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8화>
158화. 수고 좀 해 줘
『90일』의 상영이 시작됐다.
안시현은 정혜영과 나란히 앉아,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차분하게 영화를 감상했다.
기욤 뒤자르댕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내가 신경 쓴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영화에만 집중하자.’
이내 그로부터 신경을 껐다.
기욤 뒤자르댕은 영화에 대한 평가를 칼 같기로 유명하다. 감독과 배우와의 친분과 관계없이 냉철하게 평가를 하고, 그 평가는 대체로 대중들의 시선과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어쩌면 기욤 뒤자르댕이 『90일』에 대해서 혹평을 할 수도 있다. 시사회에 참석시키는 건 성공했지만, 평가까지는 JM액터스가 개입할 수 없으니까.
심지어 절친인 곽상필이 부탁하더라도 기욤 뒤자르댕의 평가는 냉정할 터였다.
따라서 안시현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좋은 평가를 예상했다.
‘불안해할 필요 없어. 나도, 배우들도, 감독님과 스태프 모두 최선을 다해 만들었잖아.’
박의준 감독은 『90일』의 시나리오에 수많은 복선과 의미를 담아냈고, 촬영 내내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심지어는 의미 있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일부 스태프가 하루 종일 대기하고 있었던 적도 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시나리오를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배우들 또한 박의준 감독의 뜻을 이해하고서 고된 촬영 일정을 감수해 줬다.
촬영 과정만 놓고 보면 지금까지 안시현이 출연했던 작품 중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어렵사리 완성된 영화다.
기욤 뒤자르댕을 얼마나 만족시키느냐의 문제지, 혹평을 받지는 않을 거라는 게 안시현의 예상이었다.
상영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가운데.
짝짝짝.
한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이내 극장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기립박수를 친 건 바로 기욤 뒤자르댕이었다.
뒤이어 다수의 배우와 관계자들이 기립박수를 치긴 했지만 기자들의 관심을 끌진 못했다.
기자 간담회까지 남은 시간 동안, 기자들은 기욤 뒤자르댕에게로 몰려들었다. 그가 『90일』을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를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의준 감독은 아마추어입니다. 『90일』이 입봉작입니다. 독립영화 경험마저도 없죠. 그래서일까요? 영화 곳곳에서 다듬어지지 않는 거친 표현법이 눈에 띄더군요. 상필이 많이 도와준 걸로 아는데, 경험 없는 감독의 민낯을 완전히 가리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이에 기욤 뒤자르댕은 혹평으로 평가를 시작했다.
그는 독립영화에서마저 메가폰을 잡아 본 적이 없는 박의준 감독의 부족한 경험을 지적하고 나섰다.
안목이 있는 기자들은 기욤 뒤자르댕의 생각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극 중에서 아마추어적인 연출이 몇몇 눈에 보인 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혹평은 칭찬을 하기 위한 밑밥에 불과했다.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표현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씩 좋아집니다. 마치 많은 감정들이 결여된 채 살았던 한노을이, 버킷리스트를 이루어 나가며 조금씩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워 나가는 것처럼 말이죠. 박의준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라고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재능만큼은 진짜인 걸로 보입니다. 『90일』은 개봉하면 몇 번을 더 보고 싶은 좋은 영화입니다.”
기욤 뒤자르댕은 『90일』에 대해 비교적 좋은 평가를 내렸다. 함량 미달의 작품에는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기로 유명한 성격을 감안하면, 『90일』은 극찬까진 아니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은 게 맞았다.
이에 기자들이 추가 질문을 던졌다.
“안시현 배우의 연기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저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배우를 선호합니다. 그 배우가 키 크고 잘 생겼으면 좋고, 연기까지 잘하면 최고겠죠. 시현은 그 모든 걸 갖춘 배우입니다. 『90일』이 대중들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90%는 시현의 연기가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90일』일에 대한 평가와 달리, 기욤 뒤자르댕은 안시현의 연기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Timeless』에서 안시현이 주연 데이비드 킴 역을 맡았기 때문이라서가 아니었다. 『90일』일에서 보여 준 안시현의 연기가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시현의 연기가 『90일』을 좋은 영화로 탈바꿈시켰다고 생각합니다.”
『90일』의 호평과 안시현에 대한 극찬.
기욤 뒤자르댕의 발언은 곧장 기사화가 됐다.
* * *
보통 주목받는 영화가 개봉하면 인지도 있는 평론가의 평론이 관심을 끌기 마련이다.
하지만 『90일』의 경우 상황이 조금 달랐다.
대다수의 평론이 대중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기사화되지 않기도 했다. 출연 배우들의 기자 간담회 관련 기사조차도 안시현 정도를 제외하면 대중들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났다.
그럴 만도 했다.
무려 세계 최고의 거장이 『90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안시현의 연기는 극찬했으니까.
이에 대중들의 관심이 『90일』에 쏠렸다.
작정하고 만든 예술 영화에서 안시현의 연기가 어느 정도로 빛을 발할까?
언론 시사회 이후 공개된 최종 예고편을 본 대중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기욤 뒤자르댕이 극찬한 것처럼 안시현이 작정하고 연기를 한 게 눈에 보인다, 혹은 기욤 뒤자르댕이 『Timeless』의 캐스팅 때문에 립 서비스를 한 것이다로 말이다.
어떤 반응이건 사실 『90일』에 투자한 안시현과 혜인원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이런 대중들의 관심이 지속될수록 『90일』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을 테니 말이다.
2009년 2월 14일.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공존하는 가운데, 『90일』이 마침내 개봉을 했다.
* * *
사실 혜인원과 안시현의 입장에서는 『90일』이 대한민국에서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하더라도 손해를 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찌감치 일본에 수출이 확정됐고, 일본에서 개봉 첫날부터 15만 관객을 동원하며 안시현의 티켓 파워가 여전함을 재확인하게 됐으니까.
거기다 한국에서도 개봉 첫날 17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로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이 기세만 유지할 수 있다면 일본에서의 흥행이라는 부가 요소 덕에 손익 분기점은 거뜬히 넘을 것 같았다.
애초에 흥행을 기대하지 않고 제작한 예술 영화다. 손익 분기점만 넘어도 감지덕지한 상황이기에, 혜인원 대표와 안시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개봉 첫날 관객 수만 보면 손익 분기점을 거뜬하게 넘을 걸로 예상이 됐던 것과 달리, 『90일』은 안시현이 최근에 출연했던 『편지』나 『칠전팔기』에 비해서는 관객이 폭발적으로 붙지 않았다.
예술영화라는 선입견과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은 점,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들에 비해 상영관이 부족한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안시현이라는 배우에 대한 기대치와 기욤 뒤자르댕의 극찬 덕분에 개봉 후 열흘 동안 70만 관객을 동원하긴 했지만, 개봉 첫날 기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한 건, 일본에서 열흘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안시현에 대한 일본 팬들의 관심이 여전하다는 걸 입증했다는 것이다.
‘뭐…… 이 정도면 됐지. 1000만 넘을 거라 생각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흥행을 바라고 주연을 맡은 영화도 아니잖아? 흥행이야 손익 분기점 넘을 것 같으니 그걸로 되는 거야.’
안시현이 『90일』에 투자를 결정한 건, 박의준 감독과 함께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영화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였다.
제작비가 늘어나면 그만큼 투자사의 간섭이 심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된다면 『90일』의 완성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편지』나 『칠전팔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흥행이 더디고, 최종 스코어 또한 눈에 띄게 높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안시현은 지금의 상황에 만족했다.
촬영 기간 내내 안시현은 최선을 다해서 한노을이라는 사람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 덕에 대중들로부터 연기에 대한 칭찬을 받고 있으니까.
『90일』을 보고 온 관객들의 평가는 제각각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공통점은 존재했다.
바로 안시현의 연기에 대한 칭찬이었다.
안시현이 아니라 한노을이었다, 안시현이 아니라면 『90일』의 완성도가 떨어졌을 거다, 한 사람이 마지막 90일 동안 겪었을 심리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등 연기에 대한 칭찬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다.
‘프랑스에서…… 3월에 개봉한다고 했던가?’
손익 분기점을 넘을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안시현은 흥행에 대한 관심을 껐다.
그 대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프랑스에서의 개봉.
2009년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을 위한 초석을 하루빨리 다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출연작의 흥행과 관련된 안시현의 예상은 대체적으로 적중하는 편이었지만 『90일』은 달랐다.
개봉 20일 차.
프랑스에서의 개봉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뜬금없이 12만 관객을 동원한 것이다.
개봉 21일 차 10만 관객, 개봉 22일 차 11만 관객을 동원하며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재차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에 분위기를 보다가 상영을 내리려고 하던 영화관들의 입장이 대번에 바뀌었다.
관객 수가 줄어들 때까지는 당분간 상영을 이어 가고, 상황을 봐서 상영관을 늘려 주겠다는 곳도 있었다.
개봉 20일 차부터 시작된 관객 급증.
그 이유는 명확했다.
-최근 본 영화 중에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 같음. 한노을의 다양한 감정에 공감할 수 있어서 좋았음. 여자친구랑 보면서 눈물 참느라 혼났네.
-두 번 보면 다른 게 보이고, 세 번 보면 또 다른 게 보이는 좋은 작품.
-영화 초반의 아마추어 스타일의 연출이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좋아진다. 좋아지는 연출만큼 한노을이라는 사람도 성장해서 좋았다.
-한노을의 마지막을 다섯 번째 함께했습니다.
-감독판 언제 나오려나요? 소장판 나오면 꼭 소장하고 싶습니다.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나오는 최고의 영화.
바로 입소문이었다.
『90일』을 보고 온 관객들 중 상당수가 극찬을 했고, 심지어는 몇 번씩 보면서 박의준 감독이 영화 곳곳에 숨겨 놓은 장치와 복선들에 대해서 작정하고 분석하는 사람들 또한 생겨났다.
그렇게 입소문이 퍼지는 가운데, 최근 개봉작들이 모두 혹평을 받는 행운까지 더해지며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이 호기심에 『90일』을 보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개봉 24일 차이자, 프랑스 개봉 5일 차.
『90일』이 200만 관객을 돌파한 걸 확인하고서 김진석 대표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박 실장.”
“네, 대표님.”
“일본에서 지금 몇 만 명이지?”
“245만 명입니다. 관객 동원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어서 250만 내외가 한계일 것 같습니다.”
“250만이라…… 금방 추월하겠네. 이 기세면 300만까지는 가고, 잘하면 350만이나 400만도 노려 볼 수 있겠는데? 허허. 예술영화까지 흥행에 성공할 줄이야.”
“예상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어떻게든지 손익 분기점을 넘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 정도로 잘될 줄은 몰랐지. 행운이 따른 것도 있지만, 시현이의 연기가 생각보다 더 좋았어.”
“이 정도면 한계가 보이겠다 싶으면, 항상 그 이상을 보여 주는 녀석입니다. 제가 시현이의 매니저라는 게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김진석 대표는 예상보다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90일』의 흥행 원인으로 안시현을 지목했다.
기대 이상으로 한노을을 제대로 표현해 준 안시현의 연기가 많은 관객들을 매료시켰고, 그 덕분에 입소문이 퍼지며 개봉 20일 차부터 대반전이 시작된 거라고 보는 게 맞았다.
김진석 대표가 뿌듯함을 느꼈다.
그 역시 안시현처럼 흥행과 관련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있었기에,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안시현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물론…….
“박 실장, 슬슬 시작해 봐야지?”
“네. 휴가 내겠습니다.”
“이번 일, 자네한테 반 이상 달린 거라고 봐야 해. 힘들겠지만 수고 좀 해 줘.”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자처한 일인걸요.”
김진석 대표 또한, 흥행에 취하지 않고 당초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박정상에게 지시를 내렸지만 말이다.
이틀 뒤.
장기 휴가를 낸 박정상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