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6화>
156화. 재수 없어요
‘역시 사전 제작 이야기를 하려는 거였어.’
안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희숙 작가는 완성도를 중요시하는 작가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작품을 만든다면 대중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늘 확신하곤 했다.
문제는 방영 스케줄에 쫓기다 보면 일정 부분 완성도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거다.
실제로 김희숙 작가는 매 작품의 종영 후 인터뷰를 할 때마다 긍정적인 내용보다는 완성도를 놓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10년 이후.
김희숙 작가는 사전 제작을 선호하게 된다.
흥행보증수표로 자리 잡은 자신의 입지를 이용해, 일찌감치 광고를 완판시키며 이를 이용해 사전 제작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제작비를 벌기 위한 광고로 인해 PPL이 많아지며 불편하다는 일부 의견이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보다 나은 수익 창출을 위해 PPL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때문에 PPL은 비단 김희숙 작가만을 비난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김희숙 작가는 사전 제작, 혹은 반사전 제작을 통해서 퀄리티만큼은 확실하게 높였다.
결과적으로 어차피 PPL을 많이 할 거라면 완성도를 높이는 김희숙 작가 쪽이 낫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사전 제작은 제작 기간을 여유롭게 가져간다는 장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시청자 반응을 확인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 또한 공존한다.
실제로 사전 제작을 했던 드라마 중 상당수는 초반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다가 중후반이 넘어가며 시청자들의 의아함을 자아내고서 시청률이 하락하는 결과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작품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사전 제작이 마냥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김희숙 작가도 작품에 따라 사전 제작이 가능함에도 반사전 제작을 통해서 중반부까지의 촬영을 끝마친 채 방영을 시작, 이후의 촬영 스케줄을 여유롭게 가져가는 식으로 완성도를 높이곤 했다.
『VVIP』의 사전 제작을 결정했다는 건, 그만큼 김희숙 작가가 대본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 터.
혹은…….
‘스타일 변화를 꾀하는 작품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
불안해서 그러는 것이거나.
『VVIP』는 재벌가의 후계자 경쟁을 그린, 상류층의 삶과 경쟁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드라마다.
중요한 건 『VVIP』에서 로맨스 요소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거다. 여주인공인 한나래가 맡은 배역인 백성아가 주인공 백성훈의 여동생이자 라이벌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니 말 다한 거다.
지금껏 김희숙 작가는 모든 드라마에서 로맨스를 적절하게 활용하며 여성 시청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왔다. 사실상 김희숙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의 시청률을 여성 시청자들이 견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VVIP』만큼은 다르다.
애초에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로맨스 요소를 반영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실제로 탈고를 모든 끝낼 때까지 로맨스 요소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기준의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한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시놉시스만 보고서 STS에서 대규모 제작비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대본 또한 기대만큼 잘 나왔다.
그럼에도 스타일의 변화를 앞두고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뭐…… 사전 제작을 하면 나야 좋지.’
안시현은 개인적으로 사전 제작을 반겼다.
방영 스케줄을 맞추기 위해 정신없이 촬영하는 것보다야,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사전 제작을 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상당수의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드라마보다 영화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케줄의 압박이 적으니 보다 연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조성되니까.
안시현은 진심으로 바랐다.
『VVIP』의 경우 사전 제작의 단점보다 장점이 더 부각되기를 말이다.
* * *
백성훈.
재벌가 V그룹의 유력 차기 회장 후보이자,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은 일반인들과 달랐다고 생각하는 뼛속까지 금수저인 재벌 3세.
어느 날.
해외에서 두문불출하던 백성훈의 여동생 백성아가 귀국한다. 비자 갱신 때를 제외하면 코빼기조차 비추지 않던 그녀는, 대뜸 백성훈이 대표이사로 있는 V백화점을 방문한다.
“성아 네가 웬일이냐. 허구한 날 비자만 갱신하고 출국하더니, 갑자기 날 다 찾아오고 말이야. 왜? 마음에 드는 신상이라도 있어? 편하게 가져가. 너라면 그까짓 명품, 한 트럭이라도 줄 수 있으니까.”
“오빠에게 제안할 게 있어서 왔어.”
“제안?”
“V그룹, 나랑 반으로 나누는 게 어때?”
백성훈이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비춰 놓고 한다는 말이, V그룹을 절반으로 나누자는 헛소리라니.
V그룹의 후계자는 백성훈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난 게 아니지만 착실하게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고, V백화점을 몇 년째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백성훈이 장차 V전자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을 거라는 게 증권가의 지배적인 예상이다.
유일한 변수가 있다면…….
V전자의 백왕국 회장이 차기 회장과 관련해서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는 거다.
그나마 언급한 내용이라고 해 봐야.
“V그룹은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물려줄 거다. 만약, 너희 중 자격이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면 전문 경영인에게 V그룹을 맡길 거다. 내 자식이라는 이유로 누리는 특혜는 평생 먹고살 걱정 없는 게 전부일 거다. 나머지는 너희의 능력으로 얻어 내야 할 거다.”
정도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백성훈이 차기 회장이 될 거라 확신하는 건, 자신을 제외한 형제들 중 그 누구도 경영에서 재능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백성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우리 성아, 많이 바뀌었네.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농담도 할 줄 알고 말이야.”
“농담 아닌데?”
“농담이 아니라고? 네가 정말 나랑 차기 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지난 몇 년, 해외 리조트 매출 상승을 이뤄 낸 게 나인데 자격 정도는 되지 않겠어?”
“……해외 리조트?”
물론 그 생각이 백성훈의 착가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되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근 몇 년.
V호텔은 해외 리조트 매출이 폭발적으로 상승하면서 해외 사업 쪽으로도 눈을 돌리게 됐다.
설마 그 중심에 백성아가 있었을 줄이야.
백성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V호텔 해외영업팀을 총괄한 게 나거든. 그룹 내에서도 대외비로 진행한 일이긴 하지만…… 얼마나 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아직까지 모를 수가 있어? 다른 오빠들은 다 알고 있던데. 아, 내일이면 명함 새로 나올 거야. 아버지가 그동안의 실적을 인정해서 V호텔을 내게 맡기겠다고 하셨거든.”
백성훈은 백성아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형제들 중 자신과 경쟁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자신했다.
자신은 첫째인 데다가 능력도 있으니, 당연히 차기 회장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는 자만에 차 있었다.
실제로 다른 형제들은 이미 경쟁에서 낙오됐다.
그런데 설마 최근 몇 년간의 행적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백성아가 대뜸 복병으로 등장할 줄이야.
심지어 V백화점과 뗄 수 없는 관계인 V호텔의 대표 이사를 맡는단다. 백성아가 성과를 내면, 그만큼 백성훈과 비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오빠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다른 오빠들을 철저하게 짓밟았던 것과 달리, 나한테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너, 너…….”
“내일 아버지가 재밌는 발표를 하실 거야. 그때는 이런 표정 짓질 않길 바랄게. 감정 조절 못했다가 평가가 깎여서 내가 쉽게 이기면 재미없잖아.”
“백성아!”
“귀 아프니까 소리 지르지 말아 줄래? 할 말 없으면 이만 일어날게. 내일 보자.”
그 말을 끝으로 백성아가 자리를 떴다.
당장에라도 아버지를 찾아가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래 봐야 점수만 깎일 게 뻔하니 참았다.
그 대신 형제들을 찾아가 어째서 백성아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냐면서 화풀이를 해 댔다.
“성아? 난 당연히 형도 알고 있을 줄 알았지.”
“형, 우리가 그런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좋은 사이는 아니지 않아?”
“뜬금없이 찾아와서 지랄하지 말고 꺼져. 아니다. 온 김에 명품이나 좀 놔두고 꺼져. 형한테서 봐줄 만한 거라고는 명품 쪼가리가 전부잖아?”
“미안한데 난 성아 편이야. 형이 나한테 했던 짓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거든. 앞으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되게 불편하거든.”
물론 본전조차 건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다음 날.
백왕국 회장이 저녁 식사 자리에 자식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모두가 모인 건 백성아가 해외로 나간 이후 사실상 처음이었다.
“너희들 중 경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성훈이랑 성아, 두 사람뿐이다. 내 말이 맞지?”
“그렇습니다, 아버지.”
“나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슬슬 누구에게 V그룹을 맡길지 정하는 게 좋을 것도 같구나. 백성훈, 그리고 백성아.”
“네, 아버지.”
“
백왕국 회장이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폭탄선언을 했다.
“너희 두 사람 중 3점을 먼저 따내는 사람에게 내 뒤를 맡기겠다.”
경쟁을 통해 백성훈과 백성아, 두 사람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선택하겠다고 말이다.
* * *
안시현이 『VVIP』의 시나리오를 보고서 흠뻑 빠졌던 건, 김희숙 작가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건 백성훈이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두 작품.
『칠전팔기』와 『90일』에서 안시현은 원톱이었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한 건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그의 책임이 막중한 게 사실이었다.
따라서 다음 작품은 되도록 원톱보다는 투톱이나 쓰리톱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VVIP』는 쓰리톱 체제다. 세 명의 주연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분산될 예정이다.
다만 분산이 고르게 되지는 않을 터였다.
주연이라고 해도 극중에서 맡는 비중에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시현의 비중이 가장 높을 거라고 내다봤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다.
안시현과 한나래와 우정태.
세 사람 중 가장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게 안시현이니만큼, 김희숙 작가가 안시현에게 가장 막중한 역할을 맡겼을 거라고 예상하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김희숙 작가는 그 상식을 비틀었다.
세 주연 중 가장 비중이 많은 게 우정태, 그 다음이 한나래, 가장 적은 건 안시현이다.
안시현은 악역을 맡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항상 선역만 맡기보단 악역 또한 맡으면서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은 욕심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남궁수민 같은 묵직한 역할이 아닌,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스타일의 악역을 바랐다.
백성훈이 바로 그런 스타일이다.
허세 넘치고 찌질한, 상황에 따라 카리스마 있고 소름 끼치는 모습 또한 보여 주는 악역.
입체적인 인물상을 선호하는 김희숙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캐릭터다웠고,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 줘야 한다는 게 안시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포트라이트는 우정태와 한나래에 비해서 약하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백성훈이 너무 좋았다.
다시 한번 연기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뒤에서 누군가를 받쳐 주는 역할 또한 빛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자신이 있었으니까.
안시현의 첫 촬영 후.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과 한나래의 반응을 지켜보며 안시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와…… 완전 재수 없어요.”
“찌질한데 재수 없네요.”
“선배, 방금 전에 허세 부리는 거 보고 한 대 치고 싶었던 거 알아요? 어쩜 사람이 이럴 수 있지.”
안시현의 연기가 극찬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