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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59화 (159/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0화>

160화. 솔직히, 이번만큼은

김진모를 본 안시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최근에 김진모가 작품을 하지 않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긴 했지만, 설마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심지어 김진모는 촬영용 카메라와 녹음기를 지참한 채 안시현을 향해 기자 명함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배우 그만두기로 한 거야?”

“황금영화제 기간 동안 기자 체험을 하기로 했거든. 차기작 준비 때문이기도 하고, 평소에 관심이 있기도 해서 작정하고 준비 좀 했지. 어때, 이러니까 좀 기자 같아 보여?”

“기자 자격으로 온 거면 자리로 돌아가.”

“와, 매정한 거 봐라. 아무리 그래도 불알친구가 인터뷰 요청하는데 단독으로 하나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비행기 안에서 인터뷰 요청하는 건 누가 부탁하더라도 거절이야.”

안시현이 피식 웃었다.

말만 그렇게 하고서 김진모에게 앉기를 권유했다. 3명에서 비즈니스석 여섯 자리를 사용하고 있기에 편하게 앉아 인터뷰를 하는 게 가능했다.

“네가 날 인터뷰하면 반응이 뜨겁겠는데?”

“응. 그래서 내가 칸느에 가겠다고 자처한 거야. 무엇보다 기자가 아니라 배우의 시선에서 기사를 작성하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서 말이야.”

“확실히 색다른 시도이긴 하네. 자, 그럼 인터뷰 시작해 보자고. 질문은 미리 준비해 왔지?”

“당연하지. 기대해도 좋을 거야.”

김진모는 진짜 작정하고 기자 체험을 준비해 온 듯 안시현에게 제법 그럴듯한 질문을 연이어 던졌다.

김진모는 기자가 아닌 배우의 시선에서 황금영화제에 참석하는 안시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기자들과는 다른 의미로 핵심을 제대로 짚은 질문들이었다.

안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주 작정하고 준비해 왔구나. 이러니까 두 번째 연기대상을 받지.’

김진모는 2010년 봄에 방영하는 차기작에서 10년 차 철밥통 무능력 기자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특정 사건을 계기로 열혈 기자로 변해 가는 모습을 연기한다.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29.9%로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김진모는 주연으로서 안정적인 연기력을 뽐내며 흥행을 이끈 덕분에 생에 두 번째 연기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안시현은 김진모의 성과가 그저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이뤄 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김진모가 배우로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다.

‘잊을 만하면 자극을 주네.’

안시현에게 있어 김진모는 최고의 라이벌이자 좋은 자극제였다. 회귀 전이나 매 순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김진모를 보며, 안시현 또한 간혹 지치고 힘들 때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 안.

안시현은 김진모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결과에 연연하지 말자.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   *

프랑스 칸느의 한 호텔 로비.

“형!”

안시현이 자신과 박의준 감독, 한나래를 기다리고 있던 박정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간만에 만난 두 사람은 가벼운 포옹으로 반가움을 드러냈다.

“기욤 감독님은요?”

“약속 있어서 나가셨어. 일단 짐부터 풀자. 감독님, 그리고 소라 씨. 시현이 딱 1시간만 빌릴게요. 진모 넌 할 일 없으면 따라오고.”

“아, 전 패스요. 취재하러 다녀야 해서요.”

“지금 시간이…… 7시에 식당에서 뵙죠.”

“네. 이따가 뵙겠습니다.”

박정상이 안시현의 캐리어를 받아 들었다. 딱 봐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안시현을 배려했다.

스위트룸에 짐을 풀자마자 지친 기색으로 침대에 드러누운 안시현을 바라보며, 박정상이 미리 준비해 온 종이 뭉치를 건넸다.

“자, 선물.”

“오. 준비 많이 했는데요?”

“기욤 감독님이랑 고생 좀 했다.”

박정상이 건넨 종이 뭉치의 정체는 예상 질문 리스트와 그에 따른 답변을 프랑스어로 적어 놓고, 발음과 번역을 해 놓은 인터뷰 자료였다.

질문은 무려 100개나 됐다.

안시현은 박정상과 기욤 뒤자르댕이 준비해 놓은 자료를 보고서 내심 감탄했다.

자료에는 질문과 답변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어떤 뉘앙스로 말하는 게 좋을지까지, 주요 상황을 모두 가정하고서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다. 답변 또한 평소 안시현의 성격과 행동을 감안해서 작성해 놓은 티가 낫다.

이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 박정상과 기욤 뒤자르댕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훤했다.

“자료 고마워요, 형. 이거 다 외우면 되는 거죠?”

“외울 수 있겠어?”

“대사도 달달 외우는데 이 정도야 쉽죠. 내일 저녁까지 다 외워 놓을게요. 상황에 따른 뉘앙스도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쉬울 것 같아요.”

“답변은 마음에 들고?”

“최고예요. 그냥 이대로 말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렇게 말해 주니까 뿌듯하네.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는 거 같아.”

안시현이 박정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출국 전보다 다크서클이 진해지고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은 박정상의 모습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형의 노력이 빛을 발할 수 있게, 칸느에 머무는 동안 저도 열심히 홍보전에 임할게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아, 내일 혜인원 직원들도 올 거야.”

“혜인원에서도 온다고요?”

“우리의 막바지 홍보전을 도와주기로 했거든. 그리고 내일 대표님이 홈페이지에 재밌는 동영상 하나를 올리기로 했어.”

박정상은 그동안 JM액터스와 혜인원, 그리고 기욤 뒤자르댕이 힘을 합쳐 준비한 것들을 모두 알려 줬다.

이에 안시현은 혀를 내둘렀다.

황금영화제를 위해 꽤나 준비를 했을 거라고는 예상했다. 『편지』 때만 하더라도 곽상필 사단이 홍보전을 위해서 온갖 자료를 다 준비해 왔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준비는 그때보다도 더 철저했다. 다들 안시현의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얼마나 바라는지 준비 과정만 봐도 훤히 느껴질 정도였다.

“진짜 작정하고 준비했네요.”

“당연히 그래야지. 내가 아는 시현이 너라면 앞으로도 황금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노릴 기회가 있을 거야. 하지만 눈앞에 온 기회를 잡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넌 그냥 받아먹기만 해. 밥상은 우리가 다 차려 줄 테니까.”

“너무 진수성찬이라 다 먹을 수 있을까 모르겠는데, 소화제까지 먹어 가면서 노력해 볼게요.”

*   *   *

남우주연상과 각본상과 감독상.

『90일』은 도합 3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원래부터 남우주연상을 목표로 하고 있긴 했지만, 후보 발표가 난 이후 JM액터스와 혜인원은 더욱 노골적으로 남우주연상을 노리기로 했다.

이는 가장 현실적인 타협안이었다.

『90일』이 좋은 작품인 건 맞지만,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9할이 안시현의 열연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다.

각본상과 감독상을 노리기보다는 남우주연상을 노려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였다.

이에 JM액터스와 혜인원은 한 가지 전략을 내놨다.

안시현이 한노을을 연기하기 위해서 준비했던 과정들을 촬영한 동영상을 공개한 것이다.

근육질 몸매였던 안시현이 출연을 결심한 이후 각고의 노력 끝에 근육을 빼고 마른 몸매가 됐고, 해외 로케이션 때는 식단 관리를 더해서 병마가 몸을 잠식해 버린 한노을의 몸 상태를 흡사하게 표현하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분장이 더해지긴 했지만, 안시현의 노력이 없었다면 분장이 아닌 특수효과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고행에 가까운 안시현의 다이어트 과정은 칸느 현지에서 꽤나 화제가 됐다. 연기를 위해서 신체 조건까지 바꾸는 안시현의 노력이 많은 감독과 배우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기욤 감독님은 아예 나에 대해 언급을 안 하시네. 진짜 전략 잘 짰다니까.’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기욤 뒤자르댕은 안시현에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자신의 차기작에 주연을 맡은 배우의 작품에 대해 평가하면,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며 언급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또한 다분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그동안 기욤 뒤자르댕의 평가가 대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사심 없이 냉철한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기욤 뒤자르댕이 안시현이나 『90일』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건, 『Timeless』에 안시현이 출연하게 된 상황에서는 팔이 안쪽으로 굽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잘못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에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걸 택한 것이다.

그 대신 기욤 뒤자르댕과 친분이 있는 감독과 배우들이 『90일』에 대해 평가를 했다.

물론 그들 또한 자신들의 관점에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냉정하게 『90일』을 바라보았다.

“전 『90일』을 두 번 봤습니다. 첫 번째 볼 때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두 번째 볼 때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봤던 작품 중 가장 좋았습니다.”

“안시현 배우를 처음으로 본 건, 곽상필 감독의 작품인 『나는 간첩입니다』였습니다. 두 번째로 본 건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편지』였죠. 『90일』이 그를 보는 세 번째 작품인데, 볼 때마다 발전된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인 것 같습니다. 어째서 기욤 뒤자르댕 감독님께서 그를 원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긴말이 필요 없습니다. 안시현이라는 배우가 『90일』을 수작으로 만들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한노을의 감정 표현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한국 기자들에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안시현은 어째서 할리우드 진출을 안 하는 겁니까? 내가 그였다면, 그의 나이에 그 정도로 연기를 할 수 있었다면 진즉 할리우드에 진출했을 겁니다. 그는 지금 재능 낭비를 하고 있단 말입니다.”

관점이 다른 만큼 평가 또한 달랐지만, 결국에는 안시현에 대한 칭찬으로 귀결됐다.

그럴수록 안시현에 대한 평가는 더욱 올라갔다.

칸느에 온 한국 기자들은, 안시현에 대한 기사를 쓰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배우의 시선으로 바라본 김진모의 황금영화제 취재기가 한국에서 엄청난 화제가 됐다. 하루에 한 번꼴로 올라오는 취재기를 보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들마저 상당수였다.

또한 김진모는 자신의 팬클럽 게시판을 통해서 칸느에서의 취재기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그중 가장 많은 질문은, 과연 안시현이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있을지였다.

이에 김진모는 망설이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시현이가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한다면, 전 은퇴를 할 때까지 세계 3대 영화제는 바라보지조차 못할 것 같아요. 『90일』에는 시현이가 아니라 한노을이 있었어요. 한 사람의 인생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는 연기를 보여 줬는데 외면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아, 물론 걱정은 하지 않아요. 현지 분위기가 기자분들이 보도하는 것 이상으로 좋거든요.”

김진모가 답변을 한 것처럼 현지 분위기는 꽤나 좋았다. 상영 기간 동안 『90일』과 안시현의 연기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를 않았다.

JM액터스가 한노을이 되기 위한 안시현의 변화 과정을 공개한 것 또한 가선점으로 작용하는 모양새였다.

혜인원의 직원들까지 출장을 와서 칸느 현지에서의 홍보전에 집중하는 가운데…….

마침내 시상식의 막이 올랐다.

시상식장에 입장하기 전, 안시현은 한국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세례를 받았다. 취재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안시현이 당황할 정도였다.

“죄송한데 인터뷰는 시상식 끝나고 하면 안 될까요? 들어가기 전에는 질문 딱 하나만 받을게요.”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데, 시상식을 앞둔 지금의 기분이 어떻습니까?”

“전 지금까지 시상식을 앞두고 수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꺼려 했습니다. 제가 연기를 잘하면 어느 순간 수상 이력 또한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안시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미소를 지은 채 당당한 표정으로 기자들을 바라보며 답변을 마무리했다.

“솔직히, 이번만큼은 욕심이 나네요.”

수상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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