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174화 (174/224)

<다시 쓰는 필모그래피 175화>

175화. 이 정도면 굳이

종방연 다음 날.

『VVIP』의 제작진과 배우들이 공항에 모였다.

일찌감치 예정되었던 괌으로의 4박 5일 포상 휴가를 떠나기 위해서였다.

공항에 모인 이들의 표정은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VVIP』가 최종화에서 37.1%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으니까.

2009년 방영한 수목드라마 중 시청률 1위.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서 9주간의 대장정을 마쳤다.

특히나 최근 들어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김희숙 작가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걱정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역시 첫 번째 엔딩을 선택하길 잘했어요.”

“악역은 참교육을 당해야 제맛이죠. 개과천선했다면 오히려 찝찝했을지도 몰라요.”

“네. 당시에는 고민했지만, 지금은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촬영 당시.

김희숙은 『VVIP』의 엔딩을 놓고서 오랜 시간 고민을 했다. 악역인 백성훈이 철저하게 매장당하는 엔딩이기에, 안시현의 인지도로 인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엔딩을 하나 더 만들었다.

백성훈이 개과천선하는 엔딩을 말이다.

다만 촬영을 하지는 않았다. 엔딩 촬영이 다가올수록, 기존의 엔딩이 『VVIP』에는 적합하며, 새로 만든 엔딩의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이 났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온갖 범법 행위를 저지르고 이를 무마했던 백성훈이, 엔딩에 와서 개과천선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를 묵인하는 백성아마저도 엔딩에 와서 캐릭터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주연 배우들 또한 이에 동의했다.

“기존 엔딩이 몇 배는 더 나아 보여요.”

“제 생각도 같아요. 시현이의 찰진 악역 연기를 감안하면, 오히려 개과천선하는 걸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사람 열 받게 하는 악역일수록, 권선징악 엔딩일 때 대중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작가님, 저희가 언제 시청자들 눈치 보면서 드라마 찍었나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저희가 생각하는 최선을 택해야 한다고 봐요.”

주연 배우들의 만장일치 덕분에 김희숙 작가는 기존의 엔딩을 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는 최종화에서의 시청률과 호평으로 돌아왔다. 백성훈의 철저한 몰락 덕분에 용두사미 엔딩이 되지 않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만약 김희숙 작가가 엔딩을 변경했다면?

『VVIP』의 선전이 퇴색되지는 않았겠지만, 엔딩의 경우 다소 아쉬움을 남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현 씨가 너무 악역 연기를 잘해 줘서, 결과적으로 첫 번째 엔딩이 옳은 선택지가 되었어.’

사실 첫 번째 엔딩과 두 번째 엔딩은 백성훈의 존재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백성훈이 시청자들을 이 갈리게 만드는 악역이라면 첫 번째 엔딩이, 다른 방향으로 캐릭터성을 드러내거나 기대만큼의 연기력이 나오지 않는다면 두 번째 엔딩이 합리적인 판단이 되는 것이다.

안시현의 팬들마저도 백성훈은 때리고 싶다 이야기 할 정도로 열 받게 하는 악역이었다. 덕분에 첫 번째 엔딩이 대중들의 극찬을 받을 수 있었던 거다.

‘역시 시현 씨와 다시 한번 손을 잡기를 잘했어. 푹 쉬고 내년부터 다시 집필 시작해서, 2014년을 넘기기 전에 제작될 수 있게 해야겠어. 시현 씨라면 분명히 그 조연도 맛깔나게 연기해 줄 거야.’

김희숙 작가는 백성훈 역에 안시현을 캐스팅한 걸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몇 년 후.

『내 아내는 처녀귀신』에서도 안시현을 캐스팅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 되기를 바랐다.

*   *   *

안시현은 포상 휴가의 대부분을 호텔에서 보냈다.

다들 괌 곳곳을 돌아다니며 포상 휴가를 마음껏 즐기는 동안, 안시현은 식사와 운동을 할 때를 제외하면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우정태와 수영을 하러 나간 게 사실상 외출의 전부였다.

안시현이 혼자서 따로 행동함에도 스태프와 배우들은 이해했다. 오히려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 포상 휴가를 함께한 안시현에게 고마움까지 느꼈다.

사실 안시현은 포상 휴가를 마음껏 즐기기에는 다소 애매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Timeless』의 크랭크인이 1월 말로 확정된 상황, 캐릭터 구축에 매진해야만 했다.

‘데이비드 킴…… 보면 볼수록 까다로운 캐릭터란 말이야. 10대부터 30대의 모습을 70대 노인의 관점해서 표현해야 돼. 사소한 습관까지 완벽히 따라 한다는 건데…… 쉽지 않겠어.’

안시현은 데이비드 킴 캐릭터를 파고들면 들수록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70대의 관점에서 젊은 시절을 돌아보고 표현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설프게 따라 하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안시현은 자신이 외모만 젊은 70대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캐릭터 구축에 애를 먹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선생님의 연기야 회귀 전부터 수없이 봐와서 기본적인 특징은 파악하고 있어. 자료실을 이용한다면 연기에 필요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현재의 데이비드 킴을 연기하게 될 배우가 안시현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며, 참고할 영상 자료가 꽤나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포상 휴가 이후.

안시현은 한동안 JM액터스 자료실에서 비디오와 DVD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 배우의 연기를 보며 사소한 습관들마저 모조리 분석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12월이 됐다.

캐릭터 구축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던 안시현이, 한 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실례가 아니라면 함께 연습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허허허. 데이비드 킴이 조금 어렵지?

“네. 예상은 했지만 예상 이상으로 까다롭네요. 선생님께서 한번 봐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우리 시현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줘야지. 내일 오전에 JM액터스 사옥에서 볼까? 겸사겸사 간만에 진석이 놈이랑 한 잔 걸쳐야겠다.

“네. 제가 식사 대접하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한 원로 배우가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시현 선배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그는『나는 간첩입니다』에서 함께 출연했던 경험이 있으며, 안시현과 김진모가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가 될 것이라며 늘 극찬하는 원로 배우 이석재였다.

*   *   *

『Timeless』의 주연 배우들은 시간여행을 할 때를 기준으로 캐스팅됐지만, 현재의 주인공들을 연기하는 배우 또한 중요하다.

이는 기욤 뒤자르댕 또한 고민한 부분이었다.

현재의 주인공들로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느냐에 따라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데이비드 킴 같은 경우는 고민 끝에 이석재를 캐스팅하기에 이르렀다. 탄탄한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며, 안시현이 따라 하기에도 적합한 스타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포상 휴가 이후 안시현이 대부분의 시간을 이석재의 연기 스타일을 분석하는 데에 보냈다. 그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이 데이비드 킴을 제대로 연기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해서였다.

기욤 뒤자르댕의 말에 따르면, 다른 두 주연 배우 또한 같은 방법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시현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석재와 함께 연습을 하며 완성도를 높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주 적절한 선택이었다.

‘호오…….’

이석재는 안시현의 데이비드 킴 연기를 보자마자 두 눈을 크게 뜨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완성도가 아주 높은걸? 내 말투는 물론이거니와 제스처까지 완벽하게 따라 하고 있어. 10대, 20대, 30대를 따로 나눠 놨으면서도, 기본 틀은 똑같아.’

안시현은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의 데이비드 킴을 각각 나눠서 캐릭터를 구축하려고 했다.

포인트는 다르지만 이석재의 스타일을 바탕으로 연기를 하는 건 똑같았다.

심지어 완성도마저도 높았다.

말투는 물론이거니와 이석재가 인상을 쓸 때 새끼손가락을 까닥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습관까지도 완벽하게 따라 했다.

안시현이 이석재를 분석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확 티가 났다.

몸은 안시현인데 연기를 하는 사람은 이석재라고 보일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거였다.

안시현의 연기가 끝난 뒤.

이석재가 미소를 지은 채 어깨를 두드렸다.

“허허허 이 정도면 굳이 나랑 같이 연습할 필요가 없겠는데? 새끼손가락마저 캐치했잖아.”

“포인트를 제대로 짚은 건지 선생님께 확인받고 싶었어요. 다행히 괜찮았나 보네요.”

“기욤 뒤자르댕 감독이 강식이가 아니라 시현이 널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구나. 갓 데뷔했을 때가 며칠 전인 것 같은데, 이제는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배우로 성장했어.”

사실 이석재는 필요에 따라 안시현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JM액터스 사옥을 방문했다. 그만큼 데이비드 킴이 까다로운 캐릭터라고 봤다.

하지만…….

이내 쓸데없는 걱정이란 걸 깨달았다.

더 이상 안시현은 누군가의 조언을 필요로 하는 배우가 아니었으니까.

*   *   *

연말은 시상식의 기간이다.

연기대상, 연예대상, 가요대상 등 각종 시상식이 연달아 열리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는다. 방송사들 또한 시상식의 시청률이 잘 나오는 걸 알기에 최대한 공들여서 준비하는 편이다.

2009년 12월 26일 토요일.

STS 연기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우정태와 함께 레드카펫을 밟은 안시현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안시현 배우님, 『VVIP』의 주연 배우들이 나란히 대상 후보에 올랐는데, 대상 수상을 확신하십니까?”

“네, 확신합니다. 제가 아니라 나래가요. 개인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동고동락한『VVIP』 식구들이 최대한 많은 상을 받는 겁니다. 저를 제외하고요.”

그동안.

안시현은 내심 수상을 기대하며 시상식에 참여했다. 그만큼 자신이 좋은 연기를 보여 줬다 확신했고, 수상은 연기력을 입증해 주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잘해야 인기상 정도 받겠지.’

대상 후보 중에서 대상과 최우수상 수상자가 나오는 구조이지만, 안시현은 둘 중 어느 것도 자신의 손에 쥐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상은 한나래가, 최우수상은 우정태가 받기를 바랐다. 백성훈의 악역 포지션을 감안하면 자신이 수상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봤다.

무엇보다 존재감과 비중 모두 백성아와 곽훈 쪽이 백성훈보다 높았다.

백성훈이 화제가 된 건 안시현이라는 배우가 연기했기에, 그리고 2009년에 방영한 드라마의 악역 중 가장 존재감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VVIP』에서의 공헌도를 보면 자신보다는 한나래와 우정태가 수상하는 게 맞다고 안시현은 생각했다.

실제로 안시현의 생각은 절반이 현실화됐다.

한나래가 생애 최초로 연기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우정태는 아쉽게도 최우수상 수상에 실패하긴 했지만, 『VVIP』는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하고 신인상 또한 쟁취하는 데에 성공했다.

거기에 안시현의 인기상 수상은 보너스였다.

인기상은 문자 그대로 인기에 따라 결정되는 수상 부문이기에, 『VVIP』가 대성공을 하며 안시현의 수상은 일찌감치 예고된 것이었다.

STS 연기대상 시상식 이후.

안시현은 연말을 가족들과 별장에서 보냈다.

이제 제법 말도 잘하고 걸음마도 수준급이 된 라온이, 그런 라온이의 재롱을 보며 행복해하는 부모님, 모처럼 휴가를 내고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는 정혜영까지.

며칠 남지 않은 연말은 참으로 알차고 뜻깊었다.

그리고 다가온 2009년의 마지막 날.

“라온아, 아빠한테 인사해야지.”

“다녀오세요!”

“우리 라온이, 아빠 없는 동안 엄마랑 잘 지내고 있어. 안 울면 돌아올 때 인형 사다 줄게.”

“라온이 안 울 거예요! 엄마 말 잘 들을 거예요! 약속!”

“하하하. 그래, 약속.”

안시현이 하루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가족들을 뒤로한 채 송강식과 함께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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