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5화>
155화. 중요한 이야기
“조연 알버트 킴을 맡을 배우는 송강식입니다.”
안시현과 송강식.
과거 『나는 간첩입니다』에서 함께 연기한 경험이 있는 두 배우가, 『Timeless』에서 주연과 조연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다.
기욤 뒤자르댕은 그 이후로도 10명의 단역을 모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류성웅을 비롯해 주연급 배우가 무려 단역에만 3명이나 포함되어 있는 초호화 캐스팅 라인이었다.
“출연 계약서는 최종 미팅 후 열흘 내로 작성을 마무리할 예정이며, 조율 과정에서 이견이 있을 경우 후보군을 캐스팅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다.
수많은 기자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손을 들었다. 그중 가장 먼저 질문 기회를 얻은 기자는,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핵심을 관통하는 질문을 던졌다.
“안시현 배우와 송강식 배우를 각각 데이비드 킴과 알버트 킴에 캐스팅한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송강식 배우 또한 데이비드 킴 역을 원했던 걸로 알고 있거든요.”
기욤 뒤자르댕이 고개를 끄덕였다.
캐스팅 이유에 대한 질문이 당연히 나올 거라 생각했고, 그에 대한 답변 또한 미리 준비해 왔기에 입을 여는 데에는 막힘이 없었다.
“네. 알고 계신 대로 두 배우 다 데이비드 킴 역으로 오디션에 참가했습니다. 솔직히 선택하기 어려웠습니다. 두 배우 모두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줬고, 심지어 두 시나리오상에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선택하는 승부수까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비하인드 스토리요?”
“데이비드 킴의 다섯 번의 시간여행 중, 세 번째 시간여행은 작중에서 대화로만 언급됩니다. 공교롭게도, 안시현과 배우와 송강식 배우는 세 번째 시간여행을 모티프로 자유연기를 준비해 왔습니다.”
웅성웅성.
기자들이 술렁였다.
스쳐 지나가는 대사를 모티프로 삼아 자유연기를 준비해 왔다는 것도 이야깃거리건만, 두 배우가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게 기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잘만 쓰면 큰 이슈가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캐스팅된 배우들의 오디션 영상을 공개할 거라고 하셨는데, 언제쯤 공개하실 예정이십니까?”
“한국 시간으로 내일 오전 즈음, 제작사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될 예정입니다.”
“무편집본입니까?”
“그렇습니다.”
“두 배우가 동일한 소재를 모티프로 삼아 자유연기를 보여 줬는데, 어디서 평가가 갈린 건가요?”
“상필도 저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습니다. 사실 점수 자체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배우를 데이비드 킴으로 캐스팅하더라도 이견이 없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럼에도 안시현 배우를 선택한 건, 그가 더 데이비드 킴 같았기 때문입니다.”
안시현이 더 데이비드 킴 같았다.
기욤 뒤자르댕의 그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기자들은 무편집 영상이 공개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 * *
안시현의 데이비드 킴과 송강식의 데이비드 킴은 세 번째 시간여행을 모티프로 연기를 했다.
차이점은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세 번째 시간여행을 선택했느냐에서 갈렸다.
송강식은 세 노인이 각각 선택한 다섯 번의 시간여행에 저마다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데이비드 킴에게 세 번째 시간여행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집중했다.
40년을 함께했고, 사별 후에도 매일 아침 무덤을 찾아가 넋두리를 늘어놓을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 헬렌 리.
세 번째 시간여행은 데이비드 킴이 그녀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순간이자, 마지막 순간 하게 될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순간이다.
따라서 송강식은 세 번째 시간여행이 가진 의미를 조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반면 안시현은 철저하게 데이비드 킴이라는 사람에 대해 표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목소리는 안시현의 것이 분명했건만 말투와 억양과 행동 등 데이비드 킴이라는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세 번째 시간여행을 택한 것이다.
송강식 또한 70대인 데이비드 킴의 캐릭터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건 사실이지만…….
서로의 관점이 달랐기에 안시현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완성도 자체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무편집본을 보고 나서야 식견이 있는 이들은 기욤 뒤자르댕이 안시현과 송강식을 각각 주연과 조연으로 캐스팅한 이유를 깨달았다.
두 사람 다 오디션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줬다.
기욤 뒤자르댕이 어느 쪽에 비중을 더 두느냐에 따라 평가가 갈릴 정도였다. 괜히 두 사람 다 흥행보증수표로 불리는 게 아니라는 걸 몸소 증명해 보였다.
때문에 기욤 뒤자르댕은 두 배우 모두 포기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함께 데이비드 킴과 알버트 킴, 부자지간을 연기해 주기를 바랐다.
다행히 송강식이 알버트 킴 배역을 수락하면서 캐스팅이 마무리되게 됐다.
캐스팅 다음 날.
“축하해요, 선배!”
“축하한다, 시현아!”
“축하드려요. 시현 씨라면 해낼 줄 알았어요.”
“캬아. 이대로 할리우드 진출해서 대박 나고 다시는 한국 안 오는 거 아냐?”
“할리우드 A급 배우 수준으로 출연 계약서 작성하기로 했다던데, 정말이에요?”
안시현은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스태프와 배우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우정태가 의자 뒤에 숨겨 놓았던 생크림 케이크를 꺼내 안시현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덕분에 생크림과 케이크 범벅이 되었음에도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여유롭게 얼굴에 묻은 케이크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까지 했다.
“케이크 맛있네요. 다들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시간 되시면 다들 저녁이라도 함께하시죠. 기분 좋은 날이니만큼 제가 쏘겠습니다.”
당당하게 오디션을 통해서 데이비드 킴 배역을 자신이 맡아야 할 이유를 증명해 보인 만큼, 기분 좋게 축하 분위기를 즐겼다.
다음 날 오전.
촬영장으로 향하기 전, 안시현이 JM액터스 사옥에 모습을 드러냈다.
『Timeless』 출연 계약서를 작성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회의실에 도착해 있던 송강식이, 안시현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아버지?”
데이비드 킴의 아들인 알버트 킴 역을 맡게 됐기에, 안시현에게 배역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이다.
“일찍 왔구나, 아들아.”
“얼씨구. 이게 이제 선배랑 맞먹으려고 드네? 이제 머리 좀 컸다 이거냐?”
“건방 떨었으니까 사죄의 의미로 머리 박을까요?”
“아이고. 맞먹으려고 드는 게 아니라 아예 골로 보내버리려고 하는구나. 내일 아침에 신문 1면 화끈하게 한 번 장식하라고?”
“크흐흐. 그게 싫으시면 조심하십쇼.”
이에 안시현 또한 농담으로 화답하면서 훈훈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이어 나갔다.
오전 10시 30분.
기욤 뒤자르댕이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미리 준비해 온 서로 다른 내용의 출연 계약서를 안시현과 송강식에게 건넸다.
“조건이 다르긴 하겠지만, 송강식 배우 또한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계약서를 확인한 송강식의 두 눈이 커졌다.
조연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후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주면 저야 좋지만…… 괜찮겠습니까?”
“알버트 킴은 비중 있는 조연이고, 무엇보다 송강식 배우는 그 조건을 받고도 남을 정도로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전 오히려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할 지경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송강식이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할리우드를 기준으로도 조연치고는 기대 이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해 줬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인에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안시현도 마찬가지였다.
기욤 뒤자르댕이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할리우드 A급 배우에 준하는 조건이 출연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데 거절하면 미친 거 아니겠는가.
‘합당한 가치를 인정해 주겠다고 한 말이 진짜였구나. 그리고 강식 선배님의 대우도 좋아서 좋네.’
안시현은 송강식 또한 자신만큼은 아니어도 조연치고는 좋은 조건에 출연 계약서를 작성하게 된 걸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내심 송강식과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디션을 보며 본의 아니게 경쟁 구도가 잡힌 게 신경 쓰였는데, 기욤 뒤자르댕이 후한 조건을 제시하며 송강식의 가치를 인정해 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 * *
출연 계약서 작성 이후.
안시현은 기욤 뒤자르댕과 송강식과 함께 식사를 한 뒤, 최봉팔과 함께 촬영장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VVIP』에만 집중한다.’
데이비드 킴 배역을 따내기는 했지만, 『Timeless』의 크랭크인은 빨라야 연말이다. 따라서 당분간 『Timeless』와 관련된 스케줄을 소화할 일은 없다.
오디션도 끝나고 출연 계약서도 작성했으니, 이제 『VVIP』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VVIP』의 첫 촬영이 12월 중순부터 시작됐음에도, 1월이 됐는데 안시현은 아직까지 단 한 신도 촬영을 하지 않았다. 스태프와 배우들이 배려를 해 줬기에 『Timeless』의 오디션에 집중하는 게 가능했다.
이제는 배려에 보답을 할 차례다.
차에서 내리기 전.
안시현이 최봉팔을 바라보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봉팔 형.”
“응?”
“저 좀, 재수 없어 보일까요?”
안시현이 어떤 의도로 질문을 한지 파악한 최봉팔은, 씨익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사이코패스도 연기했는데, 재수없는 백화점 사장 놈이 문제겠어?”
“오. 그렇게 말해 주니 부담이 조금 덜하네요. 하긴 별의별 배역을 다 맡아 봤는데, 재수 없는 백화점 사장을 연기하는 것 정도야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시현은 백성훈을 연기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영빈과 이미지가 겹치지 않는 백화점 사장을 연기해야 하기에, 캐릭터 구축 때부터 이만저만 고민을 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안시현은 확신했다.
자신이 백성훈을 연기하는 걸 보고,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정영빈을 떠올리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촬영장에 도착했지만 곧장 촬영이 이어지진 않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스태프들이 김희숙 작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안시현이 최창국에게로 다가가며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 있어요?”
“작가님이 담판 지으러 STS 갔거든요.”
“담판이요?”
“제작 스케줄 관련해서 사전에 STS랑 조율했던 부분이 있는데, 갑자기 STS 쪽에서 말을 바꿨거든요. 그거 때문에 작가님이 화가 단단히 나셨어요.”
안시현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이내 최창국이 말하는 이슈가 무엇인지를 짐작했다.
‘혹시 그 이야기인가?’
안시현은 2010년 전후로 김희숙 작가의 작품들이 추구했던 방향성에 대해 떠올렸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김희숙 작가가 STS 사옥을 방문해 담판을 짓는 것이, 『VVIP』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고 봤다.
약 1시간 뒤.
김희숙 작가가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신고 있던 구두를 대충 벗어 던지고서, 촬영장에서 편하게 신는 슬리퍼를 손에 잡은 채 스태프와 배우들을 불러 모았다.
최창국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됐습니까?”
“광고 완판됐을 거 뻔히 아는데 조금이라도 더 이득 보려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이 조건 안 들어주면 제작 중단할 거라고 하니 들어준다 하더라고요.”
“치킨게임까지 가면 들어줄 수밖에 없으면서 왜 자꾸 말을 바꾸는지 참…….”
“돈 때문이죠 뭐.”
“그래도 이야기가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잘 끝난 건지 모르겠네요. 국장님이 질렸다는 표정 짓던데요? 아마 다시는 저랑 작품 안 할 거라고 이 바득바득 걸고 있을 거예요.”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안시현과 몇몇 스태프를 제외하면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이 나누는 대화를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안시현은 대화를 들으며 자신이 생각한 이슈가 맞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다.
최창국과의 대화 후.
“여러분께 전달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스태프와 배우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김희숙 작가가 중대 선언을 했다.
“저희 드라마, 100% 사전 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