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71화>
171화. 종영 전까지
연기대상의 주요 부문이라고 하면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신인상, 인기상, 올해의 작품상까지 6개 정도라고 보는 게 맞다.
한 작품이 6개 부문을 싹쓸이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상과 인기상과 올해의 작품상까지 3관왕을 하는 경우는 더러 존재하지만, 그 이상은 매우 힘들다. 아무리 시청률이 잘 나오는 드라마라도 6개 부문에서 모두 존재감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국민 사극으로 불렸던 MBS의 『어의』만 하더라도, 『너와 나의 시간』의 예상치 못한 돌풍으로 인해 몇몇 부문을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KNC와 MBS의 경우 6개 부문의 한 드라마가 독차지한 건 90년대가 마지막이다. 이후로는 최고 4관왕을 기록한 게 한계였다.
STS의 경우 2004년에 6관왕이 한 번 나왔다.
최고 시청률 58.4%, 평균 시청률 46.9%로 2004년을 휩쓸었던 『베니스의 연인』, 김희숙 작가의 작품 중 가장 크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바로 그 드라마가 주요 수상 부문을 모두 싹쓸이했다.
그만큼 당시 『베니스의 연인』의 화제성은 엄청났다.
『VVIP』의 경우 『베니스의 연인』 수준의 시청률과 화제성을 기록하기는 힘들 거다.
아니, 그 어떤 드라마가 오더라도 『베니스의 연인』의 아성과 견주는 건 힘들 가능성이 높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드라마와 예능 모두 평균 시청률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대박의 기준이 50%에서 40%로, 이제는 40%에서 30%까지 줄었다.
아마 기준점은 갈수록 낮아질 거다.
때문에 그 누구도 『VVIP』에 시청률 50% 같은 허무맹랑한 척도를 들이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30%만 넘더라도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고 봐야 한다.
만약 『VVIP』가 시청률 30%를 넘긴다면 연말에 있을 STS 연예대상에서 다수의 수상 부문을 미리 낙점할 가능성이 높다.
2009년 한 해.
STS의 드라마 농사는 썩 인상적이지 못했으니까.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한 드라마가 있지만 30%의 고지를 넘지 못했고, 대다수의 드라마는 평균 수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저 그런 성과를 냈다.
심지어 평균을 상회하는 제작비를 투자했음에도 애국가 수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처참하게 망한 드라마가 두 개나 있었다.
때문에 STS의 입장에서도 『VVIP』의 성공이 간절했다. 2009년 내내 대박 드라마를 배출하지 못한 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VVIP』가 최고 시청률 30%를 돌파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와 관련된 지원 또한 아끼지 않았다.
촬영 기간 내내 드라마국 차원에서 여러 편의를 봐주고 회식비를 넉넉하게 지원해 줬으며, 최고 시청률 30%를 돌파할 경우 스태프 전원 포함 괌으로의 포상 휴가까지 약속한 상태다.
또한 방영을 앞두고는 여타 드라마의 2배 가까이 되는 예고편을 내보내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어쩌면 JM액터스보다도 STS 드라마국이 『VVIP』의 최고 시청률 30% 돌파를 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상황인 것이다.
다행이 첫 회에서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파일럿』과 경쟁할 만한 판이 만들어졌다.
만약 최고 시청률 30%를 돌파한다면, 자연스럽게 연기대상에서의 수상 또한 따라올 것이라는 게 김진석 대표가 내린 판단이었다.
“주요 부문의 싹쓸이라…… STS 드라마가 올해 워낙 흉작이라 잘하면 가능할 것도 같네요. 사실 싹쓸이가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홍보용으로 쓰긴 딱 좋겠죠.”
“허허허. 박 실장, 이제 눈치가 제법 늘었어. 내가 무슨 의도로 말을 한 건지 정확하게 알고 있군.”
“따라다닌 게 몇 년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요.”
사실 몇 개 부문을 수상할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설사 연기대상에서 수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시청률 30%가 넘는 것만으로도 『VVIP』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을 테니까.
다만 수상 부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JM액터스가 홍보 수단으로 써먹기 좋아진다.
특히나 이제 갓 데뷔한 배우라면 말이다.
곽상필이 직접 뽑았고, 오디션을 통해 『VVIP』의 출연을 확정 지은 신인 배우가 있다.
장차 주연급으로 발돋움할 재능을 지닌 배우이기에 JM액터스 내부에서도 기대가 크다. 포스트 김진모가 될 거라는 게 내부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VVIP』를 이용해서 최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또한 『VVIP』는 이제 갓 주연으로서 발돋움을 시작한 우정태의 가치를 끌어올리기에도 유용하리라.
홍보를 위한 수단.
박정상은 그 부분을 정확히 짚은 것이다.
“박 실장.”
“네, 대표님.”
“난 이제 길어야 5, 6년이야. 그 이후로는 지문만 가지고 있고, 경영은 다른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야.”
“아직 정정하신데 10년은 더 하셔야죠.”
“허허허. 이 친구야, 내 나이가 내일 모래면 일흔이야. 5, 6년도 많이 잡은 거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바로 경영을 맡길 생각도 있어. 상황이 따라 주지 않으면 전문 CEO를 쓸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야.”
박정상이 쓴웃음을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JM액터스의 성장을 위해서는 탁월한 안목을 가진 김진석 대표가 필요하다. 사실상 JM액터스가 상장을 하고 업계 1위 연예기획사로 우뚝 살 수 있었던 것도, 김진석 대표의 안목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런 김진석 대표가 은퇴를 예고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를 감안하면 몇 년 전부터 전문 CEO를 기용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안목이야 경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적절한 조언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다.
“아쉽지만…… 대표님의 연세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죠. 은퇴하면 뭘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주도에 별장 하나 지으려고 땅 사 놨어. 넓은 마당에서 강아지 키우고, 낚시 다니면서 한량으로 살 거야. 그래서 말인데…….”
김진석 대표가 미소를 지은 채 박정상을 바라봤다.
최근 1, 2년 사이의 경험을 바탕으로, 박정상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해서, 박 실장이 내 뒤를 이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
김진석 대표의 제안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전문 CEO도, 가족도 아닌 매니저 출신 실장에게 JM액터스를 맡길 생각이라는 뜻이니까.
물론 김진석 대표의 성향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일 만한 제안이기도 하다.
김진석 대표에게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능력이지, 배경이 아니다. 박정상이 JM액터스를 잘 이끌어 나갈 거라고 확신을 품었기에, 그의 안목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박정상은 쉽사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당장에 답변하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파격적인 제안이었으니까.
“생각할 시간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연말까지면 되겠는가?”
“충분합니다.”
이에 김진석 대표는 연말까지의 유예 기간을 줬다.
만약 박정상이 대표직을 부담스러워한다면…….
‘그릇의 크기가 거기까지인 거겠지. 거절한다면 전문 CEO를 선택할 수밖에.’
김진석 대표가 진심으로 바랐다.
부디 박정상이, 자신이 지금껏 보아온 것처럼 큰 그릇을 지닌 사람이기를.
* * *
김진석 대표와 박정상이 미국에서 JM액터스의 미래와 관련된 중대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안시현은 다수의 지인들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그중에는 『Timeless』에 함께 출연하게 될 송강식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드라마 잘 봤다. 김희숙 작가님 스타일의 재벌물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1화인데도 캐릭터들의 개성이 확실히 살아 있고, 연출도 좋아서 몰입이 잘되더라고. 네가 악연으로서 뒤를 받쳐 주는 것도 인상적이고. 대박 나서 연말에 상 하나 받아야지? 아. 그리고 나 준비 시작했다. 너도 슬슬 시작할 때 되지 않았나? 언제 한번 만나서 같이 연습하자.
송강식의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서 답장을 적으며, 안시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내가 메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셨구나. 안목 좀 있으신 분들이라면 당연히 눈치 챌 거라고 생각했지만, 방송 끝나자마자 연락해서 말하실 줄이야.’
인터넷에서는 한창 백성훈과 백성아 중 누가 메인 주연이냐를 놓고 논쟁이 뜨거운 상황에서, 송강식은 안시현이 메인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알아보았다.
안시현은 새삼 송강식의 안목에 감탄했다.
1화만 놓고 보면 백성훈과 백성아의 존재감이 동일하게 부각되었기에, 백성훈이 악역으로서 백성아의 뒤를 받쳐 주는 역할이라는 걸 눈치채기가 어렵다.
백성아의 존재감이 본격적으로 부각되는 건, 곽훈이 백성훈의 뒤통수를 치고 백성아의 편이라는 걸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4화 이후부터다.
그 전까지는 딱히 두각이 드러나지 않는다.
실제로 백성아와 백성훈 중 누가 메인 주연이냐를 놓고 혼란을 주는 건, 『VVIP』의 이슈를 위해서 택한 홍보 전략 중 하나다.
설마 그것을 1화만 보고 대번에 간파할 줄이야.
‘하여간 안목 장난 아니라니까. 하긴, 그러니까 1000만 관객 돌파 영화에서 몇 번이나 주연을 맡은 거겠지.’
새삼 송강식의 안목에 놀란 것도 잠시.
안시현이 『Timeless』의 시나리오를 손에 쥐었다.
‘나도 슬슬 시작해야겠지.’
『VVIP』의 시청률에 안시현이 영향을 미칠 만한 부분은 적다. 정해진 홍보 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 정도가 사실상 전부다.
이는 사전 제작의 단점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드라마는 방영과 촬영이 일정 기간 차이를 두고 진행되다 보니, 시청자 반응을 보며 후반부 노선을 변경하거나 일부 아이디어를 추가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사전 제작은 사실상 시청자 반응을 반영하는 게 어렵다. 일부 연출에 변화를 주거나 내용을 삭제하는 것 정도가 한계다.
이는 바꿔 말하면 『VVIP』의 방영이 끝날 때까지 안시현이 백수라는 말이기도 하다.
홍보 일정을 비롯한 외부 스케줄이라고 해 봐야 일주일에 2, 3일이 전부다. 그마저도 넉넉하게 잡은 거고, 외부 스케줄을 선호하지 않는 안시현의 성격상 그보다 더 적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VVIP』가 종영할 때까지 안시현의 외부 스케줄은 7일밖에 잡혀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안시현은 『Timeless』의 시나리오를 손에 쥐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미 송강식은 준비를 시작한 상황.
안시현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2010년 초에 촬영이 시작할 예정이기에, 지금부터 캐릭터 구축을 시작해야 여유롭게 준비를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시현이 간만에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확실히 시나리오를 보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꼼꼼하게 체크한 게 인상적이야. 서로 친구라서 그런가? 스타일이 비슷한 것 같아.’
안시현은 『Timeless』의 시나리오를 보며 곽상필을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기욤 뒤자르댕과 곽상필의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사소한 부분까지도 꼼꼼하게 점검하고, 복선을 위한 장치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며, 선 굵은 캐릭터를 선호하다는 점 등.
생각보다 유사한 부분이 많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욤 뒤자르댕은 철저하게 예술 영화만을 만들어 왔다는 것 정도였다.
기욤 뒤자르댕과 곽상필의 스타일이 비슷한 덕분에, 안시현은 캐릭터 구축이 그리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곽상필과는 두 번이나 작품을 해 봤으니까.
임시방편으로 구축한 거긴 하지만, 오디션 당시 안시현이 보여 줬던 데이비드 킴 캐릭터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더욱 그러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시청률에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괜히 시청률 신경 쓰면서 시간 허비하느니, 종영 전까지 캐릭터 구축이나 하자.’
『VVIP』의 종영 전까지 데이비드 킴 캐릭터의 구축을 얼추 마무리하는 것.
새 목표가 생긴 안시현이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