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5화>
165화. 곤란한데
김희숙 작가로부터 『VVIP』의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우정태는 고민을 많이 했다.
무려 김희숙 작가가 주연 배역을 제안해 줬다.
우정태의 입장에서는 진심으로 감사한 일이었고, 배우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하게 다질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을 내렸다.
김희숙 작가의 작품은 배우들 사이에서 신인 등용문으로 불린다. 그녀가 새 얼굴을 발굴하는 걸 선호하기도 하거니와, 그녀의 작품에서 주연이나 조연을 맡은 뒤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들이 꽤 많기 때문이다.
굳이 멀리 돌아갈 필요조차 없다.
당장 안시현만 하더라도 『형아, 동생』을 통해 주연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은 뒤, 『너와 나의 시간』에서 정영빈을 연기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니까.
우정태와 한나래 또한 『너와 나의 시간』에 출연한 게 배우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인터뷰를 할 때마다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했다.
때문에 우정태의 입장에서는 『VVIP』의 출연을 더욱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연기 못하면, 나 때문에 작품이 무너진다.’
그림 자체는 괜찮다.
『너와 나의 시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던 안시현이 악역으로서 몸을 낮추고, 두 사람과 친분이 있고 『너와 나의 시간』에 함께 출연했던 한나래와 우정태가 스포트라이트를 나눠 가진다.
이상적인 그림임이 분명하다.
우정태가 부담감을 이겨 낼 수 있다면 말이다.
한나래는 비중이 가장 크긴 하지만, 성별이 다르고 백성훈과 대척점에 있는 백성아 역을 맡았다.
우정태는 다르다.
잘못하면 우정태가 악역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악역을 연기한 배우의 카리스마가 엄청난 반면, 주인공의 경우 해당 배우가 방영 내내 어리숙한 캐릭터성을 연기하며 오히려 반감을 산 드라마도 있었다.
최고 시청률 43%를 기록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지만, 종영하고 보니 주인공이 아니라 악역이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정태는 자신이 연기를 잘못하면 곽훈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 부정적일 거고, 『VVIP』의 흥행에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했다.
곽훈은 머리를 쓰는 캐릭터다.
백성아의 편에 붙어서 두뇌 싸움에서 백성훈을 압도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역할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곽훈의 존재감을 살릴 만한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캐스팅을 수락하기 전.
우정태는 김진모를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의 고민을 들은 김진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진솔한 조언을 해 줬다.
“형, 제가 편지 촬영할 때 정수 선배랑 시현이 때문에 고민 엄청 많이 했던 거 알아요?”
“그래? 연기만 놓고 보면 전혀 안 그러던데?”
“황경신 캐릭터가 주연이긴 하지만, 사실상 이성우의 뒤를 받쳐 주는 역할이잖아요. 제가 연기를 못하면 정수 선배랑 시현이의 존재감 때문에 황경신이라는 캐릭터의 존재감이 묻힐 수도 있을 것 같더라고요.”
“지금 내 상황이랑 비슷하네. 영화에서는 황경신의 존재감이 워낙 확실해서, 난 네가 그쪽으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을 줄 알았어.”
“캐릭터 구축하면서 탈모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니까요. 어휴.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그래도 그 덕분에 황경신을 제대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극복한 거야?”
“저 같은 경우는…….”
김진모는 자신이 황경신 캐릭터를 연기하며 고민했던 부분들과 그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는지 우정태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줬다.
김진모의 이야기를 들은 우정태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는 거네.”
“고민 많이 하지 마요, 형. 형만 잘하면 나머지는 다 해결되는 거니까.”
“……그래. 제대로 못하면 은퇴한다 생각하고 죽어라 매달려 보지 뭐. 조언 고맙다.”
이후 우정태는 죽기 살기로 곽훈 캐릭터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곽훈이라는 사람을 시청자들이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만이 답이라는 걸 깨닫고, 어떻게 하면 캐릭터성을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백성훈과 백성아, 안시현과 한나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곽훈만을 생각하고,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은퇴한다는 생각으로 간절하게 매달렸다.
‘주연으로서 시현이와 함께 처음으로 작품을 하게 된 만큼, 그동안 내가 성장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만약 『너와 나의 시간』에서 안시현이 정영철 역에 우정태를 추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우정태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몇 차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혔다.
여자친구와의 미래를 위해서 배우의 길을 포기했을 것 같다고,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 연예기획사 직원으로서 일하고 있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만큼 우정태는 안시현이 당시 무심하게 건넸던 도움의 손길에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곽훈을 제대로 연기하고 싶었다.
네 도움을 받아 데뷔한 배우가 이렇게까지 좋은 배우로 성장했다는 걸, 주연 배우가 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여기서 막히면 배우로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어. 조연으로서는 괜찮지만 주연으로서는 영 아닌 배우로 남고 싶지 않아.’
간절하게 매달린 결과.
우정태는 김희숙 작가가 구축한 곽훈 캐릭터에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는 특징을 추가했다.
곽훈이 백성아를 돕는 이유를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며 캐릭터성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다행히 우정태의 아이디어는 김희숙 작가의 OK 사인을 받으며 채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우정태는 죽어라 연습한 곽훈의 캐릭터성을 작정하고 드러내 볼 생각이었다.
안시현만큼은 아니지만 우정태, 한나래 또한 주요 신의 촬영이 제법 남아 있다. 함께 출연하는 신이 많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안시현이나 김진모만큼은 아니지만…….
우정태 또한 완급 조절에 대해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한 신에서는 힘을 빼기 위해 노력하곤 했다.
그래야지 중요한 신에서 존재감을 폭발시킬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으니까.
‘우정태가 이렇게 연기를 잘했냐는 시청자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야 말겠어.’
* * *
『VVIP』의 캐스팅을 앞두고 김진모에게 조언을 구한 건 한나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만 우정태와는 이유가 조금 달랐다.
연예인으로서의 미래를 고민하며 배우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좀처럼 발전이 없던 시절, 한나래는 안시현의 연기를 보며 메소드에 입문하게 됐다.
그리고 그 선택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늘지 않던 연기 실력이 빠르게 향상됐고, 배우로서 자리를 잡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한나래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수차례 주연을 맡으며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갔고, 영화와 드라마 가리지 않고 안정된 연기력을 뽐내며 수상 경력 또한 다수 쌓았다.
그 과정에서 안시현은 다시 한번 한나래의 연기 인생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김진모를 통해 메소드 연기로 인한 후유증 해소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메소드 연기를 할 줄만 알지 쌓이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던 시절, 정신과 치료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한나래는 안시현의 도움을 받아 상황을 이겨 내며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 한나래는 다작을 피했다.
안시현과 달리 메소드의 정석에서 벗어나지 않는 연기법을 이어 온 그녀였기에, 후유증 때문이라도 다작을 피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덕분에 그녀는 작품 수 자체는 많지 않지만, 매 작품 안정적인 연기력을 보여 주는 주연급 여배우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좀 연기에 대해 알아 간다 싶을 때.
김희숙 작가로부터 『VVIP』의 캐스팅 제안, 그것도 세 명의 주연 중 가장 비중이 큰 백성아 역을 제안받게 됐다.
하지만 좋은 일임에도 그녀는 선뜻 답변을 하지 못한 채 김진모를 만나 속내를 털어놓았다.
“둘 중 뭘 선택하는 게 좋을까?”
공교롭게도 김희숙 작가와 비슷한 시기에, 한나래에게 좋은 조건으로 주연 배역을 제안한 작품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VVIP』, 그리고 『아내가 가출했다』.
두 작품의 시놉시스를 살펴본 김진모는 애인이자 내년이면 남편이 될 사람으로서의 유머러스한 모습이 아닌, 간만에 선배로서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넌 두 작품 중 뭐가 더 마음에 드는데?”
“아직까지는 5 대 5인 것 같아. 다만…….”
“다만?”
“두 작품 다 내가 지금껏 맡아 본 배역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캐릭터를 연기해야 돼서 고민이야. 한쪽은 막장 냄새가 나긴 하지만 악역이고, 다른 한쪽은 재벌물이라서 저울질하기가 힘들어.”
“답 나왔네. 캐릭터만 놓고 봤을 때 5 대 5라면, 다른 이유들을 하나둘씩 따져 보면서 다시 저울질을 하면 되는 거잖아. 아무리 봐도 다른 조건은 『VVIP』 쪽이 더 좋은 것 같은데? 네 롤모델과 함께 연기할 수도 있고.”
“으음. 역시 그러는 게 좋겠지?”
한나래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내가 가출했다』에서 맡게 될 악역 배역 또한 꽤나 마음에 들긴 했지만, 캐릭터를 제외한 다른 조건에서 『VVIP』가 워낙 압도적이었으니까.
특히나 그녀의 롤모델인 안시현과 간만에 다시 호흡을 맞춘다는 것 또한 큰 이유로 작용했다.
‘비중이 가장 많은 만큼 확실하게 준비해야겠어.’
그로부터 수개월 뒤.
한나래는 사인이 나면 삽시간에 백성아에 몰입할 수 있을 정도로 캐릭터를 탄탄히 구축했다. 매 신을 촬영할 때마다 백성아 그 자체가 됐다.
이전 작품들보다 몰입도를 더 끌어 올린 것이다.
그만큼 후유증이 심하겠지만 괜찮았다.
‘이번 작품 끝내고 결혼하고 2년 정도는 쉴 거니까. 재충전해서 다시 연기하면 되는 거지.’
후유증을 극복할 만한 휴식기는 넉넉할 테니까.
* * *
대한영화제 이후 주요 신의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안시현과 한나래와 우정태가 함께 있는 시간 또한 늘어나게 됐다.
원래는 이전부터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어야 하건만, 안시현의 일정으로 인해 주요 신들의 촬영이 뒤로 밀리면서 이제야 자주 함께하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의 사이는 좋았다.
선후배 관계이니만큼 평소에도 간간이 얼굴을 보는 사이였고, 우정태와 한나래가 인터뷰만 했다 하면 안시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호감이 큰 덕분이었다.
다만 그로 인한 부작용 또한 존재했다.
‘이건 무슨 나한테 서로 누가 연기를 잘하는지 평가해 달라고 경쟁하는 것 같잖아.’
한나래와 우정태가 안시현 앞에서 서로 경쟁하듯이 절정의 연기력을 뽐낸 것이다.
한나래가 극찬을 받으면 뒤이어 우정태가 극찬을 받고, 다시 한나래가 극찬을 받는 패턴이 반복됐다. 서로 열연을 이어 나가며 주요 신들의 촬영을 순조롭게 끝마치는 데에 도움을 줬다.
연기를 잘할 때마다 안시현을 쳐다보거나 다가오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우정태와 한나래가 평소 인터뷰를 할 때마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는 건 안시현 또한 잘 알고 있는 부분이다.
때문에 두 사람이 경쟁하듯이 연기력을 뽐내는 것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굳이 문제점을 꼽자면…….
‘아, 곤란한데. 둘이서 그렇게 경쟁하듯이 연기력 뽐내면 거기에 나도 끼고 싶어지잖아.’
한나래와 우정태의 연기력 경쟁이 안시현을 제대로 자극했다는 것이다.
안시현은 고민에 빠졌다.
두 사람의 경쟁에 자극을 받긴 했지만, 괜히 자신마저 경쟁에 끼어들면 분위기가 너무 과열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만이 있기에는 몸이 근질거렸다.
배우로서의 본능이, 더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결국…….
‘나도 한번 슬쩍 껴 볼까?’
안시현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한창 불붙은 연기력 경쟁에 기름을 끼얹기로, 이왕 시작한 거 화끈하게 판을 키 우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