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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62화 (162/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3화>

163화. 새벽까지만

준비를 끝마친 안시현은 시상식장으로 향했다.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고 시상식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자리가 많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좌석을 한 차례 훑어본 안시현이, 홀로 앉아 있는 최정수를 발견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왔냐?”

“일찍 오셨네요, 선배님.”

“근처에 볼일 있어서 빨리 왔다.”

“근처요? 혜인원?”

“어. 차기작 미팅하고 왔다. 다음 주에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는데, 별일 없으면 계약서 쓸 거 같네.”

“슬슬 다시 시동 거시는 건가요?”

“마누라가 그만 좀 놀라고 난리다. 처남이 입봉한 이후로는 잔소리가 배로 늘었어.”

최정수는 다작을 선호하는 배우가 아니다.

90년대에는 다작을 하며 연기력과 흥행을 모두 사로잡으며 정상급 배우로 발돋움했지만, 심하게 번아웃을 한 번 겪은 이후로는 다작을 자제하고 있었다.

게다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 또한 까다롭다.

실제로 『나는 간첩입니다』 이후 최정수가 출연한 영화는 『편지』 외에 단 하나고, 드라마는 없다. 연극 무대에 꾸준히 서고 있긴 하지만, 후배들이 꾸준히 연기를 해 나갈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역할에서 그치고 있다.

그런 최정수가 간만에 차기작 미팅을 했단다.

최정수가 롤모델인 안시현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 줬다.

“얼씨구. 누가 보면 네가 차기작 미팅한 줄 알겠다.”

“선배님 일이라 제 일인 것처럼 좋네요.”

“똥 싸고 앉아 있네. 그렇게 좋으면 상 받고 뒤풀이에서 한턱 제대로 쏴.”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번 대한영화제는 수상 후보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경쟁이 치열한 부문이 대부분이었다.

예외인 부문이 있다면 바로 남우주연상이다.

설사 안시현이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가정하더라도, 『90일』에서 보여 준 연기만 놓고 봐도 남우주연상 경쟁을 할 만한 후보가 마땅히 않았다.

그만큼 2008년과 2009년 사이에 주연 배우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흥행을 이끈 영화가 없었다.

이에 안시현 또한 남우주연상 수상을 예측하고서 시상식에 참여했다. 세 번째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굳이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감독님도 상 하나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박의준 감독이 각본상을 수상하는 것이었다.

『90일』은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올해의 작품상까지 도합 4개 부문에서 후보를 배출했다.

여우조연상과 올해의 작품상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 수상 가능성이 낮지만, 각본상의 경우 『90일』이 이뤄 낸 성과를 생각하면 노려 봐도 괜찮을 것 같다는 게 안시현의 판단이었다.

『90일』이 상업적으로도 제법 큰 수익을 거두고, 황금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을 통해 예술성을 인정받은 데에는 안시현의 공로가 지대하다.

이는 안시현 또한 부정하지 않는 부분이다.

자신의 역할이 컸다고 확신하기에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또한 낙관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자신의 좋은 연기를 한 것과 별개로, 함께 동고동락하며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 또한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기를 바랐다.

양소라를 비롯한 배우들은 『90일』을 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부분 차기작 계약에 성공했다. 일부는 벌써부터 브라운관에서 감초 역할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기까지 하다.

박의준 감독의 경우 입봉 감독치고는 괜찮은 능력을 보여 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황금영화제를 분위기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일부 명감독들이 박의준 감독의 천재성을 극찬하고 나서자, 치밀한 『90일』의 시나리오가 평론가들 사이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거시에 안시현 또한 한 손 거들었다.

귀국 후 인터뷰에서 자신이 열연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박의준 감독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그를 띄워 주는 인터뷰를 한 것이다.

“박의준 감독님이 치밀하게 짠 시나리오 덕분에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영화 곳곳에 숨겨 놓은 복선과 메시지를 찾아보는 것 또한, 작품을 즐기는 하나의 재미 요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영화를 라이트하게 즐기는 대다수의 대중들에게는 의도하고 숨겨 놓은 복선과 메시지를 찾으라는 건 그리 큰 의미가 없었지만…….

안시현의 팬들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작정하고 『90일』에 숨겨진 복선과 메시지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아예 사이트를 하나 만들어 관련 내용을 정리해 놓기까지 했다.

덕분에 『90일』의 흥행에 박의준 감독의 시나리오와 연출 또한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인정받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다.

*   *   *

“축하합니다! 『90일』의 박의준 감독님!”

결과적으로 안시현의 바람은 이뤄졌다.

박의준 감독이 쟁쟁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각본상을 수상한 것이다.

『90일』에서 함께했던 배우들 곽상필, 그리고 최정수의 축하를 받으며 박의준 감독이 무대 위에 올랐다.

박의준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안시현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차분하게 수상 소감을 이어 나갔다.

“제가 감독으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걸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 좋네요. 수상 소감은 짧게 하겠습니다. 제가 감독이 되겠다는 미친 소리를 했을 때 이해하고 지지해 준 매형과 제가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어 준 안시현 배우님에게 감사드립니다. 두 분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90일』 이후 박의준 감독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감독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최정수와 안시현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중에는 최정수가 박의준 감독을 지지해 줬다는 것과 그가 감독이 되기로 결정한 계기가 안시현이라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90일』이 더욱 관심을 받았다.

자신이 감독이 되는 계기를 제공했던 배우가 주연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결과적으로 작품의 가치를 드높이고 흥행 또한 성공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렇기에 박의준 감독의 수상 소감은 뜻깊었다.

영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평범한 학생이, 황금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는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최정수와 안시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박의준 감독이 자리에 돌아온 직후.

안시현은 다시 한번 박의준 감독에게 축하한다고 한 뒤, 최정수를 향해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내밀었다.

“만 원 주세요, 선배님.”

“와. 처남 진짜 독하네. 어떻게 첫 수상인데 눈시울조차 안 붉어지냐.”

“제가 수상 소감 말하면서 우냐 안 우냐로 매형이랑 안 배우님이 내기했나 보네요. 안 배우님이 안 운다에 걸었고 말이죠.”

“빙고.”

안시현은 박의준 감독이 각본상을 수상하더라도 감정이 복받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박의준 감독이 평소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성격이라서가 아니었다. 아무리 무덤덤한 성격이라도 첫 수상은 감정이 복받칠 만도 했다.

게다가 무려 대한영화제 각본상 아닌가.

그럼에도 안시현이 그런 예상을 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존재했다.

‘더 큰 무대를 경험했으니 대한영화제 각본상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만도 하지.’

박의준 감독은 불과 보름여 전에 황금영화제를 경험했다. 비로 본인이 수상을 하진 못했지만 『90일』이 경쟁 부문에 초청된 건 사실이고, 주연 배우인 안시현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때의 경험 때문에, 세계 3대 영화제를 두 눈으로 보고 왔기에 무덤덤할 거라고 본 것이다.

안시현의 예상은 제대로 적중했다.

각본상을 받은 박의준 감독은 복받치기는커녕, 무언가를 다짐한 듯한 결연한 모습이었다.

‘차기작 시나리오 나오면 보여 달라고 해야겠네. 얼마나 좋은 작품이 나올지 궁금하단 말이지.’

안시현은 확신했다.

『90일』을 통해 입봉작부터 최고의 성과를 낸 박의준 감독이, 회귀 전과 달리 좋은 감독으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이다.

*   *   *

박의준 감독이 각본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아쉽게도 여우조연상과 올해의 작품상에서 『90일』은 수상의 영애를 안지 못했다.

그럼에도 『90일』의 출연 배우들과 박의준 감독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웠던 각본상이라는 큰 선물을 받기도 했거니와, 수상을 못하는 게 이상한 대한영화제의 백미가 남아 있으니까.

지난해 남우주연상 수상자인 송강식이 무대 위에 올랐다. 남우주연상 후보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한 번씩 훑어본 뒤, 스태프로부터 봉투를 건네받았다.

“잡설이 길면 재미없겠죠? 거두절미하고 대한영화제의 대미를 장식할 남우주연상 후보 발표하겠습니다.”

송강식이 봉투를 열었다.

동시에 기자들과 배우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모두가 수상을 확실시하고 있는 후보였고…….

“축하한다, 시현아. 무거우니까 냉큼 올라와서 트로피 가져가라.”

결과는 역시나였다.

안시현이 황금영화제에 이어 대한영화제에서도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됐다.

세 번째 대한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에도 안시현은 비교적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애써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수상 소감을 이어 나갔다.

수상이 유력한 상황이다 보니 감정을 추스를 만한 여유가 있기도 했지만…….

괜히 들떠서 한창 중요한 신의 촬영을 연달아 앞두고 있는데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걸 원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새벽까지만 기쁨을 만끽하겠습니다.”

안시현이 기분 좋게 뒤풀이를 즐겼다.

간만에 맥주 한 잔을 입에 댔다. 기분 좋은 날이니만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크으! 우리 시현이 술 잘 마시네!”

“저 자식 대학 새내기 때만 하더라도 주당이었다니까. 소주 몇 병 정도는 혼자 거뜬할걸?”

“자자. 그러지 말고 한 잔 더 받아. 좋은 날인데 주인공께서 거나하게 취해 봐야지!”

“선배님들, 이렇게 약 파시면 곤란합니다.”

“쯧. 안 통할 줄은 알았는데 진짜 안 통하네.”

“매정한 자식. 이왕 마실 거 몇 잔 더 같이 마셔 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네. 아니에요. 저 내일 아침 일찍 촬영가야 돼서, 고삐 풀리면 곤란해요. 나중에 여유롭게 마시게요.”

물론 딱 한 잔만 더 하라는 최정수와 송강식의 집요한 권유는 단호하게 뿌리쳤지만 말이다.

뒤풀이는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안시현은 맥주 한 잔만 마시고 새벽까지 자리를 지켰고, 배우들의 매니저나 대리운전을 불러서 술 마신 사람들을 모두 챙긴 뒤에야 최봉팔의 픽업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오전 9시.

안시현이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찌감치 촬영장에 나와 스태프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최창국이 진심으로 당황했다.

“시현 씨가 여기 왜 있어요?”

“왜긴요. 오전 촬영해야죠. 저 잠 좀 깰 겸 촬영장 근처 산책하고 있을 테니까, 스탠바이되면 전화 주세요. 언제든지 백성훈이 될 수 있도록 차질 없이 준비해 놓을게요. 알겠죠?”

“괜찮겠어요? 되게 피곤해 보이는데.”

“점심에 쪽잠 자면 돼요.”

“허 참…….”

최창국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안시현의 연기 열정이 대단한 거야 최창국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첫 만남이었던 『너와 나의 시간』 때부터 안시현의 열정은 소름 끼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새벽까지 뒤풀이를 한 사람이 아침 일찍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 밖이었다.

심지어 잠이 덜 깬 상태로 커피를 마시며 촬영장 주변을 걸으며, 그 와중에도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오전에 촬영할 신을 점검했다.

그 모습을 보며 스태프들은 혀를 내둘렀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진짜 독종인 것 같아.”

“저러니까 성공하지.”

“재능 믿고서 거만하기만 하고 노력 안 하는 몇몇 배우들하고는 차원이 다르잖아. 괜히 같이 작품 했던 후배들이 존경한다고 난리 치는 게 아니라니까.”

스태프들이 안시현에 대해 칭찬하며 촬영을 준비해 나가는 사이.

‘오늘은 조금 강하게 가 볼까나.’

안시현이 잠을 깨고서 백성훈이 될 준비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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