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63화 (163/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4화>

164화. 슬슬 작정하고

베테랑 배우라고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다수의 중견 배우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완급 조절이다.

완급 조절은 하고 싶다고, 가르친다고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디렉팅과 수많은 NG를 통해 어떻게든지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배우 본인의 능력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게 사실이다.

대체로 완급 조절은 연기 경험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예외가 있다면 김진모 정도였다.

김진모는 데뷔할 때부터 완급 조절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탁월한 완급 조절 능력은 데뷔 이후 줄곧 그의 장점 중 하나로 부각되고 있으니까.

안시현은 회귀 직후 한동안 완급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다. 회귀 전에는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서 필모그래피를 쌓았기에, 주연 배우로서 완급 조절을 깨달을 만한 계기가 마땅치 않았다.

물론 회귀 후 다수의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며 자연스레 완급 조절을 하게 됐지만 말이다.

안시현은 『칠전팔기』를 촬영하며 완급 조절이 제대로 물올랐고, 이는 『90일』이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출연 분량의 70% 가까이를 차지하는 안시현이 적절하게 완급 조절을 해 줬기에, 관객들은 지루하지 않고 러닝 타임 내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이는 김희숙 작가가 김진모와 안시현 중 한 명을 백성훈으로 캐스팅하겠다고 결심한 이유였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배우 중 두 사람보다 완급 조절을 잘하는 배우는 없으니까 말이다.

백성훈은 필연적으로 힘을 빼야 하는 신이 많은 캐릭터다. 그러다가 가끔씩 찌질함의 끝, 혹은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마음껏 뽐내며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안시현이 이번에 촬영하게 될 신은, 드라마 후반부 백성훈의 절망을 드러내야 하는 신이다.

때문에 안시현은 아침 일찍 나와 차분하게 대본을 검토하며 촬영을 준비한 것이다. 평소보다 더 정성을 들일 정도로 중요한 신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정태는 미리 준비해 온 생크림 케이크를 매니저에게 건네주며 고개를 내저었다.

“쩝. 남우주연상 수상 기념으로 케이크 마사지 한번 시켜 주려고 했는데, 분위기 보니까 방해하면 안 되겠네. 병만아.”

“네, 형.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너 시현이 연기하는 거 직접 보고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본 것보다 연기가 별로인 것 같다고 했었지?”

“솔직히…… 조금 아쉽긴 했어요. 아무래도 현장에서 보는 거랑 완성본을 보는 거랑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제가 너무 기대를 해서 실망도 컸던 거겠죠.”

“그게 아니라는 걸 오늘 알게 될 거야.”

“뭔가 확신하는 거 같네요?”

우정태가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안시현을 바라봤다.

“그거 알아? 시현이 저 녀석, 『VVIP』 촬영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작정하고 연기한 적이 없어.”

*   *   *

『VVIP』의 시나리오를 받고 백성훈이라는 캐릭터를 구축하면서 안시현이 가장 많이 신경 쓴 건, 힘을 빼고서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백성훈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힘을 빼고 완급 조절을 하며, 그 와중에 캐릭터성까지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힘을 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완급 조절 능력이 물오른 지 제법 됐으니까.

문제는 힘을 뺀 상태로 악역인 백성훈의 캐릭터성을 어떻게 표현할지였는데…….

이 또한 생각보다 고생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

백성아와 곽훈을 받쳐 줘야 하는 역할인 백성훈이기에 필요한 완급 조절을, 특유의 거만함과 여유로움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 결과.

안시현의 연기한 백성훈은 김희숙 작가의 기획 의도를 완벽하게 살리게 됐다.

뼛속까지 오만하고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묻어나는 재벌이, 백성아와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치부가 하나둘씩 드러나며 망가지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주리라.

다만 힘을 뺀 상태로 대부분의 신을 연기했기에 임팩트 자체는 크지 않아 보였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앞으로 안시현이 촬영을 앞두고 있는 신의 대부분은, 백성훈이 존재감을 드러내야만 하는 신들이니까.

“액션.”

최창국의 사인과 함께 촬영이 시작됐다.

쾅!

백성훈이 거칠게 문을 열고서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신경질적으로 서재 책상의 서랍을 뒤적이고, 몇몇 서류와 물건을 꺼내 책장 뒤쪽에 숨겨져 있는 금고에 집어넣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 비서, 이 새끼야! 너 뭐하는 놈이야! 출국 금지가 될 동안 뭐하고 있었냐고!”

백성훈은 백성아의 비리 폭로로 인해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그 시작은 관례, 혹은 편법으로 포장했던 문제들을 백성아가 꺼내 든 것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문제는 크지 않았다.

백성훈이 타격을 입은 건 사실이었지만, 회복하지 못할 내상은 아니었다. 마지막 승부를 위해 준비를 할 여력은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이후 백성아가 치킨게임을 선언한 게 문제였다.

그녀는 V그룹 계열사들에 만연한 온갖 문제를 폭로하며 백성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백성아 또한 타격을 입었다. V그룹의 일원인 이상 그녀 또한 타격을 입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법적으로 몇몇 책임을 인정하고 대처 또한 깔끔하게 하면서 위기를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버렸다.

반면 백성훈은 궁지에 올렸다.

부당한 이유로 인해 해고됐던 직원들과 소위 말하는 갑질을 당했던 하청 업체 직원들의 폭로까지 더해지며 빠져나갈 구멍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거기에 내부고발로 인해 V백화점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법적 문제를 저질렀던 게 폭로되며 외통수가 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백성훈은 어느새 출국 금지를 당하고 구속 수사가 예정된 상태였다.

아버지인 백왕국 회장은 그를 외면했다.

“그게 네 그릇의 한계다. 나쁜 짓을 할 거면 철저하게 들키지 말든가, 들킬 수 없게 만들었어야지. 이걸로 3 대 1이 됐구나. 백화점 정도는 계속 운영하게 해 주고 싶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 난 막아 줄 생각도 없고.”

“아, 아버지……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딱 한 번만요. 이대로면 저 감옥 들어가야 돼요. 제발요. 제발…….”

“쯧. 네 멍청한 행동 탓에 지난 보름 동안 증발해 버린 주식이 얼마인지 알면 그딴 헛소리는 못할 텐데.”

백왕국 회장은 백성훈이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기를 바랐다. V그룹 계열사 주식을 왕창 날려 버린 멍청한 아들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당연히 V전자 법무팀의 도움은 바랄 수도 없는 상황.

패닉에 빠진 백성훈이 별장을 찾았다. 최대한 증거 인멸을 시도하려는 생각이었지만…….

“손 떼세요, 백성훈 씨.”

그마저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금고가 훤히 열린 상태에서 경찰들이 서재에 들이닥치며 백성훈을 제압한 것이다.

“손 떼, 이 새끼들아.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 나 백성훈이야! V그룹 차기 회장이 될 백성훈이라고! 니들 영장 가지고 왔어? 이거 누가 시킨 거야!”

“네, 네. 일단 미란다 원칙부터 고지하고요.”

미란다 원칙을 고지한 뒤.

형사가 백성훈의 눈앞에 영장 두 개를 흔들며 약 올리듯이 보여 줬다.

“여기 원하시는 영장 대령했습니다. 이건 압수 수색 영장, 이건 체포 영장. 아, 출국 금지된 거 확인하시고 일단 증거물부터 숨기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어떻게 합니까. 나라면 그냥 태워 버렸을 겁니다. 그게 깔끔하잖아.”

“이거 음모야! 백성아 그년이 날 매장하기 위해 함정을 판 거라고! 난 억울해! 변호사 불러와! 그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야.”

“아이고. 억울하세요? 그럼 그냥 묵비권 행사하세요. 증거도, 증인도, 피해자도 차고 넘쳐서 입 다물고 있을수록 불리해질 테니까요.”

“선배님, 이거 다 챙길까요?”

“사소한 거 하나조차 남기지 말고 싹 다 챙겨. 그냥 이 서재 안에 있는 걸 통째로 옮긴다고 생각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백성훈은 소리를 치며 발악했지만…….

그의 양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경찰들은 서재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싹 다 가져갈 듯이 압수 수색을 진행하고 있었다.

금고 안에 있는 그의 치부들이,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추잡한 짓거리의 흔적들이 하나둘씩 경찰들의 손에 들려 박스에 담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성훈이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그는 직감했다.

“……좆됐네.”

자신이 그동안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걸,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을 뺏기게 될 거라는 걸.

*   *   *

최창국과 김희숙 작가가 시선을 교환했다.

원래는 백성훈이 경찰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걸 지켜보는 상태에서 촬영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즉.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감정을 담아 내뱉은 백성후느이 마지막 대사는 안시현의 애드리브였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한 건 OK 사인 때문이 아니었다. 안시현이 워낙 좋은 연기를 보여 줬기에 원 테이크는 기정사실이었다.

시선을 교환한 건 마지막 애드리브를 살릴지 말지를 놓고 조율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드리브를 살리는 쪽이, 백성훈의 캐릭터성을 더욱 부각시킬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OK.”

이내 최창국이 OK 사인을 냈다.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우정태가, 안시현에게로 다가가며 물병을 건네줬다.

“마지막 애드리브 괜찮은데?”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네요. 분위기 보니까 살릴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오늘은 케이크 없어요?”

“마사지를 해 주기는 좀 그렇고, 이따가 촬영 중간에 스태프들하고 나눠 먹자. 일부러 넉넉하게 사 왔거든.”

“좋죠. 아, 형. 이따가 촬영할 신 말인데요.”

안시현은 이왕 우정태가 먼저 다가온 거, 오후에 촬영할 신들과 관련해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에야 그를 놓아주었다.

우정태의 매니저는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한참 후.

안시현으로부터 벗어난 우정태가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매니저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속삭였다.

“어땠어? 이번에는 좀 소름 좀 돋았어?”

“저 진짜 안시현 배우님 연기 보면서 소름 돋았어요. 눈빛이 아주 그냥…….”

“살짝 맛 간 것처럼 보였지?”

“네. 방금 촬영했던 신은…… 제가 그동안 TV나 영화를 보며 소름이 돋았던 연기들과 똑같았어요.”

우정태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매니저는 박정상이나 최봉팔만큼 안목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작품과 관련해서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됐다.

무엇보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솔직한 의견을 말해 주는 게 그의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이번에도 매니저는 간만에 제대로 각 잡고 몰입한 안시현의 연기를 시청자의 입장에서 평가해 줬다.

“앞으로는 저 모습 자주 보게 될 거야. 이제부터는 백성훈이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 신 위주로 촬영이 남아 있으니까.”

“이러면 형이 고생하는 거 아니에요? 존재감이 너무 강한 것 같은데…….”

“괜찮아.”

매니저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주연 중 가장 비중이 낮은 안시현이 작정하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좋다. 악역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내야 드라마의 매력 또한 살아나니까.

문제는 한나래와 우정태가 안시현보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안시현이 존재감을 낮춰서 재촬영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드라마의 퀄리티나 몰입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정태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방금 전 안시현의 연기가 대단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인지했다.

그럼에도 우정태는 자신감이 넘쳤다.

“나도 쉽게 생각하고 출연 결정한 게 아니라는 걸, 슬슬 작정하고 보여 줄 때가 된 것 같거든.”

그 또한 허술한 마음가짐으로 『VVIP』의 출연을 결정한 게 아니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