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68화>
168화. 드릴 말씀이
배우로서 안시현의 이미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철저한 자기 관리, 김진모의 라이벌, 첫사랑과의 결혼, 기부 천사, 연쇄사인마 등.
부정적인 이미지보단 긍정적인 이미지가 많았고, 스타덤에 오른 이후 안시현이 옳은 길을 걸어왔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들이었다.
라온이의 출산 이후.
안시현의 이미지가 하나 추가됐다.
바로 딸바보였다.
이전까지의 안시현은 몸 관리를 위해서 웬만하면 술을 마시지 않는 걸로 알려졌지만, 몸 관리를 하지 않을 때면 기분 전환을 위해 간혹 지인들과 맥주 한두 잔은 마시곤 했다.
하나 라온이의 출산 이후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스케줄이 끝나면 집에 들어가서 육아를 분담해야 한다는 이유로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회식도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되도록 참여하지 않았다.
가끔 자발적으로 술자리에 끼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인들에게 라온이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자랑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결혼한 이후 일절 한눈을 팔지 않고 가정에 충실했던 건 맞지만, 라온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는 그 정도가 심해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오죽하면 김진모는 인터뷰를 통해 안시현의 변환 모습을 보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간만에 정수 선배님 만나러 대학로 방문해서 겸사겸사 시현이에게 연락한 적이 있어요. 당연히 안 온다고 할 줄 알았는데, 냉큼 오겠다고 하지 뭐예요. 얘가 연기랑 육아 병행한다고 스트레스가 심해서 한잔하려는 건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술 마시러 온 게 아니었다고요?”
“네. 술자리에 노트북을 챙겨 왔더라고요. 그리고는 동영상이랑 사진을 질리도록 보여 주지 뭐예요. 알고 보니 그날이 라온이가 걸음마를 뗀 날이었어요. 평균적으로 걸음마 떼는 기간보다 열흘 정도 더 앞섰다고 우리 아이는 천재라고 새벽까지 난리더라고요. 아, 참고로 술은 한 모금 입에 안 댔고요.”
“대한민국의 흔한 팔불출 아빠네요.”
“정도가 좀 심해서 문제죠. 물론 라온이가 귀엽긴 해요. 듣기로는 제수씨의 어린 시절과 판박이라 하더라고요.”
김진모의 인터뷰 이후.
팬들은 안시현에게 국민 팔불출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 줬다. 배우들 사이에서 팔불출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안시현에게 딱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이에 안시현은 새 별명을 전해 듣고서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 타이틀이 붙은 건 좋은데…… 국민 배우가 아니라 국민 팔불출이라니.’
인지도가 워낙 높기에 붙은 별명이라고 봐야 하지만, 국민 배우가 아니라 국민 팔불출이라서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었다.
안시현의 필모그래피는 대중들이 라이벌로 여기는 김진보다도 앞서 있는 게 사실이다. 당사자인 김진모 또한 안시현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말할 정도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안시현을 국민 배우라고 부르는 언론과 대중들은 극소수였다.
‘뭐…… 진모도 30대 중반이 넘어서야 얻은 별명이니까. 급할 건 없겠지.’
아직 국민 배우라 불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안시현은 국민 배우까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몇 발자국만 더.
이대로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가다 보면 결국 그토록 바라던 국민배우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으리라.
막상 국민 배우라는 별명을 얻고 나면 목표를 잃을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회귀 전부터 줄곧 꿈꿨던 목표이니만큼 일단 이루고 싶었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접근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휴식에 집중하자. 『Timeless』를 촬영하는 동안은 지금처럼 여유가 없을 테니까.’
안시현은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에 푹 빠진 라온이를 바라보았다.
말문이 트인 이후.
라온이의 취미는 크게 세 가지가 됐다.
유아용 애니메이션 보기, 인형놀이 하기, 동화책 읽어 주라고 하기였다.
세 가지 모두 상대적으로 엄격한 정혜영보다는 웬만한 건 다 받아 주는 안시현과 함께하는 걸 좋아했다.
작품을 하고 있을 때는 짬짬이 시간이 나는 게 아니면 해 줄 수 없는 일들이지만, 간만에 휴식을 만끽하게 된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Timeless』의 촬영이 시작되면 한동안 갖지 못할 시간들이기에, 안시현은 1분 1초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최대한 추억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 * *
휴식을 즐기는 사이.
어느새 7월이 훌쩍 지나가고 8월 말이 다가왔다.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안시현은 모처럼 김희숙 작가의 연락을 받고서 STS 사옥을 방문했다.
제작발표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모이기로 한 회의실에 들어가자, 미리 도착해 있던 배우들이 김희숙 작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일제히 안시현을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오. 국민 팔불출 오셨습니까. 요즘 얼굴 보기가 방송국 사장님 뵙는 것보다 어려운 거 같습니다요.”
“선배, 요즘 얼굴 보니 너무 힘든 거 아니에요? 오빠가 얼굴 좀 보자고 난리더라고요.”
“전화는 잘 받으면서 약속은 안 잡으니 원…….”
우정태와 한나래, 그리고 김희숙 작가가 연속으로 서운함을 토로하자, 안시현이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별장에서 쉬다 보니까 장 보러 나갈 때 빼고는 외출은 안 하게 되더라고요. 다들 서운하셨다면 죄송해요. 대신 오늘 회식은 제가 쏩니다.”
“크으. 역시 우리 시현이가 화끈하다니까.”
“회식 기대할게요, 선배.”
“거하게 쏠 테니까 되도록 다들 빠지지 마세요. 아, 근데 본부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최창국을 찾는 안시현의 물음에 김희숙 작가가 쓴웃음을 흘리며 답을 해 줬다.
“최종 예고편 손보고 계실 거예요. 4시까지 넘기기로 했다는데, 조금이라도 더 퀄리티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STS 드라마국 편집실 빌려서 밤새고 계세요.”
“본부장님이 좀 완벽주의자이시긴 하죠. 그래도 그만큼 결과물은 좋을 테니까요.”
“현장 공백이 길어서 걱정이신 것 같더라고요.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어 보이던데…… 타인의 시선과 본인의 시선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요.”
“걱정될 만도 하죠.”
안시현은 최창국의 걱정을 십분 이해했다.
최창국은 김희숙 작가를 돕기 위해, 그리고 JM액터스 소속 배우 세 명이 나란히 주연을 맡았기에 『VVIP』의 담당 PD로서 현장 복귀를 결정하게 됐다.
문제는 그가 현장을 떠난 지낸 지 제법 오래됐다는 데에 있었다.
언론에서는 『VVIP』가 김희숙 작가의 드라마 중 처음으로 흥행에 실패할 수도 있다며, 그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최창국의 현장 경험 공백이었다.
과거 흥행작을 진두지휘했고 JM액터스의 자체 제작 작품들 연출에 큰 공헌을 한 건 맞지만, 드라마의 경우 PD의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최창국 또한 이런 시선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한창 현장에 있을 때보다 몇 배로 연출에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부족함이 『VVIP』의 흥행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로맨스로 이름을 떨친 김희숙 작가가 처음으로 로맨스를 배제한 작품이라 우려가 많은 상황이다 보니, 최창국의 입장에서는 언론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1차랑 2차 예고편 보니까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던데…….’
하지만 수많은 우려와 달리, 그가 이 악물고 준비한 1차 예고편과 2차 예고편은 제법 큰 인기를 끌었다.
김희숙 작가 특유의 톡톡 튀는 캐릭터성이 예고편임에도 제대로 느껴졌고, 안시현의 인지도를 감안해 악역인 백성훈을 전면에 내세운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백성아와 곽훈을 조명하지 않은 것 또한 아니었다. 두 캐릭터 모두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 캐릭터성을 드러낼 만한 대사를 찾아내서 예고편에 실었지만, 상대적으로 백성훈의 존재감이 더 컸을 뿐이다.
막상 방송이 시작됐을 때, 백성훈이 주연 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낮다는 이유로 실망하는 시청자들이 생길 수도 있다. 백성아와 곽훈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작진과 출연자 중 그 누구도 시청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걱정하지 않았다.
기대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않을 순 있지만, 그 이유가 안시현과 비교해도 존재감이 꿇리지 않았던 한나래와 우정태의 연기력 때문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최창국은 최종 예고편의 연출을 가다듬기 위해 며칠 밤을 꼬박 지새웠다.
제작 발표회 시간을 기다리던 배우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최창국이 이 악물고 공들인 최종 예고편의 퀄리티는 어느 정도일까?
제작 발표회 20분 전.
최창국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잔뜩 충혈된 눈으로 지친 기색을 드러내며, 그는 회의실에 놓인 노트북으로 다가가 USB를 연결했다.
노트북이 켜지는 동안.
최창국이 김희숙 작가와 배우들을 바라보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최종 예고편 넘기고 왔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방송될 건데, 그 전에 저희끼리 먼저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서 챙겨 왔습니다.”
“기대해도 될까요?”
“네. 기대해도 됩니다.”
『VVIP』를 촬영하는 동안, 최창국은 자신감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현장 경험의 공백으로 인해서 웬만하면 김희숙 작가와 배우들의 의견에 맞춰 주곤 했다.
‘본 방송의 퀄리티가 어느 정도일지 얼추 예상하는 게 가능하겠지.’
사전 제작을 채택했기에 『VVIP』의 편집은 전체 18화 중 12화까지 마무리 된 상황이다.
주연 배우인 안시현과 한나래와 우정태마저도 최종 편집본을 확인하지 못했다. 보안을 위해 제작진 중에서도 김희숙 작가와 최창국만이 최종 편집본을 확인했다.
때문에 안시현은 최종 예고편에 호기심을 가졌다.
최종 예고편을 통해 9월 첫째 주부터 방송을 시작할 『VVIP』의 퀄리티를 유추할 수 있을 테니까.
잠시 후.
회의실 스크린을 통해 『VVIP』의 최종 예고편이 흘러나왔다.
최종 예고편을 확인한 뒤, 안시현은 확신했다.
‘동시간대 시청률 1위는 거뜬하게 노려 볼 만하겠는 걸?’
김희숙 작가의 스타일 변신이 성공적일 것이라고 말이다.
* * *
오후 4시 30분.
STS 제1홀에서 『VVIP』의 제작 발표회가 시작됐다.
스태프 중에서는 김희숙 작가와 담당 PD인 최창국이, 배우들의 경우 주연 3인방과 조연 세 명이 참가했다.
취재를 온 기자는 100명이 넘었다.
흥행보증수표인 김희숙 작가와 안시현의 만남으로 인해 이슈가 된 덕분이었다.
“김희숙 작가님에게 묻겠습니다.”
첫 질문을 받은 건 김희숙 작가였다.
“김희숙 작가님은 그 동안 로맨스 요소의 적절한 활용으로 인해서 모든 작품의 흥행에 성공하셨는데, 『VVIP』의 경우 캐스팅 때부터 로맨스는 완전히 배제한다고 해서 화제가 됐습니다. 호언장담하신 대로 『VVIP』에는 로맨스 요소가 전혀 없나요? 없다면 시청자들이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느껴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첫 질문을 던진 기자는 김희숙 작가에게는 다소 예민할 수도 있는 부분을 제대로 찔렀다.
톡톡 튀는 캐릭터성과 기억에 남는 명대사, 그리고 로맨스 요소의 적절한 활용이 김희숙 작가의 강점이다.
하지만 김희숙 작가는 『VVIP』에서 자신의 강점 중 하나인 로맨스를 완전히 배제했다. 자신의 시나리오에 로맨스가 없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기자는 과연 그녀가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완성되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이에 김희숙 작가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최창국과 더불어 『VVIP』의 최종 편집본을 확인한 제작진이다.
일부 제작진과 배우들이 흥행에 대해 걱정할 때도 그녀만큼은 여유로웠다. 최창국이 연출에 대해 고민할 때도 그녀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정확히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 저녁부터 전파를 타게 될 최종 예고편과 9월 첫째 주 수요일 저녁에 첫 방송을 보고 직접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왜 최창국 본부장님과 다시 손을 잡았는지, 이 자리에 있는 배우분들을 캐스팅한 건지 알게 되실 겁니다.”
촬영은 잡음 한 번 없을 정도로 완벽했고, 최창국의 편집은 자신의 기획 의도를 완벽하게 살려 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