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7화>
167화. 어떻게 아셨어요?
안시현이 2002년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MBS를 퇴사하고 일본 유학이 예정되어 있던 최창국이, 김희숙 작가로부터 안시현과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안시현에게 전달해 줬던 당시를 말이다.
당시 김희숙 작가는 안시현과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7년이 흘러 2009년이 된 지금.
안시현은 김희숙 작가가 『내 아내는 처녀귀신』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 거라고 확신했다.
힌트는 주연 같은 조연이라는 말이었다.
김희숙 작가의 드라마에서 조연들의 캐릭터성이 뚜렷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조연이 주연과 존재감이 맞먹었던 작품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아내는 처녀귀신』뿐이었다.
그 배역이라면 김희숙 작가가 조연임에도 안시현을 원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혹시 그 드라마 타이틀이 『내 아내는 처녀귀신』 아닌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최 본부장님이 예전에 말해 주신 적이 있거든요. 작가님이 저와 작품을 하고 싶어 하는데, 특수 효과 문제로 집필을 미뤄 뒀다고요. 『VVIP 』는 특수 효과가 필요한 드라마는 아니라서 생각해 보니까, 그 당시 들었던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떠오르더라고요.”
김희숙 작가가 최창국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최창국이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유학 가기 전에 말한 적 있는데, 설마 그걸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언젠가 다시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해서 기억하고 있었죠. 시나리오를 받으면 캐스팅 확정인가요?”
“시현 씨라면 바로 확정이죠.”
“아…… 그건 좀 곤란한데요.”
안시현의 말을 들은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캐스팅을 확정하겠다는데 곤란하다고 말하는 건, 함께 작품을 하기 싫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으니까.
“시현 씨, 저랑 작품 하기 싫은 거예요?”
“그럴 리가요. 김 작가님 작품이라면 언제 제안을 주시더라도 무조건 OK죠. 카메오 출연조차도 환영합니다.”
“그럼 왜…… 아, 혹시?”
“생각하시는 그게 맞을 거예요. 『Timeless』처럼 오디션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랬다.
안시현은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 출연하기 싫은 게 아니라, 오디션을 통해 김희숙 작가가 점찍어 놓은 배역을 따낼 생각이었다.
이에 그럴듯한 이유를 둘러댔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면 저보다 더 어울리는 배우가 있을지도 모르고, 조연인데도 주연 수준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하는 배역이라니까 승부욕이 생겨서요. 경쟁에서 이기고 배역을 따내야 만족할 것 같아요.”
그러나 안시현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회귀 전에는 최종에서 아쉽게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를 거야.’
회귀 전.
안시현은 치열할 경쟁을 뚫고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최종 오디션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원하는 배역을 놓치고 말았다.
한 끗 차이로 배역을 놓친 안시현은 이후 줄곧 아쉬움을 느꼈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이 역대급 대박 드라마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꼭 맞는 캐릭터를 연기하지 못했다는 게 못내 속상했던 탓이다.
회귀 후.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김희숙 작가의 입에서 『내 아내는 처녀귀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제작이 바로 되지는 않을 거다.
‘집필 문제도 있고, 특수 효과 때문이라도 제작에 들어가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Timeless』 이후 재충전을 할 만한 여유는 충분하겠지.’
회귀 전 『내 아내는 처녀귀신』은 2014년 겨울에 방영을 시작했으니, 이번에도 빨라야 2013년에야 캐스팅 라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특수 효과 기술과 관련된 현실적인 문제와도 연관이 깊다.
『내 아내는 처녀귀신』의 매력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수준급 특수 효과 기술이 필요하다.
회귀 전 김희숙 작가는 특수 효과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고, 결국 할리우드에서 특수 효과로 능력을 인정받은 전문가의 팀을 통째로 데려오는 결단을 내렸다.
덕분에 제작비가 대폭 늘어났다.
역대급 제작비와 판타지 요소, 김희숙 작가에게 전권을 줘야 한다는 부담감 등으로 인해 방송 3사에서는 모두 『내 아내는 처녀귀신』을 거절한다.
이는 김희숙 작가가 이후 작품이 한 케이블 채널에서 지속적으로 방영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제작까지는 한창 시간이 남은 상황.
안시현은 『Timeless』 이후 어떤 작품을 할지 미리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오디션 합격할 자신 있냐고 물어보는 건…… 의미가 없겠죠? 제가 아는 시현 씨라면 가장 이상적으로 캐릭터 구축을 해 올 테니까요.”
“오디션 허락해 주는 건가요?”
“제가 허락하고 말고가 뭐 있겠어요. 시현 씨가 오디션을 원하면 참가하는 거죠. 단, 평가는 공정하게 할 거예요. 가산점은 단 1점도 없을 거고, 오히려 함께 작품을 했기에 기준이 더욱 깐깐할 수도 있어요.”
“제가 원하는 바예요.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허들이 높아야, 제가 합격하는 걸 대중들이 납득할 테니까요. 언제쯤으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2013년…… 안에는 해 볼게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2013년.
4년 후의 미래를 기약하며 안시현과 김희숙 작가가 기분 좋게 악수를 나눴다.
* * *
7월 초.
안시현이 느긋하게 휴가를 즐기기 시작했다.
‘『VVIP』 방영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고, 방영하더라도 최소한의 스케줄을 제외하면 한동안 여유가 있을 거야. 물론 마냥 편하게 쉬기는 힘들 테지만.’
9월 첫째 주 수요일에 『VVIP』가 방송을 시작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홍보를 비롯한 외부 스케줄 일부를 제외하면 여유가 있을 거고, 안시현은 미국 출국 전까지 가족들과 별장에서 최대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일단 딸 안라온의 육아를 안시현이 한동안 전적으로 책임지게 됐다. 『Timeless』의 촬영이 시작하면 아예 한국에 없을 테니, 외부 스케줄을 나갈 때를 제외하면 최대한 많이 추억을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혜영 또한 이에 동의했고, 임신을 했을 때처럼 양평과 서울을 오가며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라온이와 오전 내내 놀아 주고 점심을 먹이고 낮잠을 재운 뒤, 안시현이 정원으로 나왔다.
원목 테이블에 앉아 얼음물을 마시며 잠시간의 여유를 즐기던 그때였다.
어머니로부터 해외전화가 걸려 왔다.
“네, 엄마. 도착했어요?”
-숙소에 짐 풀고 저녁 먹으러 왔다. 어휴. 숙소가 너무 좋더라. 돈 많이 쓴 거 아냐?
“제일 좋은 패키지로 예약했어요. 이럴 때 쓰려고 열심히 돈 벌었으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즐기고 오세요. 카드에 돈 많이 넣어 놨으니까 눈치 보지 말고 쓰시고요. 엄마 아들, 그 정도 부담할 능력 충분해요.”
-어휴. 그래, 그래. 돈 안 쓰면 잔소리 할 거 뻔하니까 눈치 안 보고 쓰마. 고맙다, 아들. 덕분에 하와이를 다 와 보네. 여기 진짜 좋은 거 같아.
“마음에 드신다니까 다행이네요. 푹 쉬다가 오세요.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씀하시고요. 또 보내드릴게요.”
-그럼 다음번엔 유럽을 한번 가 볼까?
“유럽 좋죠. 제가 한번 잘 알아볼게요.
또한 안시현은 자신이 연기에 매진하는 동안 육아에 많은 도움을 준 부모님께 보답하기 위해서 하와이 여행을 보내 드렸다.
부모님의 육아 도움이 없었다면 정혜영과 자신 중 한 명은 일을 마음껏 하지 못했을 테니, 보답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간 게 전부임에도 부모님이 만족하시는 거 같아 다행이었다.
‘원하시면 또 보내 드려야지. 회귀 전에도 이랬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회귀 전.
부모님은 복무 중이던 안시현의 면회를 가다가 빗길에 사고가 나서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당시 사건은 안시현에게 트라우마가 됐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부모님을 허무하게 떠나보내지 않았을 거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시간 또한 길었다.
그래서일까?
회귀 후 군 입대 시기를 앞당겼으며, 사건 시기 전후로 부모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다행히 부모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후.
안시현은 이전보다 더 부모님을 극진하게 챙겼다. 회귀 전의 아쉬움을 만회할 기회라 생각한 것이다.
너무 잘해 줘서 부모님이 부담스럽다고 할 정도로 효도를 했다. 육아에 큰 도움을 주기까지 하셨기에 안시현이 느끼는 고마움은 배가됐다.
하와이 여행 다음에는 유럽 여행을 보내 주는 걸 고민하며, 안시현이 한 사람을 떠올렸다.
“유럽 여행은 역시 그분에게 물어봐야지.”
안시현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1분 정도 신호음이 간 뒤.
-시현?
휴대폰에서 기욤 뒤자르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잘 지내셨죠, 감독님? 지금 미국에 계세요?”
-네. 촬영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시현은 『VVIP』의 촬영 끝났어요?
“며칠 전에 마무리됐어요. 가족들과 여름을 별장에서 보내려고 짐 싸서 오늘 막 온 참이에요.”
-별장 좋죠. 저도 작품 안 할 때는 가족들하고 최대한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거든요. 저희가 워낙 작품 할 때는 가정에 충실하기 힘든 직업이잖아요.
“작품 하면서도 이것저것 신경 쓰려고 노력은 하는데 마음처럼 잘 안 되더라고요.”
안시현은 유렵 여행 코스를 추천받는다는 핑계로 기욤 뒤자르댕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근황을 살폈다.
“올해 안에는 촬영이 불가능하겠죠?”
-으음.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촬영 준비하는 데에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요. 특수 효과 팀이 다른 작품을 맡고 있어서,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도 하고요.
“다행이네요. 올해는 푹 쉴 수 있겠어요. 캐릭터 구축을 할 시간도 벌 수 있겠고요.”
안시현은 혹여나 올해 안에 촬영이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내심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올해 안에 촬영이 들어간다면, 휴식과 캐릭터 구축을 위한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다행히 기욤 뒤자르댕의 입에서 올해 안에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비교적 여유롭게 준비를 할 수가 있게 됐다.
-빠르면 1월, 혹은 2월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늦어지면 3월까지 갈 수도 있겠지만…… 되도록 빨리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야겠죠. 오디션 이후로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으니까요.
“꽤 오래 지나기는 했죠.”
『Timeless』의 오디션은 지난 해 연말에 모두 마무리가 됐지만, 촬영과 관련된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기욤 뒤자르댕이 빨라야 2009년 연말에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해 놨기에 큰 문제는 없지만…….
대기 기간이 길어져서 좋을 건 없다.
배우들의 입장에서는 크랭크인이 지연되면 될수록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아지며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으니까.
기욤 뒤자르댕과 간만에 수다를 떨던 중.
“아빠아~ 아빠아~”
안시현이 집 안에서 라온이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한창 통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낮잠에서 깰 시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딸아이가 낮잠에서 깼네요. 조만간 또 연락드릴게요.”
-시현 연락은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시차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연락해 줘요. 캐릭터 구축하면서 물어볼 거 많을 테니까요.
“하하하. 네. 목소리 까먹지 않게 종종 연락할게요.”
통화를 끝마친 안시현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잠에서 깬 라온이를 들어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우리 라온이 낮잠 잘 잤어요? 아빠랑 TV 볼까? 아니면 동화책 읽어 줄까?”
“TV 볼래!”
“그래, 그래. TV 보자.”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배우로서 감독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던 안시현은, 어느새 전업주부이자 딸바보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