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74화>
174화. 떠날 때가 됐어
인천의 한 조개구이집.
안시현이 최봉팔과 함께 조개를 구워 먹으며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데뷔 이후 줄곧 안시현에게 관심을 드러냈고, 안시현이 작품을 할 때마다 객관적으로 보이면서도 극찬을 하는 기사를 내보내며 도움을 주었던 기자였다.
“시현 씨 인터뷰하는 거 되게 오랜만이지 않아요? 특정 언론사와의 단독 인터뷰를 통 안 했었잖아요.”
“아무래도 자제한 편이었죠.”
“간만에 단독 인터뷰 하게 된 기분이 어때요?”
“색다르네요.”
특정 매체와의 단독 인터뷰는 『편지』이후 간만이다.
그래서일까?
안시현을 기자가 준비한 질문에 기분 좋게 답을 해 줬다. 다소 예민할 수 있는 질문마저도 노련미를 발휘하며 능구렁이처럼 논란이 일어나지 않는 답을 찾아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식사는 모두 끝났고, 소주 한 병을 마신 기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상태였다.
“아, 간만에 기분 좋게 마셨더니 취하네요. 마지막 질문 하고 인터뷰 끝내겠습니다.”
“벌써 끝나다니 아쉽네요.”
“아쉬우시면 『Timeless』 찍고 나서도 인터뷰 한 번 더 해 줘요.”
“하하하. 고려해 볼게요. 마지막 질문은 뭔가요?”
“다 알면서 물어보시기는. 내년에 『Timeless』를 촬영하고 나면 한동안 푹 쉴 예정이라고 하셨는데,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생각해 두신 게 있나요?”
기자는 마지막 질문으로 안시현의 이후 행보에 대해 물어보았다.
『VVIP』와 『Timeless』까지는 알려져 있지만,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는 휴식을 취할 거라는 거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혹시나 차기작을 고려하고 있다면 힌트라도 좀 달라는 뜻을 전한 것이다.
이에 안시현이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포함시켜 달라고 했던 질문이 말미에야 나왔다.
“일단은 말씀드렸던 대로 한동안 휴식을 취할 겁니다. 사실 제가 다작에 어울리는 연기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보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라도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딸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옆에서 1분 1초도 놓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Timeless』 이후의 차기작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계획해두지 않았습니다.”
“팬들이 아쉬워하겠는데요?”
“대신 힌트 정도는 드릴 수 있겠네요.”
“힌트요?”
“네.”
안시현이 잠이 뜸을 들였다. 흡사 중대 발표라도 하려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은 뒤에야 본론을 꺼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김희숙 작가님과 한 작품을 더 할 거라는 겁니다. 다만 그때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겠지만요.”
안시현이 화제성을 만들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 * *
-[단독] 안시현, 김희숙 작가와 한 작품 더 한다!
-마침내 찾아낸 믿고 보는 작가의 페르소나.
-주연이 아닌 조연, 안시현의 과감한 결단.
-JM액터스 ‘김희숙 작가 차기작, 현재 기획 단계. 제작까지 3~4년 걸릴 예정’.
안시현의 인터뷰는 큰 화제가 됐다.
그동안.
주연 배우로 김희숙 작가와 두 번 이상 작업을 한 건 지금까지 안시현이 유일하다.
다만 세 번은 없을 거라는 게 대다수의 예상이었다.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김희숙 작가가 페르소나를 만들 리가 없다고 본 것인데…….
대중들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지만, 김희숙 작가가 다시 한번 안시현과 작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언론들은 안시현이 김희숙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단막극 『스무 번』의 단역까지 포함하면 무려 네 번이나 같이 작업하는 것이기에, 페르소나라고 부르기에 무리가 없었다.
‘김 작가님 페르소나라면 좋지.’
안시현은 김희숙 작가의 페르소나라는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회귀 전.
2019년까지 단 한 작품도 실패하지 않고 모두 대박을 낸 작가다. 시청자들이 뭘 좋아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감각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
배역의 비중은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자신을 원하는지, 그 배역을 반드시 자신이 맡아야 할 이유와 매력이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김희숙 작가는 그런 안시현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고 딱 어울리는 배역을 제안했다.
『VVIP』의 백성훈이 그러했고,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 맡게 될 배역 또한 그러했다.
김희숙 작가라면 단순히 인지도를 보는 게 아니라 해당 배역에 해당 배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하기에 캐스팅을 할 터, 안시현의 입장에서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인터뷰가 『VVIP』의 화제성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사실 안시현이 김희숙 작가의 차기작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 주연을 맡는다는 건, 지금 상황에서 알려져 봐야 큰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빨라야 2014년 전후로 제작될 작품이니까.
안시현이 굳이 차기작 이야기를 꺼낸 건, 자신의 인터뷰로 인해 『VVIP』의 화제성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안시현의 인터뷰가 효과를 봤는지 아닌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VVIP』의 상승세는 엄청났다.
10화에서 29.5%의 시청률을 기록한 상황.
11화에서는 30%의 벽을 넘을 거라는 대다수의 예상대로 31.5%를 기록했다.
12화와 13화에서는 각각 31.6%와 31.8%로 상승세가 다소 꺾인 것처럼 보였지만, 백성아가 백성훈의 범죄 증거를 얻게 되는 14화에서 34.1%로 수직 상승하며 35% 돌파까지 앞두게 됐다.
고대하던 35% 돌파는 16화에서 이뤄지게 됐다.
35.5%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것이다.
17화에서는 36.1%를 기록하며, 백성훈과 백성아의 갈등이 매듭지어질 최종화에서는 어느 정도의 시청률이 나온 것인지 관심이 집중됐다.
『VVIP』의 상승세로 인해 창사 50주년 기념 블록버스터 드라마 『파일럿』의 시청률이 15% 내외에서 주춤하고 있는 MBS는 울상인 반면, STS 드라마국은 35%대의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VVIP』의 선전에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였다.
10월 29일.
『VVIP』는 최종화가 방영되는 날.
종방연과 더불어 최창국 PD는 제작 발표회에서 예고했던 공약을 오후 2시에 지키겠다고 선언했다.
바로 안시현과 우정태와 셋이서 아이돌 가수의 춤을 추겠다고 한 바로 그 공약을 말이다.
최종화를 앞두고 조금이라도 더 화제성을 만들어 시청률을 올려 보겠다는 계산이 깔린 움직이었고, 사전 제작이기에 정해진 결말을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최창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본부장님 덕분에 참 좋은 경험하네요.”
“생각보다 춤 잘 추시던데요?”
“그러게요. 우린 엄청 고생했는데, 시현이는 생각보다 쉽게 배웠잖아요. 시간이 남아 돌아서 안마의자에 앉아 시나리오까지 보고 말이죠. 몸치 자식이 춤은 왜 그렇게 잘 춰?”
“동작을 통째로 외우면 되는 거라 생각보다 쉽더라고요. 다음에도 이런 공약 걸어 봐야겠어요.”
“전 사양하겠습니다.”
“나도. 두 번은 좀…….”
최창국과 안시현과 우정태가 공약 이행을 위해 홍대로 이동하는 사이.
김진석 대표는 박정상을 만나고 있었다.
* * *
『VVIP』의 첫 방영 당시.
박정상은 미국 출장 중 김진석 대표로부터 JM액터스를 이끌어 보지 않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박정상은 답변을 보류했다.
JM액터스는 업계 최고의 연예기획사로 성장했다.
소속 연예인의 수는 어느새 100명이 넘어 원활한 관리를 위해 신사옥을 짓기로 결정했으며, 매년 자체적으로 한 작품 이상을 발표해 손익 분기점을 넘기며 제작사로서도 성과를 내는 중이다.
그런 대기업의 맡지 않겠냐고 제안을 받은 것이다.
솔직히 욕심이 났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고, 매니저 출신으로는 손에 꼽을 정도의 성공임이 자명했다.
그럼에도 박정상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 건,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내가 JM액터스의 대표 이사가 됐을 때, 전문 CEO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대표님이 제안하신 자리는 내 것이 돼서는 안 돼.’
매니저로서 두각을 나타낸 이후, 박정상은 수많은 연예기획사로부터 스카우트를 받았다. 심지어는 자금을 댈 테니 연예기획사를 차려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는 경우 또한 더러 있었다.
대형 연예기획사에서 JM액터스를 견제하기 위해 연봉을 두 배나 부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에도 박정상은 JM액터스에 남았다.
JM액터스의 대우가 나쁜 편이 아니기도 했으며, 이왕 성공할 거라면 JM액터스에서 하고 싶어서였다.
그만큼 박정상의 애사심은 엄청났다.
김진석 대표가 풋내기 매니저였던 박정상을 키워 보기로 결정했던 이유 중에는 애사심 또한 있었다.
그 애사심 때문에 고민이 깊어졌다.
자신보다 전문 CEO가 낫다면 대표 이사를 맡아서는 안 된다고, 회사에 손해를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근 두 달 가까이를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박정상이 결단을 내리고서 김진석 대표에게 식사를 하자고 먼저 요청했다.
간만에 함께하게 된 자리.
김진석 대표가 미소를 지은 채 박정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결심이 섰나 보군.”
“그 전에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표 이사로서 제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연봉은 어느 정도로 지급하실 생각인지 묻고 싶습니다.”
“허허허. 그렇지.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조건부터 확인하고 봐야지. 덥석 물면 실망했을지도 몰라.”
“자원 봉사를 할 생각은 없어서요. 아, 물론 바지사장도 취미는 아닙니다.”
“나도 꼭두각시 수집하는 취미는 없네.”
답변을 하기 전, 박정상은 일단 김진석 대표가 자신이 대표 이사가 됐을 때의 대우와 관련해서 사소한 것 하나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조건부터 확실하게 따지고 가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조건을 모두 이야기한 뒤.
김진석 대표가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이 정도 조건이면 만족하겠는가? 필요하다면 조율도 할 수 있네만.”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대표님의 지분을 일부 양도한다는 부분은 얼핏 과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만큼 내가 자네를 원한다는 뜻이지. 자, 이제 슬슬 대답을 해 주지 않겠나? JM액터스, 내 뒤를 이어 잘 운영해 볼 생각 있나?”
박정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진석 대표는 넉넉한 연봉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지분 일부까지 양도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또한 경영 과정에서 조언은 할지언정 간섭은 하지 않겠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사실상 김진석 대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박정상에게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박정상은 고민하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지분까지 양도하겠다고 한 마당에, 더 많은 조건을 요구하는 건 욕심이라고 판단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이 그만두시기 전까지 최대한 많이 배워 보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그럼 일단 사장부터 시작해 볼까. 내년 2월 인사 이동에서 바로 처리하지.”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이왕 할 거라면 빨리 시작하는 게 낫지. 그래야 자네가 배우는 기간 또한 늘어날 테니까.”
“으음. 그건 그렇죠. 시현이랑 진모한테 새 매니저 배정해 줘야겠네요. 봉팔이, 아니 최 팀장도 업무가 늘어나서 주요 스케줄 아니면 못 따라다니고 있는 상황이라…….”
“시현이와 진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녀석들도 이제 자네의 품을 떠날 때가 됐어. 자네가 너무 오냐오냐한 거라고.”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안시현과 김진모.
입사 이후 박정상은 줄곧 두 배우의 매니저만을 맡아 왔고, 실장으로 승진한 이후에도 두 사람의 매니저 업무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맡아야 할 업무가 늘어났지만, 두 배우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두 배우를 놓아줘야 할 때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