번역이 첨부되어 있었기에 뜻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안시현은 되도록 번역에 의존하지 않고 시나리오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정혜영이 꾸준히 영어를 가르쳐 줬기에 어느 정도 읽고 뜻을 이해하는 데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간혹 어려울 단어가 나올 때면 번역의 힘을 빌려야만 했다.
‘아직 최소 1년의 여유가 있으니까, 그사이 영어 실력을 더 늘려야겠지. 발음도 더 연습해야 하고.’
대사에 한국어가 섞여 있긴 하지만, 영어의 비중이 훨씬 큰 영화다. 결국 제대로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영어 발음 또한 신경 써야 한다.
백날 연기를 잘하면 뭐한단 말인가.
정확한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면, 관객들은 무슨 연기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생기는데 말이다.
배우들이 괜히 딕션 연습을 하는 게 아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대사를 전달하는 건,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다.
따라서 『Timeless』의 주연을 맡기 위해서는 영어를 좋은 발음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만 했다.
안시현이 다른 배우들보다 유려한 점을 꼽으라면, 유학 경험이 있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 무려 5개 국어가 가능한 정혜영이 아내라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가르쳐 줬을 때도 그렇고, 영어 또한 정혜영의 도움을 받아 따른 속도로 익히고 있는 중이다.
안시현의 목표는 확고했다.
이왕 『Timeless』에 출연하기로 결심했으니, 그동안 소양 교육 정도라며 생각하던 영어를 작정해서 배워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모두 확인한 뒤.
안시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덩달아 시나리오를 가지고 온 곽상필의 입꼬리 또한 올라갔다.
“기대대로입니까?”
“아뇨. 기대 이상입니다. 시놉시스를 봤을 때부터 좋은 작품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시나리오를 보고 나니 소름이 끼치네요. 사람이 이토록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허허허. 기욤 그 친구의 구성은 명불허전이죠.”
감독들마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존재한다.
곽상필의 경우 철저하게 재미 위주로 작품을 만들면서도 작품성까지 잡는 데에 탁월했다면, 기욤 뒤자르댕은 빡빡한 구성을 바람으로 러닝 타임 내내 숨 쉴 틈 없는 전개를 하는 게 강점이다.
이는 『Timeless』또한 마찬가지였다.
시나리오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치밀한 계획하에 시나리오를 집필했는지 이해가 됐다.
또한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이 수많은 한국 배우 중 굳이 자신을 원한 이유 또한 짐작했다. 시나리오를 보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했지만, 보고 나니 알 것 같았다.
“이 배역, 쉽게 소화하기 어렵겠는데요. 난이도로 보면…… 주지성이나 남궁수민보다도 어려울 것 같아요.”
“확실히 난이도가 어려운 편이죠.”
“그래서 더욱 하고 싶어요.”
그동안 안시현은 출중한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배역을 다수 맡았지만, 그중에서도 정점은 주지성과 남궁수민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자폐성 장애와 사이코패스를 완벽하게 표현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안시현은 그 두 배역보다 『Timeless』에서 자신이 오디션을 통해 따내야 하는 배역의 난이도가 더욱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기에 더욱 배역에 욕심이 났다.
안시현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견의 여지 자체가 없도록, 완벽하게 준비한다.’
당분간 할 일이 제법 많을 것 같았다.
* * *
11월 초.
『VVIP』의 촬영을 위해 안시현을 비롯한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안시현은 김희숙 작가와 미리 만나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밀린 대화를 나눴다.
“준비는 잘되고 있어요? 오디션 준비까지 같이하느라 정신없을 텐데 말이죠.”
“힘들긴 한데 잘되고는 있어요. 백성훈 역의 캐릭터 구축은 거의 다 끝났고, 『Timeless』 쪽은 아직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래도 오디션 일정에는 정확히 맞춰서 준비를 끝낼 거 아니에요.”
“아슬아슬하긴 한데, 가능할 것 같아요.”
『VVIP』의 백성훈 역 또한 난이도가 제법 있는 편이다.
특히나 백화점 사장 정영빈 역을 맡아 본 적 있는 안시현이기에, 백화점 사장 역인 백성훈과 이미지를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해야만 했다.
다행히 당초 원하던 방향대로 캐릭터 구축을 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Timeless』의 오디션은 아직까지 준비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작품을 위해서가 아닌 오디션을 위한 캐릭터 구축이다. 캐릭터 해석과 연기력만 제대로 보여 줄 수 있으면 되니, 작정하고 캐릭터를 구축할 필요는 없다.
덕분에 『VVIP』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덜한 게 사실이었다.
김희숙 작가는 두 작품 모두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는 안시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개인적으로 시현 씨가 이번 기회에 할리우드에서 족적을 남겼으면 좋겠어요.”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니 그래야죠.”
“잘되면 계속 할리우드에 도전하실 건가요?”
“아뇨.”
안시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할리우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해요. 『Timeless』가 아무리 잘되어도, 전 더 이상 할리우드에 눈길을 보내지 않을 거예요. 사실 이번에도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이라서 결정한 거고요.”
안시현이 『Timeless』에 끌린 건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투자된 작품이라서가 아닌, 평소 좋아하던 감독인 기욤 뒤자르댕의 마지막 작품이라서다.
할리우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했다.
두 번은 안시현 쪽에서 사양이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들이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네요. 잘되면 할리우드에서 계속 작품을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거대 자본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한국에서도 이미 평생 먹고살 만큼 돈을 벌었는데, 굳이 제약이 많은 곳에서 연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긴…… 지금의 시현 씨는 한국에서라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으니까요.”
이후로도 김희숙 작가와 안시현은 꼬박 두 시간이 넘게 대화를 나눈 뒤에야 대본 리딩이 예정되어 있는 STS 드라마국 제2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그러게. 같은 소속사인데 자주 좀 얼굴 보고 그러자.”
안시현이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한나래와 우정태가 그를 반겨 줬다. 얼굴 보기 힘들다며 타박을 한 건 보너스였다.
“촬영하면서 지겹도록 보면 되죠. 근 1년 만인가요, 형? 나래도 오랜만이야.”
“저희 간만에 셋이서 밥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대세 여배우님께서 사신다면 당연히 대환영이지. 시현이 너도 시간 되지? 안 되도 비워, 이 자식아.”
“저녁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죠. 오랜만에 밀린 이야기 좀 진득하게 해 봅시다.”
『VVIP』의 첫 대본 리딩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한나래와 우정태는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마치 작정하고 온 것처럼, 대본 리딩이 아니라 촬영을 방불케 하는 수준의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힘이 좀 많이 들어가 있는 거 같긴 하지만…… 설렁설렁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만 너무 작정하고 연기를 하다 보니 다소 힘이 과하게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은 존재했다.
오죽하면 김희숙 작가가 첫 대본 리딩이니 살살 좀 하자고 반쯤 농담 삼아 이야기를 했을까.
그만큼 한나래와 우정태는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우정태의 경우 『VVIP』가 첫 주연이고, 한나래의 경우는 영화에서 주연 경험은 몇 번 있지만 드라마만 놓고 보면 처음이다.
안시현은 경험 부족으로 인해 두 사람이 부담을 느껴 힘이 들어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힘이 들어간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날 저녁.
식사와 함께 가볍게 술 한 잔을 기울이며, 한나래와 우정태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오늘 저희, 힘 엄청 들어간 것 같지 않았어요?”
“부담감 때문에 그럴 수 있지. 난 설렁설렁 하는 것보다는 힘 들어간 걸 더 선호하는 편이라서 좋아 보였어.”
“부담감 때문이 아니라, 선배 때문이거든요?”
“응? 나 때문에?”
한나래와 우정태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지은 채 자신들이 첫 대본 리딩부터 작정하고 연기한 이유를 밝혔다.
“선배랑 다시 같은 작품을 하게 되면, 그때는 저 또한 주연으로서 당당하게 자리매김해 있기를 바랐어요. 제 연기관 구축에 큰 영향을 끼친 선배 앞에서 좋은 배우로 성장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거든요.”
“『VVIP』 캐스팅 되자마자 옛날 생각나더라. 시현이 네 추천 덕분에 『너와 나의 시간』에 뒤늦게 합류하게 됐었지. 그게 아니었다면 난 얼마 못 가서 연기를 접었을 거야. 노력은 하는데 성과가 없으니 지쳐 있던 시기였거든. 지금의 배우 우정태가 존재할 수 있는 건, 당시 네 호의 덕분이야. 그래서…… 네가 손길을 내밀었던 사람이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지 뭐야.”
“저희 둘 다 캐스팅 확정된 이후에 스케줄 최대한 비우고 죽어라 연습했어요. 오죽하면 대표님이 둘이서 연습실 전세 냈냐고 하시더라니까요.”
“크흐흐. 진모는 애인 보려면 연습실에 오는 제일 빠르다고 하소연하던데. 우리가 연습실에서 많이 살긴 했어. 직원들보다 더 빨리 출근했으니까.”
한나래는 안시현의 메소드 연기를 보고 힌트를 얻어 연기 스타일에 변화를 줬고, 우정태는 『너와 나의 시간』에서 안시현의 추천을 받아 데뷔를 하며 배우로서 잠재력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 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안시현에게 고맙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했다.
대본 리딩 때부터 힘을 바짝 줬던 건, 자신들이 그사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안시현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진심을 들은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배우로서 늘 바라는 게 두 가지 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건물주는 이미 됐으니 아닐 거고……. 뭔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데?”
“첫 번째는 아프지 않고 연기하는 것, 두 번째는 저와 친분이 있는 배우들이 모두 잘되는 거예요.”
“어려운 목표네.”
“다행이 지금까지는 그걸 이뤘어요. 아픈 곳 없이 건강하고, 선배와 나래를 비롯해서 다들 자신만의 길을 구축하고 있으니까요.”
안시현의 진심에 분위기가 더욱 훈훈해졌다.
가벼운 식사로 끝내려던 자리가 조금 더 길어졌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입을 재잘거렸다.
적절하게 취기가 올랐을 즈음, 우정태가 술 대신 물을 마시고 있는 안시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VVIP』, 어느 정도 나올 거 같냐?”
“더도 덜도 말고 최고 시청률 40%만 노려 보죠.”
“목표가 너무 거청한 거 아냐? 아니구나. 네가 주연 맡은 드라마가 둘 다 최고 시청률 50%가 넘었으니까.”
“40% 넘기는 드라마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김희숙 작가님이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래. 이왕이면 목표는 크게 잡으면 잡을수록 좋은 거지. 시청률 40%를 위하여!”
“위하여~”
시청률 40%.
터무니없이 높지만 마냥 불가능한 건 아닌 목표를 이야기하며, 『VVIP』의 주연 배우 셋이 의기투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