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6화>
166화. 이거 혹시
최창국과 김희숙 작가는 대한영화제 이후 우정태와 한나래의 연기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훤히 꿰뚫어 보았다.
인정받기 위한 선의의 경쟁.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평소 두 사람의 태도와 인터뷰 내용만 보더라도 손쉽게 유추가 가능했다.
“그냥 놔둬도 괜찮겠죠?”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현 씨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연기를 잘하면 저희야 좋은 거 아니겠어요?”
“하긴, 저희야 좋죠.”
우정태와 한나래가 촬영장에서 싸우거나 서로를 불편해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기 위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는 거다.
제작진 입장에서 이런 경쟁은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 했지,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촬영이 지속되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우정태와 한나래의 연기력 경쟁에 난데없이 안시현이 끼어든 것이다.
최창국도, 김희숙 작가도,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던 한나래와 우정태도 잊고 있었다.
안시현이라는 배우의 연기 열정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걸 말이다.
‘이 그림은 예상 못했는데…… 나쁠 건 없겠지.’
안시현마저 연기력 경쟁에 참전하는 건 예상 외였지만, 최창국과 김희숙 작가는 이 또한 나쁠 건 없다고 판단을 내렸다.
주연 배우들이 서로 더 좋은 연기를 보여 주기 위해 경쟁하면 할수록,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더 좋은 그림을 보다 수월하게 뽑아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세 사람이 나란히 연기력 경쟁을 펼치기 시작한 이후 촬영 속도가 더욱 탄력이 붙게 됐다.
“오우…… 세 배우 다 연기력 살벌한데?”
“안시현 배우의 연기력도 엄청난데, 한나래 배우와 우정태 배우도 장난 아니네. 세 사람 다 캐릭터가 살아 있는 게 확실히 느껴져.”
“다른 건 모르겠고, 우리 드라마 주연 배우들 연기 못한다고 욕먹을 일은 없겠다.”
“어휴. 저번 작품에서는 아이돌 출신 배우 발연기 때문에 속으로 육두문자 수백 번도 넘게 하면서 촬영했잖아요. 그거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죠.”
“아, 그 친구? 연기는 더럽게 못하면서 몸값 높게 부르고 목 뻣뻣하다고 소문 안 좋던데.”
“그런 배우 어디 한둘이에요? 몇 년 말아먹고 나면 불러 주는 데 없어서 예능 나가 가지고 추억팔이나 하겠죠. 그에 반해 우리 주연 배우님들은…….”
“천사지, 천사.”
스태프들은 난데없는 연기력 경쟁에 제대로 눈 호강을 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세 배우를 칭찬했다.
안시현의 연기력이 엄청난 거야 두말하면 입 아프다. 황금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의 연기력을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중요한 건 안시현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한나래와 우정태였다.
대다수의 스태프들은 주요 신의 촬영이 시작되면 안시현이 한나래와 우정태에게 어느 정도 맞춰서 연기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작정하고 연기한다면 상대적으로 한나래와 우정태의 존재감이 묻힐 거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한나래와 우정태가 존재감이 전혀 밀리지 않자 덩달아 스태프들 또한 신이 났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캐릭터를 최대한 잘 표현하기 위해 경쟁하는 주연 배우들 덕분에 촬영 속도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으니까.
그 결과.
7월 초에서 중순으로 예정됐던 『VVIP』의 마지막 촬영이 6월 30일로 앞당겨졌다.
6월 30일.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출연 배우들이 촬영장에 한데 모였다. 촬영 분량이 일찌감치 마무리된 배우들의 경우 간만의 촬영장 방문이었다.
모든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백성아와 곽훈, 두 사람만이 나오는 마지막 촬영이 시작됐다.
* * *
백성훈의 구속 이후.
곽훈과 백성아가 만났다. 곽훈은 후련한 표정으로 백성아에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백성훈은 실형은 확정적입니다. 표면적 이미지와 달리 자식에게 매정하지 못한 백왕국 회장은 뒤에서 그를 도와주려 하겠지만, 죄질의 무게감과 수를 감안해 봤을 때 모조리 틀어막는 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형량을 줄이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죠.”
“얼마나 줄일 수 있을까요?”
“V전자 법무팀을 동원하지는 못할 테니 로펌에 맡기지 않겠습니까? 돈의 무게에 따라 형량이 달라질 테니, 어떻게든지 하루라도 더 깎을 겁니다.”
백성훈에게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말한 것과 달리, 백왕국 회장은 은밀하게 그를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무리 온갖 사고를 쳤어도 아들이고, 냉정하게 대하려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아니겠는가.
곽훈은 그 점을 백성아에게 지적한 것이었다.
만약 백성아가 백성훈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 한다면 말릴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죠. 우리의 거래는 여기까지.”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백성아는 곽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흔쾌히 백성훈에 대한 공격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생각보다 쉽게 수긍하시는군요.”
“안 되는 거에 매달려 봐야 시간 낭비니까요. 건드려 봐야 아버지가 좋아하지도 않으실 거고, 그 시간에 오빠가 다시 돌아왔을 때 서 있을 자리가 없게 만드는 데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옳은 판단이네요. 더 이상 제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떠날 거예요?”
곽훈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백성아와의 거래가 끝나자마자 한국을 뜰 생각이었다. 이민을 위한 절차 준비한 정착에 필요한 금액 등은 백성훈을 매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백성아가 모두 처리해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백성훈의 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곽훈은 약속을 지켰고, 이제는 백성아가 그에게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방금 전에 본인 입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 거래는 백성훈 건으로 끝난 거예요.”
“곽훈 씨만 원한다면 새로운 거래를 할 수 있어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필요한 만큼의 돈을 주실 테니 여기서 만족하겠습니다. 더 원하면 저도 모르게 선을 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백성아는 곽훈과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곽훈은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드러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비서를 통해서 전달할게요. 그동안 V호텔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건 어때요?”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제가 백성아 씨를 도운 건 제 이익 때문이기도 하지만, 백성훈이란 인간 말종이 V그룹의 수장이 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합니다. 상식적인 사람인 백성아 씨가, 앞으로도 상식적이길 바라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곽훈이 몸을 돌렸다.
백성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자신이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곽훈을, 앞으로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거라는 걸 말이다.
절차가 마무리되는 대로 그는 이민을 위해 비행기에 오를 테고, 아마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을 거다.
백성아가 곽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가, 이내 손을 거둬들었다.
떠나는 곽훈을 붙잡는 대신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OK!”
그와 동시에 『VVIP』의 마지막 OK 사인이 났다.
* * *
마지막 촬영 후, 근처 고깃집을 통째로 빌려서 회식이 진행됐다.
“오늘은 저희가 쏩니다! 다들 마음껏 즐겨 주세요!”
“오오오!”
“우리 주연 배우들 멋지다!”
“배 터지게 먹고 마시겠습니다!”
안시현과 한나래와 우정태.
주연 배우 세 사람이 회식 비용 전액을 지불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부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회식 분위기를 주도한 건 우정태였다.
학창 시절부터 분위기 메이커였던 그는 출연하는 모든 작품에서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했고,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친화력이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고 했다.
이는 우정태의 필모그래피에도 영향을 미쳤다.
제작진 입장에서는 연기력이 동등하다고 가정했을 때, 모난 성격의 배우보다는 둥글둥글하고 친화력 좋은 배우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가 작품을 거듭할수록 점차 발전되는 연기력이 눈에 보였기에, 현장에서 선호하는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는 김희숙 작가 또한 마찬가지였다.
회식이 시작되고 2시간 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김희숙 작가가 술잔을 들고 우정태에게 다가왔다.
“좋은 연기 보여 줘서 고마워요, 정태 씨. 앞으로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해 주실 거죠?”
“시청률 50%, 혹은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의 주연 배우가 될 때까지 달리겠습니다.”
“목표를 이루면요?”
“더 높은 목표를 잡아야죠. 제 소원은 죽는 순간까지 연기하는 겁니다. 지금처럼 좋은 사람들하고 함께요.”
우정태 다음은 한나래였다.
“나래 씨, 한 10년 후에 저랑 다시 한번 같이 작업해요. 그때는 악역 한번 맡아 줘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녀가 되어 보일게요.”
“제가 나래 씨만을 위한 캐릭터를 만들게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서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금방 지나가 있을 거예요. 『너와 나의 시간』 이후 저희가 다시 뭉친 이 순간이, 정신을 차려 보니 기적같이 다가온 것처럼요.”
김희숙 작가는 자신의 캐스팅 제안을 흔쾌히 받아 준 세 주연 배우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들 덕분에 『VVIP』라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취한 상태에서 주연 배우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가득 담아 진심을 드러냈다.
우정태와 한나래에 이어, 마지막은 안시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백성훈은 시현 씨가 연기해 줬기에 완성될 수 있었던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시현 씨가 연기할 거라서 더욱 난이도를 높였고, 제가 생각하는 걸 모두 그려 나갈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시현 씨가 캐스팅 거절했으면 막막했을 거예요.”
“작가님의 부탁이라면 언제든 들어 드려야죠.”
“아, 그럼 지금 당장 부탁 하나만 더 해도 될까요?”
김희숙 작가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은 채 안시현을 슬쩍 떠보았다.
이에 안시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이건 진심이건 상관없었다. 무리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안시현은 정말로 김희숙 작가의 부탁을 언제든지 들어줄 용의가 있었으니까.
“작가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요”
“저, 당분간 푹 쉴 거예요. 최소 2년, 길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겠죠. 영감이 씨가 말랐어요. 다양한 경험들을 하면서 다시 재충전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작가님이라면,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다시 좋은 작품으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해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마워요. 제 부탁은 별건 아니고…… 제가 다시 대본을 쓰기 시작했을 때, 탈고가 끝나면 가장 먼저 진모 씨랑 시현 씨가 확인해 줬으면 해요.”
안시현의 두 눈이 커졌다.
김희숙 작가가 어떤 의도로 대본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대번에 파악한 것이다.
지금껏 김희숙 작가는 한 번 주연을 맡겼던 배우와 두 번 작업하는 경우가 없었다. 다양한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며 매번 신드롬을 일으켰고, 해당 배우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일이 반복되곤 했었다.
유일한 예외가 바로 안시현이었다.
오로지 안시현만이 김희숙 작가의 드라마에서 두 번이나 주연을 맡았다.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 두 사람의 인연은 『VVIP』가 마지막일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작품의 소재는 정해져 있어요. 오래전부터 구상해 왔던 소재예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집필을 시작하면 진모 씨와 시현 씨가 연기하는 걸 가정하고서 캐릭터를 구축하려고 해요.”
“주연인가요, 조연인가요?”
“주연 같은 조연이에요. 비중은 조연이지만, 존재감은 주연 못지않을 거라 확신해요.”
아무래도 몇 년 후, 한 번 더 이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이거 혹시, 그 작품과 그 배역인가?’
안시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작품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