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7화>
157화. 능력 있던데요?
백성훈.
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본인은 솔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싸가지가 없고, 자신감이 과해서 허세로 보이며, 거기에 일을 잘하니까 재수까지 없다고 말이다.
백성아가 차기 회장 경쟁자로 떠오르면서 여기에 한 가지 속성이 더 추가된다.
바로 찌질함이다.
어떻게든 백성아의 발목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약점을 잡히며 예상치 못한 찌질한 모습으로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보여 준다.
백성훈을 제대로 연기하려면 철저하게 망가져야 한다.
안시현은 그것을 제대로 수행해 냈다.
어떻게 연기해야 찌질해 보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망가지는지 정확히 알고 완벽하게 표현했다.
‘역시…… 백성훈 역에 시현 씨를 캐스팅하기를 잘했어. 백성훈은 바로 이 맛이지.’
『Timeless』의 오디션 이후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안시현의 연기를 지켜보며 김희숙 작가는 자신의 선택에 뿌듯함을 느꼈다.
백성훈은 망가짐을 감수해야 하는 캐릭터다.
분명 잘 생기고 키 크고 집안 좋고 능력까지 있는데, 작중에서는 백성아와 곽훈에게 꾸준히 농락을 당하며 별의별 몹쓸 꼴을 다 보여 준다.
그러다 한 번씩 나오는 악역 특유의 카리스마로 반전 매력을 보여 주기도 한다.
중요한 건 망가짐을 감수하면서 백성훈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할 만한 잘생긴 배우를 찾는 게 김희숙 작가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김희숙 작가는 1순위 후보로 안시현과 김진모를 놓고 조율을 했었다. 두 배우라면 망가지는 걸 감수하고도 백성훈이라는 매력적인 악역 캐릭터를 혼신의 힘을 다행 연기해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중 안시현에게 먼저 제안을 하게 됐다.
다행히 안시현이 흔쾌히 캐스팅 제안을 수락하면서 김희숙 작가는 캐스팅 걱정을 한결 덜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안시현의 캐스팅은 최선의 한 수였다.
안시현은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지닌 배역을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아는 배우였다. 입체적인 캐릭터성을 지닌 배역을 여러 차례 맡아 봤기에, 백성훈이라는 캐릭터를 맛깔나게 잘 살려 냈다.
특히나 특유의 싸가지 넘치는 말투와 허세 가득한 표정, 그러다가 백성아와의 두뇌 싸움에서 밀릴 때면 간혹 드러나는 찌질한 모습까지.
안시현이 곧 백성훈이고, 백성훈이 곧 안시현이었다.
믿고 있던 비서 곽훈에게 뒤통수 거하게 맞고 얼마 후, 백성훈이 V호텔 카페테리아에서 백성아를 만났다.
“오빠가 웬일이야? 무거운 몸 이끌고 호텔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너는 뒤통수 쳐서 이겨 놓고 비꼬기까지 해야 속이 시원하냐?”
“이거 왜 이래. 오빠 화법을 따라 한 건데 불편하게 하면 안 되지. 정 불편하면 찾아오지 말지 그랬어.”
“안 그래도 본론만 이야기하고 갈 생각이다. V호텔도 면세점 입찰 참여할 거냐?”
“당연히 해야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잖아.”
“오빠로서 충고하는 건데 쓸데없는 힘 빼지 말고 포기해. 면세점 입찰, 무조건 우리가 이길 거다. 이날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 넌 모를 거야.”
“걱정해 줘서 고맙지만, 우리도 준비 많이 했거든.”
“충고를 안 듣는다면 어쩔 수 없지. 곽 실장이나 데리고 가. 빌어먹을 첩자 새끼.”
그날 저녁.
백성훈이 임원 회의를 소집했다.
“면세점 입찰, 반드시 우리가 이겨야 합니다. 몇 년을 준비한 건입니다. V호텔에 내줄 수 없어요.”
“심기일전해서 준비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입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박 부장님이 한번 답해 보시겠어요?”
“저희 V백화점에 면세점이 들어서야 하는 당위성을 납득시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50점짜리네요. 입찰 경쟁은 사실상 V백화점과 V호텔의 2파전입니다. 경쟁자가 다수가 아니면 전략은 매우 단순해집니다. 상대에게 최악을 포기하고 차선을 선택하게 만들면 됩니다.”
“차선…… 아!”
곽훈 실장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으며 제대로 모양새를 구기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백성훈은 수년간 V백화점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며 경영 능력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면세점 입찰 건은 V백화점이 3년 넘게 준비해 온, 반드시 따내고야 말겠다고 벼르고 벼른 사업이다.
V호텔 또한 준비를 단단히 하고 면세점 입찰에 뛰어들겠지만…….
‘성아 성격상 100% 정면 승부를 해 올 거야. 곽훈 그 새끼한테 맞은 뒤통수, 이번 기회에 다시 되돌려 주지. 내가 원래 당하고는 두 발 뻗고 못 자는 성격이라, 받은 건 바로 되갚아 줘야 하거든.’
백성훈은 확신했다.
백성아의 성격상, 이번 면세점 입찰은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 * *
『VVIP』의 초반 전개는 백성아의 등장으로 인해 후계자 구도에서 불안함을 느끼게 된 백성훈의 모습과 비서였던 곽훈의 배신으로 인해 골프장 부지 구매 건에서 완패하는 백성훈의 모습을 그린다.
면세점 입찰은 『VVIP』의 중반부 핵심 소재다.
사실 면세점 입찰의 경우 『너와 나의 시간』에서도 깊게는 아니지만 다뤘던 소재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VVIP』가 『너와 나의 시간』의 아류작이라는 평가를 듣게 될 가능성도 있건만…….
임원들에게 면세점 입찰 건의 준비와 관련해서 지시를 내리는 백성훈을 연기하는 안시현의 모습을 보며, 촬영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느꼈다.
안시현이 연기하는 백성훈을 보면서 『너와 나의 시간』과 정영빈을 떠올릴 사람이 없을 거라는 걸, 『VVIP』와 『너와 나의 시간』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드라마라는 걸 말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싸가지 없으니까 꼴 보기 싫은데, 그게 또 은근 매력 있고 카리스마까지 느껴진단 말이지. 백성아와 맞붙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김희숙 작가는 악역이라고 해서 흔히들 생각하는 전형적인 이미지만으로 표현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백성훈처럼 입체적인 캐릭터성으로 시청자들이 매력을 느끼는 악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래야 백성아와 곽훈 캐릭터의 매력 또한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게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만약 백성훈이 흔해 빠진 악역이었다면?
똑 부러지는 스타일의 천재인 백성아와 친화력 있고 기회주의자적인 면모가 강한 독특한 스타일의 곽훈의 매력이 떨어졌을 거다.
극 중 비중은 곽훈과 백성아 쪽이 더 높다.
하지만.
세 주연 배역 중 드라마의 흥행을 가장 좌우하는 캐릭터는 아무리 봐도 백성훈이었다.
그렇기에 안시현에게 무거운 자리를 맡긴 것이다.
곽훈과 백성아와 달리, 백성훈은 안시현이나 김진모가 아니라면 제대로 소화할 배우가 없어 보였으니까.
* * *
1월 달까지.
『VVIP』는 4화까지의 촬영을 끝마쳤다.
주요 신들의 경우 미리 앞당겨서 촬영했기에, 분량 자체만 놓고 보면 6화까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2월 초.
안시현이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과 셋이서 식사를 하며 향후 스케줄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2월 중으로 편성이 잡힐 겁니다. 6월까지는 절대로 안 된다고 못 박아 놔서, 빨라야 7월일 거예요.”
“그 정도면 여유 있네요.”
“네. 『90일』 2월에 개봉하죠?”
“2월 말이요. 시사회는 다음 주고요. 별도의 홍보 일정은 없고, 시사회 참여하고 개봉 첫날 무대 인사 정도만 돌 것 같아요.”
“홍보하는 게 낫지 않아요?”
“저도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최소한의 광고를 내는 걸 제외하면 홍보 일정을 아예 소화하지 않기로 했어요.”
영화가 개봉하면 배우들이 홍보 일정을 소화하는 건, 영화의 흥행을 위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다. 때때로 방송 출연하는 꺼려 하는 배우가 홍보를 위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다.
헌데 『90일』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박의준 감독과 곽상필이 별도의 홍보 일정을 잡지 말자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심지어 상영관조차 지금껏 안시현이 출연했던 모든 영화관 중에서 제일 적게 확보했다.
물론 다른 예술영화들에 비해 상영관이 많긴 하다. 안시현이라는 이름값이 있기에 비교적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는 게 가능했지만…….
기껏 상영관을 많이 확보해 놓고 홍보 일정을 잡지 않는다니 의외였다.
‘내 이름값으로 홍보하고, 입소문을 타면 작품성만으로 승부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다른 수가 있는 건가?’
홍보 일정을 잡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안시현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VVIP』의 촬영 일정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거니와, 곽상필이 박의준 감독의 옆에 있기에 어련히 알아서 잘 판단했으리라고 믿은 것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저녁에 촬영장 갈게요.
-괜찮겠어요?
-어제 마무리 못한 신 오늘 마무리해야죠. 계속 NG 나서 찝찝했는데, 오늘은 원 테이크로 갈게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안시현이 촬영 일정과 관련해서 최창국과 문자를 주고받으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90일』의 언론 시사회를 위해서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다들 오랜만이네.”
안시현이 『90일』의 크랭크업 이후 간만에 배우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양소라가 안시현을 바라보며 슬쩍 눈치를 살폇다.
“선배님, 혹시 그 소식 들으셨어요?”
“소식? 무슨 소식?”
“오늘 시사회에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이 오실 거라고 기사가 떴거든요.”
“……감독님이?”
안시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Timeless』의 오디션 이후 기욤 뒤자르댕은 출국을 했다. 때문에 안시현은 그가 당연히 프랑스에 있거나, 촬영 문제로 인해 미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90일』의 시사회 참석이라니…….
안시현은 루머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욤 뒤자르댕은 정말로 영화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보며 안시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감독님, 언제 입국하셨어요?”
“오늘 아침에 왔어요. 어떻게 알고 기자들이 몰려들어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요.”
“설마 시사회 참여하시려고 오신 거예요?”
“당연하죠. 시현이 주연을 맡은 영화인데, 당연히 제가 와야지 않겠어요?”
라고 말은 한 뒤.
기욤 뒤자르댕이 안시현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시현의 매니저, 꽤나 능력 있던데요?”
그 순간.
안시현의 머릿속에 과거의 일 하나가 떠올랐다.
당시에는 별 생각 없이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기욤 뒤자르댕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 혹시 그때 정상 형이 여행을 갔던 게…….”
“제가 이곳저곳 잘 구경시켜 줬어요. 프랑스 음식이 제법 입에 맞는 것 같아 내심 뿌듯했었죠. 겸사겸사 설득도 당했고요.”
안시현은 그제야 기욤 뒤자르댕이 시사회에 참석한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전에 정상 형이 프랑스로 휴가를 간다고 했었는데…… 그때 기욤 감독님을 뵙고 온 건가? 겸사겸사 핀란드에서의 만남도 주선하고?’
기욤 뒤자르댕이 안시현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건 JM액터스에서도 익히 알고 있던 일이다. 워낙 언론에 대놓고 떠들어대다 보니 모를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JM액터스에서는 『90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욤 뒤자르댕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했다.
곽상필이 있기에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박정상이 곽상필의 도움을 받아 기욤 뒤자르댕과 만났고, 안시현에게 관심이 있는 그를 고작 몇 시간 만에 설득할 수 있었다.
‘뭐…… 기욤 감독님이 이렇게 와 주시면 자연스럽게 홍보가 될 테니 우리 입장에서야 좋은 거지. 이럴 걸 알고 있으니까 홍보 일정을 안 잡은 거구나.’
박의준 감독은 홍보 일정을 소화하는 것만큼이나 기욤 뒤자르댕의 시사회 참석이 이슈가 될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실제로 기욤 뒤자르댕의 이름값을 감안하면 시사회 이후 제법 큰 이슈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안시현만큼이나 기욤 뒤자르댕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의 열기가 뜨거웠으니까.
기욤 뒤자르댕에 대한 취재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90일』의 언론 시사회가 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