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58화 (158/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59화>

159화. 네가 여기 왜 있냐?

프랑스 칸느.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숙소에 짐을 푼 박정상이, 야경을 감상하며 기욤 뒤자르댕과 통화를 했다.

“네, 감독님. 지금 막 숙소에 짐 풀었습니다. 내일 오전에 브런치 함께하고 움직이시죠. 네.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박정상은 노트북을 켰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 부지런히 자판을 두들기며 한국에서 준비해 온 자료들을 차분하게 검토해 나갔다.

이미 한국에서도 수십 차례 검토했고, 김진석 대표와 곽상필에게 최종적으로 OK 사인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박정상은 자료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혹시나 수정할 부분이 있을까, 나아질 여지가 있을까 고민하며 토시 하나까지도 신경 썼다. 자신이 준비한 자료가 어필해야 할 대상들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수없이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칸느에서의 홍보전 결과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90일』의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박정상이 현재 추구하고 있는 목표다.

일전에 프랑스를 방문해 기욤 뒤자르댕을 만났던 것 또한, 황금영화제와 경쟁 부문 초청을 위한 홍보전에 필요한 것들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곽상필 또한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경험이 있지만, 홍보전을 통해서 만들어 낸 성과는 아니었다.

반면 기욤 뒤자르댕은 후배 감독들에게 수많은 조언을 해 줬고, 몇몇 감독의 경우 홍보전을 통해 세계 3대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에 적잖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따라서 곽상필보다는 기욤 뒤자르댕에게 조언을 구하는 게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주효했다.

안시현에게 흥미가 있는 기욤 뒤자르댕의 섬세한 조언 덕분에, JM액터스는 비교적 여유롭게 홍보전을 위해 자료의 준비와 검토를 할 수 있었으니까.

‘경쟁 부문 초청만 되면 8부 능선을 넘는다.’

『90일』이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작품상이나 연출상을 받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곽상필이 도움을 준 건 사실이지만, 『90일』의 진두지휘를 한 건 입봉 감독인 박의준이다. 시나리오의 기획 의도를 최대한 살리긴 했지만, 수상을 기대할 정도의 치밀한 완성도를 보여 주진 못했다.

하지만 남우주연상이라면?

평론가들은『90일』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이유가 안시현의 연기 덕분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만큼 『90일』에서 안시현이 보여 준 존재감은 엄청났다. 존재감만 놓고 보면 사이코패스 남궁수민을 완벽하게 연기했던 『편지』나, 원톱으로서 영화의 흥행을 견인했던 『칠전팔기』보다도 뛰어났다.

입봉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무명 배우와 신인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음에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안시현이 영화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가는 한노을의 생각과 행동을 적절하게 표현해 줬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더군다나 2008년부터 최근까지,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자격을 갖춘 영화들 중 남우주연상 수상을 확실시할 정도의 연기를 보여 준 배우가 없다.

그렇기에 지금의 홍보전이 중요했다.

일단 경쟁 부문 초청을 받아야 남우주연상 경쟁이 가능할 테니까 말이다.

다음 날 오전.

준비해 온 자료를 출력해 챙긴 박정상이 숙소 근처의 카페에서 기욤 뒤자르댕과 만났다.

브런치를 먹으며 박정상은 준비해 온 자료를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지, 기욤 뒤자르댕이 어떻게 도움을 줬으면 하는지를 설명했다.

이에 기욤 뒤자르댕이 미소를 지었다.

“사실상 저에게 대부분 의존해야 하는 전략이군요.”

“네. 현실적으로 감독님에게 의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불편하시다면 다른 차선책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돕는 거니까.”

기욤 뒤자르댕이 홍보전을 돕기로 결심한 건, 안시현이 『90일』에서 보여 준 연기가 황금영화제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개인적으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안시현이라면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90일』에서 안시현이 보여 준 연기력은 물이 올라 있었다. 아예 작품의 평가 자체를 뒤바꿀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였다.

물론 투표인단의 평가가 기욤 뒤자르댕의 평가와 다를 수도 있다. 기껏 경쟁 부문에 초청되어 놓고 무관으로 쓸쓸하게 귀국행 비행기에 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JM액터스와 박정상의 목표는 확고했다.

대한민국의 영화가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며 인정받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박정상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90일』이 프랑스 연지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될 수 있도록 온힘을 쏟았다.

시간이 훌쩍 흘러 4월 중순이 됐다.

황금영화제를 한 달 남겨 둔 시점.

-[단독] 『90일』포함 3개 작품,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박의준 감독, 입봉하자마자 가치를 인정받다.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90일』, 황금영화제에서 수상 영광 안을까?

-박의준 감독, ‘안시현 배우가 기적을 만들었다’.

-JM액터스, ‘황금영화제 수상 위해 적극 지원할 것’.

대한민국에서는 도합 3개의 영화가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90일』은 그중 하나였다.

JM액터스의 홍보전이 성과를 거두는 순간이었다.

*   *   *

칸느 현지에서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리스트 발표를 확인한 직후.

“나이스! 감독님! 저희가 해냈습니다!”

박정상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프랑스에 올 때보다 살이 조금 빠졌고 다크서클도 진해졌지만, 프랑스에 온 목표를 달성했기에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기욤 뒤자르댕과 하이파이브를 한 박정상이 지친 기색으로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해냈다…….’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경쟁 부문 초청이 가능했던 건 전략을 잘 짠 덕분이었다.

작품의 완성도가 아닌 주연 배우의 열연을 중심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기욤 뒤자르댕이 전면에 나서 『90일』에 대해 극찬하며 관심을 유도한 것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경쟁 부문 초청작 리스트를 확인한 직후.

대한민국 언론이 보도조차 하기 전에, 박정상은 김진석 대표에게 연락해 좋은 소식을 알렸다.

마음 같아서는 안시현에게 가장 먼저 연락하고 싶었지만, 그는 지극히 이성적인 스타일이었다. 지금은 김진석 대표에게 먼저 연락하는 게 옳은 선택지였다.

-수고했어, 박 실장. 고생이 많았어.

“아닙니다, 대표님. 모두가 힘을 합쳐 홍보전을 준비했기에 좋은 결과가 나온 거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기욤 감독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과를 확신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현지의 평가가 좋았다고?

“유명한 감독 다수가 시현이의 열연 덕분에 『90일』이 빛났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덕분에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감독님께서 큰 역할을 하셨군. 며칠 더 쉬다 귀국하겠나?

“혹시 황금영화제 기간 때까지 계속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기욤 감독님과 함께 시현이의 인터뷰 준비 좀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하게. 영화제 끝나면 시현이랑 같이 귀국하고. 회포는 얼굴 보고 풀도록 하자고.

“트로피와 함께 귀국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뒤.

박정상이 미소를 지은 채 기욤 뒤자르댕을 바라보았다.

“감독님, 딱 내일까지만 쉬고 인터뷰 자료 준비하려고 합니다. 도와주실 거죠?”

“허허…… 너무 부려 먹는 거 아닙니까?”

“힘드시면 저 혼자 하겠습니다. 사실 경쟁 부문 초청만 하더라도 감독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이래 놓고 계속 도움을 받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겠죠.”

“농담입니다. 이왕 도와준 거, 마지막까지 도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정상과 기욤 뒤자르댕이 조용히 주먹을 맞댔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했다.

황금영화제에서의 선전을 위해 말이다.

*   *   *

안시현이 『90일』의 경쟁 부문 초청 소식을 들은 건, 촬영 겸 대학로를 방문했다가 간만에 최정수를 만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언론이 보도를 하기 전, 김진석 대표로부터 먼저 소식을 전달받게 됐다.

동시에 안시현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무슨 좋은 일 있냐? 제수씨가 둘째라도 임신했대?”

“아뇨. 황금영화제 때문에요.”

“경쟁 부문 초청?”

“네. 언론들도 이제 하나둘씩 보도하겠네요. 아, 오늘 기분 좋네요.”

“난 별로인데. 내 카메오 출연은 완전 묻혀 버렸잖아.”

최정수는 처남인 박의준 감독을 위해서 『90일』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대사는 고작 다섯 마디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뿜어내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최정수의 단역 출연은 그리 큰 화제가 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스포트라이트가 안시현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연기를 보여 준 무명 배우와 신인 배우들의 경우, 차기작에서 알아보는 대중들이 생기며 인지도를 쌓아 나가고 있다.

그러나 『90일』이라는 작품 자체를 놓고 보면, 안시현에 대한 관심만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최정수는 그것이 불만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말과 달리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고, 큰 성과를 낸 안시현이 기특한지 어깨를 몇몇 툭툭 두들겨 줬지만 말이다.

“이거 이러다 남우주연상 받는 거 아냐? 처남이 초보치고는 잘했지만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을 정도의 역량을 보여 준 건 아니고, 사실상 네 덕분에 평가가 올라간 거잖아. 최근 개봉작 중에 주연 한 명이 이렇게 작정하고 작품을 끌고 간 게 있었나?”

“으음. 딱히 없었죠.”

“그 부분을 집중해서 조명하면 남우주연상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은데. 남궁수민으로 이루지 못한 꿈, 한노을로 이뤄 보자.”

『편지』의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당시, 최정수는 안시현의 남우주연상 수상 불발을 진심으로 당사자보다 더 아쉬워했다.

당시 안시현이 보여 준 사이코패스 연기는 정신과 전문의들조차 극찬할 정도로 최고였다.

그럼에도 더 좋은 연기를 한 배우에게 밀려서 결국 남우주연상 수상이 불발되고 말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90일』에서 안시현이 보여 준 연기와 존재감은 『편지』때보다 더 뛰어나고, 예술영화라는 이점이 존재하며, 무엇보다 마땅한 경쟁자가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잘 돌아가기만 한다면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또한 가능하다고 내다보는 이유였다.

이에 안시현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선배님도 못 해 본 걸 제가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싶네요.”

“말이 돼. 난 네 나이 때 그렇게까지는 연기 못 했거든. 자격 있으니까 너무 스스로를 평가절하하지 마. 자신감 가지고 당당하게 행동하라고. 그래야 투표인단에게 어필할 수 있지 않겠어?”

안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말을 황금영화제와 연결하는 최정수의 모습을 보며, 그가 얼마나 자신의 수상을 바라는지가 확실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거 하나만큼은 약속할게요. 아쉬움이 남지 않게 열심히 홍보하고 올게요.”

“트로피 가져오면 너 업고 공항 한 바퀴 돈다.”

“오. 그건 좀 재미있겠는데요?”

황금영화제 상영 기간 사흘 전.

박의준 감독과 안시현과 양소라가 다수의 기자들과 함께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른 배우들 중에서도 황금영화제에 같이 참석할 이가 있나 의사를 물어봤지만, 다들 차기작 촬영과 관련해서 스케줄을 빼기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양소라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제 인생 첫 비행기를 황금영화제 때문에 타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앞으로 비행기 탈 일 많아질 거야.”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황금영화제 다녀오자마자 차기작 오디션 있는데, 잘되길 빌어 주세요.”

“오디션 때 연기력 폭발해서 주연되길 바랄게.”

“소라 씨라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안시현과 박의준 감독과 한소라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 기자가 세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안시현 배우님, 실례가 아니라면 짧게 인터뷰 좀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인터뷰는 칸느에서 하겠다며 정중하게 거절하려던 안시현이, 멈칫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목소리, 너무 익숙한데?’

목소리가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린 순간, 기자의 얼굴을 본 안시현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진모 네가 여기 왜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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