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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61화 (161/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2화>

162화. 응원해야죠?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만 따지면 김진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다. 한나래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을 만날 때마저도 연기에 대해 생각하는, 연인이기 전에 존경스러운 배우라고 인터뷰했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김진모마저도 안시현을 보면 가끔씩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안시현은 성과를 내고도 좀처럼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계속해서 자신을 채찍질하며 내달렸다.

그런 안시현을 보며 김진모 또한 자극을 받으며 노력하곤 했지만…….

“살살 해. 그러다 지치겠다.”

걱정 또한 되는 게 사실이었다.

다작을 하는 배우 중 과도한 스케줄로 인해 어느 순간 번아웃이 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니까.

김진모 본인이야 연기법이나 성격적으로 봤을 때 다작이 잘 맞는 스타일이지만, 안시현은 아니다.

메소드 연기법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상대적으로 다작을 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연기법에 많은 변화를 줬음에도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안시현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Timeless』까지 촬영하고 한동안 푹 쉴 테니까.”

“그럼 다행이고.”

김진모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안시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김진모의 입장에서는 『90일』부터 시작해 『VVIP』와『Timeless』까지, 쉴 새 없이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안시현이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특히나 안시현의 롤모델인 최정수가 번아웃으로 인해 꽤나 고생하지 않았던가.

이러다가 번아웃이 오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건, 친구이자 라이벌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Timeless』까지만 끝내면 당분간 신작 생각은 아예 하지 않을 거야.’

안시현은 『Timeless』까지만 끝내고 못해도 2년 정도는 푹 쉴 생각이었다.

이번 휴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차기작을 검토하려는 게 아닌, 어떤 한 작품의 제작을 기다리며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목적이다.

하고 싶은 작품이야 차고 넘쳤다.

회귀 전에 출연했던 작품과 출연하고 싶었던 작품들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했지만…….

‘너무 욕심 부리지 말자.’

안시현은 현실적으로 그중 유독 마음이 가는 작품 몇 개만을 선택하기로 했다. 모든 작품에 욕심을 내는 건 지금 당장을 보면 괜찮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리 바람직한 선택지가 아니다.

실제로 황금영화제에 참여하기 전, 대학로에서 만났던 최정수는 안시현에게 조언하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넌 다작 스타일은 아니야. 적당히 쉬어 가면서 해. 남들 여러 작품 하면서 인정받을 거, 한 작품에 몰빵하라고. 쯧. 쓸데없이 나 같은 놈을 롤모델로 삼아서 너도 고생이다.”

다작이 가능하지만,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안시현은 최정수의 조언에 공감했고, 『Timeless』 이후로는 작품 수를 줄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VVIP』까지였지만, 기욤 뒤자르댕이라는 변수가 끼어들며 한 작품이 더 추가됐다.

물론 후회는 하지 않았다.

앞으로 두 번은 없을 할리우드 진출이니만큼 모든 열정을 불태우고 싶었다.

휴식이야 그 이후에 느긋하게 즐기면 그만이다.

*   *   *

박정상과 김진모를 JM액터스 사옥에 내려 준 뒤, 안시현은 최봉팔과 함께 가평에 위치한 촬영장으로 향했다.

“파티는 이틀 후에 사옥에서 하기로 했어. 기자들 없이 관계자들끼리만 즐길 거야.”

“괜찮네요. 황금영화제 내내 기자들의 밀착 취재를 당했더니, 당분간은 좀 멀리 하고 싶어요.”

“잔뜩 시달렸으면 그럴 만도 하지. 뭐, 그래 봐야 다음 달 초까지 멀리하는 게 고작일 테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보름 후.

대한영화제 시상식이 예정되어 있다.

『90일』은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올해의 작품상까지 도합 4개 부문에서 후보를 배출했다.

다른 부문이야 수상자를 예측할 수 없지만…….

남우주연상의 경우 안시현이 확실시되는 분위기다.

2008년 여름부터 2009년 봄까지 압도적인 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없는 것도 문제였고, 주연 배우가 혼자서 영화를 이끌어 나간 영화가 죄다 흥행에 실패한 것 또한 문제였다.

심지어 『90일』은 최종 스코어 370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적으로도 성공했다.

흥행으로나 주연 배우로서의 존재감으로나, 안시현의 남우주연상 수상이 유력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심지어 대한민국 배우 최초로 황금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지 않았던가.

한 평론가는 안시현의 남우주연상 수상 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안시현 배우가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지 못할 경우의 수는 단 하나뿐입니다. 대한영화제가 황금영화제보다 권위 있는 시상식이라는 가정 아래, 안시현 배우가 『90일』일에 보여 준 것처럼 작품의 평가 자체를 뒤바꿀 만한 연기를 보여 준 배우가 2008년 여름부터 2009년 봄 사이에 있어야 합니다. 불가능한 경우의 수죠? 네. 수상 확률 100%라는 말입니다.”

안시현이 『90일』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 주기도 했거니와, 마땅한 경쟁자가 없다는 것 또한 컸다.

‘황금영화제나 대한영화제나 운이 따르는 거 같아. 상은 내가 연기를 잘한다고 무조건 받을 수 있는 건 아닌데 말이야.’

2000년 MBS 연기대상 당시, 안시현은 진광욱에게 밀려 연기대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너와 나의 시간』이 최고 시청률 57%대를 기록했지만, 진광욱이 주연을 맡은 『어의』가 60%를 넘기며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안시현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배우가 있다면 수상은 불가능하다.

공교롭게도 황금영화제나 남우주연상이나, 안시현과 경쟁을 할 만한 마땅한 배우가 보이지 않았다. 극한의 다이어트까지 하며 연기한 한노을 캐릭터가 그에 합당한 가치를 인정받을 판이 깔렸다.

‘그렇다고 너무 들뜰 필요는 없겠지.’

황금영화제와 대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건 분명 대단한 업적이다.

하지만.

안시현은 자신이 이룬 성과에 취할 생각이 없었다.

황금영화제 때문에 열흘 가까이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현재 안시현은 『VVIP』의 주연 배우로서 한창 촬영에 매진해야 할 시기다.

『VVIP』의 촬영은 6월 말에서 7월 중순 사이에 마무리될 예정이고, 중요한 신들의 촬영을 다수 남겨 두고 있는 상황이다.

『90일』의 성과에 들뜨다 보면 상대적으로 촬영에 집중하기 힘들 것 같았다.

이에 안시현은 다짐했다.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의 기쁨은, 이틀 후에 있을 파티까지만 가져가기로 말이다.

*   *   *

안시현이 간만에 촬영장에 복귀했다.

동시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안시현을 둘러쌌다. 헹가래를 하며 소리쳤다.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한턱 쏴! 한턱 쏴! 한턱 쏴!”

안시현은 기분 좋게 헹가래를 즐겼다.

그리고 내려오자마자 헹가래에 참여하지 않은 우정태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생크림 케이크를 얼굴에 덮어써야만 했다.

『Timeless』의 오디션 합격 때 겪었던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되자, 안시현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데자뷰인가요? 전에 한 번 겪은 거 같은데요.”

“크흐흐. 축하는 역시 케이크지!”

“케이크 맛있네요. 여유 있을 때 회식 한번 쏠게요. 일단은 밀린 촬영부터 끝내 놓고요.”

시차 적응조차 안시현을 막지 못했다.

잠깐의 축하 이후, 얼굴에 묻은 케이크를 닦아 내고 메이크업을 받으며 촬영을 준비해 나갔다.

그사이.

김희숙 작가가 안시현에게 다가왔다.

“며칠 쉬고 복귀해도 되는데, 괜찮겠어요?”

“안 그래도 그럴까 싶었는데, 그냥 빨리 끝내 놓고 방송 전까지 별장에서 푹 쉬려고요. 편성 아직 확정 안 됐죠?”

“며칠 전에 확정 났어요. 9월 첫째 주 수요일이에요.”

“9월이라…… 넉넉하네요.”

촬영은 6월 말에서 7월 중순 사이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9월 초가 첫 방송이라면, 최소 한 달하고 보름 정도는 쉴 수 있다.

심지어 첫 방송이 시작되더라도 홍보를 위한 일정과 일부 외부 스케줄을 제외하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물론 『Timeless』의 촬영을 준비해야 하기에 마냥 편하게 쉴 수 있는 기간은 두 달이 안 될 테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숨 돌릴 시간 정도로는 충분할 테니까.

“간만에 촬영하려니까 긴장되네요. 집중 못 해도 이해해주세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백성훈이 될 것 같은데요.”

“너무 쉬다가 와서 잘될지 모르겠네요.”

김희숙 작가는 확신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촬영에 들어가는 순간 안시현은 백성훈이 될 거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내가 이겼네? 그러게 내가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입찰하지 말라고 했잖아. 난 순수한 호의로 조언한 건데 말이야.”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안시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백성훈이 되었다. V백화점이 면세점 입찰에 성공하고 백성아를 약 올리는 모습은, 김희숙 작가가 대본을 쓰며 상상했던 백성훈 그 자체였다.

“……인정할게. 이번에는 내가 졌어. 내가 오빠를 너무 쉽게 봤던 것 같아. 더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했다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앞으로는 네가 이길 거란 말로 들린다?”

“응. 이길 거야.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거든.”

“넌 나한테 절대 안 돼. 곽훈 그 배신자 새끼가 내 뒤통수만 치지 않았어도, 네가 날 이길 수 있었을 거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

안시현의 엄청난 집중력에 한나래 또한 호응했다.

서로 감정이 한껏 당신 대사를 주고받으며, 1 대 1의 동점 상황에서 앞으로 있을 경쟁에 대한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최창국과 김희숙 작가가 시선을 교환한 뒤.

“OK. 이대로 가겠습니다.”

OK 사인이 났다.

간만에 복귀하자마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며 원 테이크를 해내는 저력을 보여 준 것이다.

OK 사인이 난 뒤.

“나래야, 이 신 말이야…….”

다음 신의 촬영을 위해 한나래와 대화를 주고받는 안시현을 보며 김희숙 작가가 피식 웃었다.

‘집중을 못하기는 무슨. 칸느에서 촬영하자고 했어도 곧장 몰입했을 사람이 말이야.’

*   *   *

황금영화제와 대한영화제 시상식에도 안시현이 경거망동하지 않은 건, 6월 중순으로『VVIP』의 주요 신들이 연달아 촬영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사전 제작의 장점 중 하나는, 편성에 맞춰 순차적으로 녹화를 할 필요가 없다는 데에 있다.

상황에 따라 후반부의 신을 먼저 촬영하고, 미뤄 뒀던 신들을 나중에 촬영해도 된다.

이에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이 자리를 비워야 할 황금영화제와 대한영화제 기간에 그가 없이도 촬영이 가능한 신들을 촬영하도록 스케줄을 짰다.

황금영화제와 대한영화제 사이.

애매하게 남은 기간 동안에는 안시현이 출연하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신들을 배치시켰다.

두 시상식이 모두 끝난 뒤 안시현이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요 신들을 촬영해 나가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덕분에 안시현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대한영화제 전까지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물론 안시현의 집중력은 신의 비중과 무관하게 여전했고, 한결같이 좋은 연기를 보여 주며 잠깐 동안의 공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VVIP』가 전체 촬영 분량의 70% 정도를 촬영했을 즈음, 대한영화제 시상식 당일이 됐다.

그리고 안시현은 일찌감치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현 씨, 시상식 준비하러 안 가요?”

“여유 있으니까 오전까지 촬영한 다음에 준비하면 돼요. 걱정하지 마시고 바로 촬영 들어가시죠.”

시상식 당일마저도 촬영을 하자고 조를 정도로 열정이 넘치는 안시현을 보며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은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최창국 PD가 카드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촬영 일찍 마무리하고 회식하러 갑시다. 다들 안 배우님 응원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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