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4화>
154화. 캐스팅된 배우는
『Timeless』의 스토리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3명의 노인들이 한 실험에 참가해, 24시간 동안 5번씩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할 기회가 주어지고 그것들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된다는 콘셉트였다.
데이비드 킴.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와 일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살았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식들과 손주들게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치고 있으며, 텍사스에서 자식들과 함께 목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70대 노인.
안시현은 데이비드 킴의 과거 모습을, 정확히는 1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를 연기하게 됐다.
안시현이 준비해 온 장면은 극중에서 대사로만 언급되는, 데이비드 킴이 아내 헬렌 리와 연애할 당시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창 연애를 하던 시기.
데이비드 킴은 큰맘을 먹고 헬렌 리와 캐나다 여행을 떠났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카지노를 즐기고, 환상적인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온 후.
데이비드 킴은 샤워를 하고 나왔다.
분위기 있는 밤을 보낼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허탈하게 웃고서 얌전히 헬렌 리의 옆에 누워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빡빡하게 이어진 스케줄에 지친 건지, 그가 샤워를 하고 나온 동안 헬렌 리가 잠이 들어 있었으니까.
상황은 과거와 똑같았다.
여전히 헬렌 리는 잠이 들어 있었다.
다만 상황을 맞이한 데이비드 킴의 입장이 달랐다.
그는 더 이상 혈기왕성하고 사랑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20대 중반의 청년이 아니었다.
아내와 사별하고 손주들이 크는 걸 지켜보며, 아침 일찍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게 삶의 낙이 된 70대 노인.
입장이 달라졌기에 같은 상황을 지켜보며 느끼는 감정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몸은 젊지만 머리는 70대 노인이다. 극중에서 스쳐 지나가듯이 언급되고 말지만, 데이비드 킴의 감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장면이기도 해.’
실제로 데이비드 킴이라는 캐릭터를 분석하며 안시현이 가장 신경 쓴 건, 70대 노인의 관점으로 과거의 행적들을 마주할 때 어떤 감정을 느낄까였다.
이는 안시현이 경험해 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사건이기에 고민이 따랐다.
어떻게 하면 데이비드 킴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안시현은, 결국 김진석 대표와 곽상필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라면 데이비드 킴의 감정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안시현의 판단은 옳았다.
김진석 대표와 곽상필은 자신들이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지를 솔직하게 말해 줬고, 안시현의 그들의 답변을 토대로 데이비드 킴의 캐릭터를 구축해 나갔다.
그 결과를 지금, 오디션을 통해 기욤 뒤자르댕에게 선보이게 됐다.
안시현이 의자에 앉았다.
눈앞에 침대가 있다고 상상하며, 잠이 든 헬렌 리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속삭였다.
“헬렌, 매일 아침 당신에게 인사를 갈 때마다, 이 순간을 떠올리곤 해. 이날 당신이 먼저 잠들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 궁금했거든. 그거 알아? 먼저 잠들 것 때문에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고, 불편한 새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뒤꿈치가 다 까진 자신의 발을 끝까지 감추는 그 어여쁜 마음에 반해, 이 사람이면 평생을 함께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후우…….”
대사를 하는 가운데 안시현이 호흡을 거칠게 내뱉었다. 이내 숨 쉬기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주머니에서 L자 형태의 물건을 꺼내 입에 가져다댔다.
MDI, 천식 환자들이 사용하는 정량 흡입기였다.
데이비드 킴이 천식 환자라는 설정을 반영한 것이다.
어느 정도 호흡을 가라앉힌 뒤, 살짝 붉어진 눈시울로 안시현이 다시 대사를 이어 나갔다.
“40년을 함께 살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는데, 좋은 기억보다는 왜 이렇게 아쉬운 기억만 떠오르는 걸까? 당신에게 못해 준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미안하네. 이렇게 예쁘고 고운 사람을 고생만 시켰으니…….”
안시현이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미안해, 헬렌…….”
계속해서 헬렌을 부르며 오열했다.
* * *
과거 체험을 하는 3명의 주인공 중, 데이비드 킴은 주로 과거의 삶에 대해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후회는 몇 년 전 사별한 아내 헬렌 리에게 집중되어 있다. 실제로 5번의 시간 여행 기회를 모두 아내와 관련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사실 헬렌 리와의 캐나다 여행은 넣어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 시나리오에서는 대사로 짤막하게 언급되고 넘어가는 게 전부였다.
다만 다섯 번의 시간 여행 중, 데이비드 킴이 영화 막바지에 하는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에 마냥 의미가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데이비드 킴의 캐릭터성을 표현할 만한 신은 제법 여럿 존재했다. 70대 노인이라는 제약이 있어 그렇지, 오디션용으로 쓸 만한 신은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안시현이 굳이 비하인드 스토리를 선택한 건, 시간 여행을 하는 데이비드 킴의 감정을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치라고 판단해서였다.
실제로…….
‘효과적인 전략이었어. 감정도 좋았고, 천식 환자 특유의 증상을 완벽하게 표현해 낸 것도 인상적이었어.’
기욤 뒤자르댕은 안시현이 선택이 매우 주효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선택하며 데이비드 킴의 후회와 아쉬움을 오열로서 승화시켰고, 천식 환자 특유의 쌕쌕거리는 숨소리와 호흡 곤란 증상까지 잘 표현해 냈다.
물론 대사 자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사의 수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연기라도, 자신이 해당 배역을 맡아야 할 이유를 제대로 증명해 보이는 배우에게 주어지는 게 맞을 테니까.
안시현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눈에 확 띄는 무언가를 준비한 건 아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는 오히려 앞선 참가자들이 더 많이 보여 줬다.
다만 안시현의 오디션에서 가장 필요한 캐릭터 해석 능력, 그리고 연기력을 정석적으로 입증해 보였다. 그것들을 보여 줄 효율적인 수단으로 비하인드 스토리를 선택하는 똑똑함은 보너스였다.
물론 그렇다고 캐스팅이 확정된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의 참가자 중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
‘더 좋은 배우가 있다면, 그 배우를 선택한다.’
기욤 뒤자르댕은 냉정했다.
안시현 스스로가 경쟁을 택한 이상, 경쟁에서 이겨 삼아남기를 바랐다. 만약 살아남지 못한다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준 배우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뭐…… 판을 뒤엎기는 쉽지 않을 것 같지만.’
* * *
‘오디션은 자신이 왜 그 캐릭터를 맡아야 하는지를 입증하는 자리야. 중요한 건 첫째도 연기, 둘째도 연기야.’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안시현이 가장 신경을 쓴 건 좋은 연기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결국 오디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기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고 캐릭터 분석을 잘했어도, 연기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기욤 뒤자르댕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광적으로 선호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때문에 안시현은 다 필요 없고 데이비드 킴에 어울리는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면 게임이 끝난다고 판단했다.
‘뭐…… 이 정도면 됐겠지.’
안시현은 최선의 연기를 선보였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선택하는 변칙, 정석을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 해석, 거기에 깔끔한 연기를 통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표현해 냈다.
때문에 안시현은 후회하지 않았다.
설사 오디션에 떨어져서 데이비드 킴 배역을 따내지 못하더라도, 그로 인해 캐스팅을 거절한 자신의 선택이 흑역사로 남더라도 괜찮았다.
더 좋은 배우가 캐스팅된다면 자신이 부족했던 것이고, 자신보다는 그 배우가 캐스팅되는 게 『Timeless』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했다.
‘이제 『VVIP』에 집중하자.’
1월이 돼야 안시현의 촬영 분량이 생긴다. 한나래와 우정태가 작정하고 안시현의 촬영 분량을 최대한 뒤로 미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디션이 모두 마무리될 즈음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그렇다고 놀 생각은 없었다.
촬영이 시작하자마자 좋은 연기를 마음껏 뿜어 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으니까.
‘한동안은 백성훈이 돼야 해.’
안시현이 백성훈이 되기 위해 연습에 매달리는 사이, 『Timeless』의 오디션이 마무리됐다.
2008년 12월 31일.
오디션을 모두 마친 기욤 뒤자르댕이, 곽상필이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심사 결과를 최종적으로 점검했다.
그 모습을 보며 곽상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마음 정한 거 아니야? 오디션 치르면서 이미 결론이 났을 텐데.”
“결론이야 났지. 주연과 조연은 정했어.”
“그런데 굳이 한 번 더 보는 이유가 있어?”
“단역 고르기가 힘들어서 그래. 생각보다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배우들이 꽤 많아서 말이야.”
“흐음, 내가 도와줄까?”
“그러면 좋고.”
추리고 추린 50여 개의 프로필.
기욤 뒤자르댕은 그중 두 개를 제외하고서 곽상필에게 건넸다. 두 개의 프로필을 슬쩍 곁눈질한 곽상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결국 그렇게 결정했구나.”
“두 사람의 연기가 워낙 좋아서.”
곽상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연과 조연으로 기욤 뒤자르댕이 두 배우를 선택한 게 납득이 됐다. 두 배우 모두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둘 중 누가 데이비드 킴이야?”
주연인 데이비드 킴을 맡을 배우가 과연 둘 중 누구일지였다.
두 배우 중 누가 맡더라도 이견은 없을 터였지만, 그럼에도 호기심이 일었다. 공식 발표 전 데이비드 킴을 연기할 배우를 알고 싶어졌다.
“글쎼…… 이걸 말해 줘, 말아?”
기욤 뒤자르댕이 어깨를 으쓱였다.
곽상필이 궁금하도록 한참 동안 뜸을 들인 뒤, 그가 짜증을 내려 할 즈음 손가락으로 프로필을 가리켰다.
“이 배우가 데이비드 킴이야.”
“이유는?”
“이유라…….”
기욤 뒤자르댕이 고민에 빠졌다.
두 배우 다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연기력만 놓고 보면 박빙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때문에 기욤 뒤자르댕 또한 최종 결정을 앞두고서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어렵사리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연기력은 둘 다 좋았어. 누가 캐스팅돼도 이견이 없을 정도였다고 생각해. 그럼에도 이 배우를 선택한 건…….”
* * *
2009년 1월 1일.
기욤 뒤자르댕이 묵고 있는 호텔 라운지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 이에 많은 언론사에서 관심을 가지고 취재를 나왔다.
다수의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리는 가운데.
기욤 뒤자르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미리 준비해 온 발표문을 손에 쥔 채, 고개를 숙이고서 자리에 앉아 기자 회견을 연 목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보다 정확한 의사 표현을 위해 모국어를 사용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는 『Timeless』의 캐스팅라인 일부를 발표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오디션 결과, 한국에서는 주연과 조연 각 1명을 포함해 도합 12명을 캐스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연 1명, 조연 1명, 단역 10명.
기욤 뒤자르댕이 심사국고한 끝에 캐스팅하기로 결정한 배우의 수였다.
이제 기자들의 관심은 주연과 조연을 어떤 배우가 맡을지, 그리고 캐스팅 제안을 거절한 안시현이 과연 캐스팅 라인에 포함되어 있을지였다.
잠시 뜸을 들인 뒤.
기욤 뒤자르댕이 말을 이어 나갔다.
“세 주인공 중 하나인 데이비드 킴 역할에 캐스팅된 배우는, 안시현입니다.”
이변은 없었다.
안시현이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고 당당하게, 오디션으로 자신이 맡아야 할 배역을 따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